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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적 다양성, <로리타>와 <로리타>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적 다양성, <로리타>와 <로리타>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21.12.31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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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텐리 큐브릭의 <로리타>와 에드리안 라인의 <로리타>

팬데믹 상황에서 영화관 가기가 쉽지 않은 요즘, 집에서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방법으로 다음의 두 영화를 비교해서 볼 것을 권해본다. 하나는 스텐리 큐브릭의 <로리타>이고 다른 하나는 에드리안 라인의 <로리타>다. 언뜻 같은 영화처럼 보이지만 사실 두 영화는 꽤 다른 영화다. 스탠리 큐브릭의 <로리타>는 블랙 코미디라고 할 수 있다면, 에드리안 라인의 <로리타>는 심리스릴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만 보면 장르를 비교하는 영화적 주제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은 오해와 편견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로리타>가 블랙 코미디라니!) 게다가 스탠리 큐브릭의 <로리타>는 에드리안 라인의 <로리타>와 비교하여 볼 때 의외로 졸작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문학적 표현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보면 두 영화는 서로를 보완해주는 관계라고도 말할 수 있다.

 

스탠리 큐브릭의 <로리타>(1962)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로리타>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장편 소설 『로리타』에 더 충실하다. 주인공 험프리의 비밀일기 내용을 내레이션으로 세세하게 읊조리는 장면 등에서 이러한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로리타>의 줄거리를 요약해 보면 이렇다. (내가 그 유명한 <로리타>의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름과 명성에 비해 이 영화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의외로 드물기 때문이다.)

 

프랑스 문학을 강의하기위해 미국을 방문하게 된 주인공 험프리(제임스 메이슨)는 하숙집 주인인 샬롯(쉘리 윈터스)과 그녀의 딸 돌로레스(수 라이언)를 만나게 된다. 돌로레스를 보게 된 그 순간, 첫눈에 사로잡히고만 험프리는 금기가 설정되어 있지 않은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녀를 향한 감정을 숨김없이 일기장에 기록해둔다. 모든 비극은 바로 그 일기장에서부터 비롯된다.

 

에드리안 라인의 <로리타>(1997)

나보코프가 소설 『로리타』를 발표했을 당시의 사회적 반향과는 별개로, 사실 우리가 흔히 ‘로리타 신드롬’이라고 이해하는 금기적 판타지에 가장 영향을 많이 준 감독이 바로 에드리안 라인이다. 에드리안 라인 감독은 필모그래피만 확인하더라도 그 이유를 잘 알 수 있다. <플래시댄스>, <나인하프위크>, <위험한 정사>, <은밀한 유혹> 등은 그가 여성의 신체를 영화적으로 얼마나 잘 다룰 줄 아는 감독인지를 보여준다. 그 중 <플래쉬 댄스>는 그의 이런 경력을 화려하게 알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에드리안 라인 감독이 <은밀한 유혹>이후 <로리타>를 선택하게 된 표면적 이유는, 모르긴 해도, '여성의 몸'에서 '남성의 정신'으로 이행하려는 그만의 변화욕구에 따른 결과라고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건, 에드리안 라인 감독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과는 다르게 <로리타>에서 주인공 험프리(제레미 아이언스)가 돌로레스(도미니크 스웨인)에게 매료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어릴 적 경험한 첫 사랑의 죽음을 무의식에 자리 잡은 어떤 충동의 근간으로 해석하여 영상미학적 강렬함을 극대화 한다.

 

