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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정상이자 비정상인 죽음에 관하여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정상이자 비정상인 죽음에 관하여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21.12.31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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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호 감독의 웹드라마 <지옥>-

CG처리된 지옥의 사도가 괴물처럼 달려들 때 처량한 먹이 감처럼 도망치는 사람은 전형적인 희생자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판타지 캐릭터들을 동원했음에도 철저한 규칙을 엄밀하게 보여줄 때면 이들은 현실의 법을 집행하는 집행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정의로운 히어로인가? 아니면 KBS 예능프로그램이었던 <꿍꿍따>가 유행하던 시절 우르르 뛰쳐나와 벌칙을 수행하던 벌칙맨들인 건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들은 도대체 누구, 아니 무엇이란 말인가?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웹드라마 <지옥>은 괴물처럼 보이는 비현실적인 지옥의 사도를 냉혹한 현실 속 서사에 배치함으로써 현실성 그 자체를 폐기할 만큼 강렬하게 법, 과학, 종교, 문화 등을 모조리 재부팅 해버린다.

참 희한한 일이다. 수백억이 들어간 CGI처럼 조금도 이질적이지 않은 그래픽도 아닌 것이 어떻게 블록버스터 급 캐릭터보다도 더 사실적이다 못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문제를 온당하게 주무르고 있느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주류적 규범에서 배제된 존재라고 섣불리 타자화하기도 어렵고, 이상적 자아로서 동일시할 수 있는 캐릭터라고 말하기도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더러운 얼룩처럼 없애버릴 수 있는 대상도 아니고 보기 싫다고 추방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다만 한 가지, 그들로 인해 우리가 알던 죽음의 의미가 기존과는 결코 같아질 수 없게 되었다는 것, 그거 하나만은 확실하다.

 

이를테면 <지옥>에서의 죽음은 죄와 벌의 관계와 별 상관이 없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사고로 생각한다. 그래야만 지옥의 사도들이 출현하는 상황을 합리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서 죽음은 정상적인 일이 되기도 하면서 동시에 비정상적인 일이 되기도 한다. 그러면 <지옥>에서 정상성과 비정상성을 모두 가지게 된 죽음은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 걸까?

그 힌트는 먼저 <지옥>은 모두가 주인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서사를 가지고 있다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 어쩌면 <지옥>은 바로 이렇게 모두가 주인공일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기위해서 죽음의 의미를 변형시키고 있는건지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영화의 서사는 복잡한 관계 설정에 집착해야한다. 나는 이것을 ‘네트워크 네러티브’의 속성이라고 이해한다. 마블 코믹스가 수행하고 있는 바로 그 전략 말이다. 멀티버스 개념도 결국은 네트워크 네러티브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연상호 감독이 ‘네트워크 네러티브’를 구현하려면, <염력>과 <부산행> 그리고 <지옥>의 서사를 연결시켜야 할 것이지만 아직 그럴 수 있는 당위성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태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연상호 감독이 네트워크 네러티브를 마련한다고 할 때, <지옥>에서의 변화된 죽음의 의미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네트워크 네러티브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략이 있을 수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성공적인 예가 마블 세계관이다. 특히 캐빈 파이기는 캐릭터를 통해서 네트워크 네러티브를 구성한다. 하지만 연상호는 죽음을 재해석함으로써 네트워크 네러티브를 조금 다르게 구성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여기에서 캐릭터냐 죽음의 의미변화냐의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어쩌면 K-movie의 특징을 여기에서부터 마련할 수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죽음의 규정을 바꾸는 방법은 캐릭터를 기능적으로 소비해버리는 마블 식 네트워크 네러티브의 한계를 여러 면에서 극복할 수 있다. 첫 째, 죽음에 직면한 존재를 모두 캐릭터화 할 수 있게 된다. 캐릭터가 전제가 되어야만 가능한 마블식 네트워크 네러티브와 달리 변화된 죽음의 의미, 즉 죽음의 선고를 맞이하게 되면 그 인물은 자연스럽게 캐릭터화가 가능해지는 장점이 생긴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박정자(김신록)다. 둘 째, 생과 사를 가르는 희생의 의미를 복기할 수 있다. 갓난아이의 죽음을 온몸으로 막아선 부부 이야기는 신파라기보다 새로운 이야기의 출발을 알린다. 셋 째, 정확한 죽음의 예고는 한 사회의 문화적 관습적 가치를 움직일 만한 메시지를 충분히 생산할 수 있다. 정진수(유아인) 에피소드는 그런 가능성에 불을 지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나름의 요소들은 다양한 인물을 연결 할 수 있는 포털을 열어 놓은 것이기도 하고, 현실과 괴리된 판타지를 현실 세계로 끌고 들어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기도 한다.

<지옥>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정상과 비정상이 뒤엉킨 죽음’은 등장인물을 소모적 캐릭터나 ‘엑스트라’로 전락시키지 않고 모두에게 말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특히 여기에서 중요하게 덧붙일 수 있는 사실은 그렇게 되면 그들의 이야기에 쉽게 공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좀 더 과감하게 주장하자면 <지옥>이 제시하는 ‘죽음’의 의미변화는 죽음의 본질이 사실 복합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담아 낼 수 있게 해준다. <지옥>은 적어도 죽음을 통해서 이 세상의 모든 절대적 경계들에 대해서 확신보다는 의심을 품게 될 경우, 훨씬 더 생산적인 의미를 창조할 수 있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 한다.

이유야 어떻든, <지옥>의 연상호 감독은 자기 이야기의 새로운 관계망을 확보해 놓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글·지승학
영화평론가. 문학박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홍보이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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