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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미의 문화톡톡] 당신의 집은 누구의 것입니까?
[장윤미의 문화톡톡] 당신의 집은 누구의 것입니까?
  • 장윤미(문화평론가)
  • 승인 2022.01.10 10: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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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설에 나타난 집과 가족의 의미①
손원평, [타인의 집](창작과 비평사, 2021)
손원평, [타인의 집](창작과 비평사, 2021)

내 집을 가질 수만 있다면

노동의 가치가 하락하고 돈이 돈을 버는 시대가 되면서 자본에 따라 집의 크기와 의미는 분절된 가족의 형태와 의미만큼 각각 쪼개지고 다양해졌다. 1인 가구가 급증하면서 집의 양은 늘어났지만, 질은 훨씬 낮아졌다. 집이라 부르는 대신 방의 개수에 따라 원룸, 투룸으로 불리는 것이 더 익숙하다. 화장실과 부엌이 달린 원룸에서 사는 건 그나마 형편이 괜찮은 정도고, 방 이외의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야 하는 고시원이나 쉐어하우스에서 사는 경우도 흔하다.

혼자서 벌고 혼자서 쓰는 것만으로 버거운 개인이 방 세 개, 거실 하나, 화장실 두 개 달린 ‘국민주택형’ 집을 얻는 건 그야말로 특별한 조건을 덧붙이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특별공급, 특별 전형에 지원하려면 최소한 내가 그 대상에 부합한다는 것을 서류로 증명해야 하는데, 증명 서류란 재산은 없고, 부양해야 할 가족은 많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들이다. 뿌듯함보다 씁쓸함이, 설레임보다 박탈감이 생기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손원평의 「타인의 집」과 김하율의 「어쩌다 가족」은 각각 내 집을 얻으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담은 소설이다. 각 소설 속 주인공은 집을 갖기 위해, 그리고 그 집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낯선 사람과 가족을 재구성한다. 그 방식은 기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극히 현실적이라 쓴웃음이 나올 정도다. 집을 얻기 위해 주인공들 하는 선택은 생존과 허세 그 어디쯤 놓여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집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럴듯한’ 집이다. 그럴듯한 집을 구할 수만 있다면 내키지 않는 과정은 충분히 감수해야 한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믿음은 비과학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이라 툭하면 나를 배신한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당신의 집은 누구의 집입니까?

주인공 시연(나)는 파혼 경험이 있다. 남자친구와 장거리 연애 끝에 결혼을 약속했지만, 예산을 훌쩍 넘는 집값이 두 사람의 사랑을 시험에 들게 한 것이다. 남자친구는 잠깐이면 되니 자신의 부모와 함께 사는 것을 제안했지만, 시연은 거절했다. 결혼이란 사랑의 결실이 아니라 새로운 공간에서 새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시작점이라면, 시작은 시작다워야 함에도 경제적 처지를 핑계로 부모에게 편입되길 요구하는 남자친구에게 실망하여 파혼을 선언한 것이다.

타인에게 편입되는 건, 결과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한다는 걸 시연은 잘 알고 있다. 시연은 그런 상황을 애초에 만들고 싶지 않았다. 시연이 원하는 집이란 타인의 간섭을 받지 않는 공간이되, 동시에 타인과 너무 멀어지지 않는 공간이다. 친구네 집은 외롭지 않지만, 간섭과 눈치를 견뎌야 하는 공공의 공간이고, 고시원은 사방이 벽으로 밀폐된 독립적 공간이지만 내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곧 민폐인 외로운 공간이란 걸 몸소 경험한 시연은 자신이 주체가 되든, 대상이 되든 편입이나 순응은 결과적으로 자기 손해라는 걸 깨닫게 된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그녀는 영리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 영리함으로 자신의 욕망을 적절하게 채워줄 영리한 집을 찾아다닌다.