두 감독 작품의 특징

그러면 왜 스탠리 큐브릭의 <로리타>는 블랙코미디라고 할 수 있을까? 첫째, 모순을 넘어 금기적 상황을 묘사하여 골계미를 드러내는 양식을 차용하기 때문이다. 의붓딸과 호텔 방을 함께 사용하게 될 때 발생하는 희극적 상황이 이를 잘 설명해준다. 둘째, 소품이 가진 의미의 극적인 전이 때문이다. 샬롯을 죽이려 했던 권총이 샬롯의 죽음을 비통해 하는 감정의 상징으로 급변하는 것을 보면 이 설명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서민적이며 보통의 인간을 강조하는 모순적 인물의 출현 때문이다. 퀼트(피터 셀러스)가 보통사람의 의미를 강조하면서도 셀럽의 의미를 공유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가 부조리한 일상적 존재임을 끊임없이 주장하기 위해서다. 넷째, 돌로레스의 백치미와 껌을 씹는 행위. 이로써 희극적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그녀는 실제로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이유들로 인해, 스탠리 큐브릭의 <로리타>는 블랙 코미디의 희극적 요소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에드리안 라인의 <로리타>는 왜 심리스릴러라고 할 수 있을까? 첫 째, 승산 없는 관계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신과 인간의 싸움에서 인간이 승리할 가능성이 없듯이, 나이든 남자와 어린 소녀와의 관계는 결국 행복으로 귀결될 수 없다. 둘 째, 험프리와 돌로레스와의 감정적 혼란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감정의 흐름을 알 수 없는 이런 서사는 결국 어느 한 쪽의 감정으로 치우칠 수 없게 한다. 셋 째, 추격자와 도망자의 명확한 설정으로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퀼트(프랭크 란젤라)를 묘사하는 장면은 이를 가장 잘 보여준다. 넷 째, 불행한 결말을 암시하고 있어서다. 영화 첫 장면에서 험프리의 피 묻은 얼굴과 넋이 나간 눈으로 위태롭게 운전하는 장면은 비극적 주인공임을 극적으로 강조한다.

그러면 험프리는 왜 죽어야 했는가. 이 나이든 남자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샤이닝>의 주인공 ‘잭’(잭 니콜슨)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샤이닝>의 잭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불안’에 사로잡혀 결국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이다. 험프리 역시 비극을 안겨준 경험에서 기어이 벗어나지 못하고 마는 인물이다. 뭔가에 사로잡히고 마는 사건은 곧 죽음을 몰고 온다. 양육강식의 세상에서는 뭔가에 집중하고 있는 동물은 곧 포식자에게 잡아먹히고 마는 법이다. 그의 죽음은 (일기장에 기록하듯) 이런 세상을 문서화한다는 차원에서 보면, 영화 마지막 짧은 문장으로 제시된 그의 부고는 어쩌면 당연한 작업인지도 모른다.

이제 돌로레스. 돌로레스는 결국 일상의 삶을 택한다. 험프리가 여전히 판타지에 빠져있을 때 그녀는 과감하게 현실을 선택한다. 사실 험프리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사랑한 사람은 퀼트였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두 감독의 연출 의도는 극명하게 갈린다.

먼저 스탠리 큐브릭 감독과 에드리안 라인 감독은 험프리의 죽음을 ‘재판 중 관상동맥 혈전증으로 죽었다’는 구체적 사유를 제시하지만, 에드리안 라인 감독은 돌로레스 역시 출산 중 죽었다는 사유를 제시한다. 특히 험프리가 1950년 11월 16일 죽었고, 돌로레스는 같은 해 크리스마스에 아이를 낳다 죽었다고 알리면서 기어이 둘 사이의 관계를 이어보려 노력한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두 감독의 마지막 정리는 왜 돌로레스의 생사에서도 갈리는가?’

이는 두 감독이 바라보는 판타지의 의미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테면 큐브릭의 험프리는 현실로 복귀한 후 죽지만, 라인의 험프리는 여전히 불안 판타지에 사로잡혀 있다가 죽고 만다는 것. 어쩌면 라인 감독은 사랑의 순수한 원형이라는 판타지를 인정하고 싶어 했다면, 큐브릭 감독은 현실을 혐오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판타지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어 했는지 모른다.

상징이 심각해지면 규율 같아지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분명 해석의 여지가 풍부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로리타 신드롬이 질병인 한, 그것이 함축하는 위험성이야 재론의 여지가 없으나, 영화적 표현에서 ‘로리타’가 블랙 코미디로서의 소재로 충분히 다뤄질 수 있다는 점은 영화적 다양성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오해와 편견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영화의 세계가 주도하는 다양성은 <로리타>에서도 이렇게 찾아 볼 수 있다.

 

 

글·지승학
영화평론가. 문학박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홍보이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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