그러던 중 쾌조가 인터넷에 올린 세입자 공고 안내를 보고 시연은 세입자 면접에 나선다. 집 전체가 아니라 전셋집의 방 한 칸을 빌리는 월세라는 불법에 가까운 편법적 계약과 이전 방주인이 자살했다는 사실이 걸리긴 했지만, 시세보다 턱없이 싼 가격, 집 주변에 널린 각종 편의시설은 자신이 꿈꿔왔던 집의 모습에 가까웠다. 거실을 통해 방에 들어가면 화장실까지 딸려 있어 멀리서 보면 원룸이 아니라 어엿한 집이다. 게다가 역세권 스세권, 슬세권에 속해 있어 사람들과 멀어지지 않으면서 유쾌한 일상을 즐길 수 있다. 이중계약으로 보증금은 물론 법적 문제에 휘말릴 수도 있고, 죽은 이전 방주인 생각에 밤바다 무서움에 몸부림칠 수 있지만 이 모든 걸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장점이 가득한 집이다. 타인들로부터 ‘괜찮은’ 집에 사는 사람이라는 부러움을 얻는 건 ‘하이 리스크’에 따른 ‘하이 리턴’이다.

한편 다른 방에 세를 얻어 사는 재화가 사용료를 낼 테니 시연의 방에 딸린 화장실을 함께 쓰고 싶다는 제안을 하지만 시연은 거절한다. 시연이 파혼을 선언한 이유나 재화의 제안을 거절하는 이유는 다르지 않다. 시작의 모양새는 시작다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쪽은 편입을 허락한 사람으로, 다른 한쪽은 편입된 사람이 되어 결과적으로 둘 다-체념에 가까운-순응의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쾌조를 중심으로 재화, 희진, 그리고 시연의 이해관계가 지속되기 위해서 지켜야 할 규칙은 한 가지다. 자신이 지불한 것만큼만 누리는 것. 다른 방의 세입자인 희진과 재화가 매일 다투는 이유는 뻔하다. 자신이 지불하지 않은 것을 욕망했기 때문이다. 각자도생과 마이웨이가 디폴트인 이 집단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두 가지다. 기회주의자가 되든지 아니면 철저한 원리주의자가 되든지.

그런데 각자도생의 원칙을 버리고 협력해야만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진짜 집주인의 등장한 것이다. 쾌조가 만들고 세입자가 동조한 편법적 계약이 들키지 않으려면 이들은 가족이 되어야 했다. 쾌조와 재화는 남매로, 나와 희진은 재화의 친구가 되어 남의 집, 즉 타인의 집에 놀러온 손님 행세를 해야 했다. 나는 이 집에 대한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남이 빌린 집의 일부를 다시 빌린 불법에 가까운 편법 계약자에 불과하다. 집주인은 다른 예비 집주인을 불러놓고는 이 집을 팔 것을 예고한다. 예비 집주인은 곳곳을 누비며 마치 집주인처럼 행세한다. 핸드폰 카메라를 들이댈 때 카메라에 잡히지 않기 위해 피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마치 ‘빛을 피해 도망가는 바퀴벌레’와 같다고 비유한 문장은 이 소설의 핵심을 드러내는 표현이기도 하다.

시연은 남 보기에 괜찮고 살기에도 쾌적한 이 집에서 오래 살기를 바랐지만, 이는 시연의 헛된 욕망이었을 지도 모른다. 이 집은 내 집이 아니라 타인의 집이기 때문이다. 즉 편입과 순응을 요구하는 타인의 집. 시연은 집주인이 아니다. 하지만 쾌조도 마찬가지다. 그는 전세 계약자이지만 남은 세 명이 가진 집의 지분보다 훨씬 적게 가지고 있어 아이러니하다.

법적으론 이 집의 주인은 자본을 치른 사람이 집주인지만, 집주인 역시 집을 타인에게 빌려준 계약 기간 만큼은 온전한 주인 행세를 할 수 없기에 온전한 의미에서는 집주인이라고 할 수 없다. 결국 자신의 자본만으로 값을 치른 사람이 들어와 살지 않는 이상, 이 집은 영원히 ‘타인의 집’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시연에게 닥친 문제, 이 집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문제는 현실이 될 수도 있고,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주인이 바뀌어도 지금처럼 문제없이 슬리퍼를 신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쇼핑을 할 수도 있고, 반대로 보증금도 돌려받지 못한 채 빈털터리로 고시텔로 돌아가 숨죽이며 살아야 할 수도 있다. 시연의 운명은 오로지 사슬처럼 엮인 타인과의 관계로 규정될 뿐이다. 시연이 사는 이곳이 내 집인지 아니면 타인의 집인지 결정하는 건 시연 자신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라 타인의 결정에 달려 있으므로.

 

*이 글은 <K-문화융합> 하반기호에 실린 글을 발췌, 수정한 것입니다.

 

글·장윤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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