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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의 문화톡톡] 아이와 함께 하는 역사문화기행(紀行) : 주시경과 한글가온길
[김정희의 문화톡톡] 아이와 함께 하는 역사문화기행(紀行) : 주시경과 한글가온길
  • 김정희(문화평론가)
  • 승인 2022.01.17 10: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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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말을 적으면 그만일 뿐" (주시경, 1876~1914)
한글가온길새김돌한글가온길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3길 (세종대로 23길)
한글가온길새김돌. 한글가온길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3길 (세종대로 23길)
‘가온’은 중심 또는 가운데를 의미하는 순우리말로 한글가온길은 한글중심길 이라는 순우리말 표현이다.

부모는 대개 자신들이 교육받고 살아온 경험에 근거하여 아이를 교육하고자 한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이하여 환경의 변화는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다. 검색해보면 몇 초 만에 거의 모든 정보를 알 수 있는 세상에서, ‘언제 무엇을 가르쳐야만 하는지’에 대한 부모의 오래된 경험들은 큰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 아이들은 기다려주지 않고 매일 자라난다. 어떤 선택이 최선의 방법인가?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

달라진 점은 부모가 아이와 함께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제공되는 정보와 지식의 양이 너무나 많아서 부모가 아이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내용들이 제한적이고, 그렇다고 해서 아이의 교육을 아주 어릴 때부터 외부에 맡길 수도 없다. 스스로 정확하고 적절한 정보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줘야 한다. 이러한 능력은 생각할 수 있는 힘에서 기인한다. 즉,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교육일 것이다. 어떻게 부모들이 아이와 함께 공부하며 아이의 사고력을 키울 수 있을까?

아이와 함께 공부하기 위해서는 아이와 시간을 함께해야 한다. 아이와 시간을 함께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함께 걷기이다. 천천히 길을 걸으면서 보이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저절로 여러 생각들이 떠오를 것이다. 루소도 산책을 통해 생각이 자유롭게 흘러가도록 했을 때 자신을 가득 채우던 몽상(夢想)들을 글로 남겼다. 루소는 혼자였으나 우리는 아이와 함께 길에서 질문을 해보고 답을 찾아보자.

 

한글회관
한글회관.  한글학회가 1958년에 이사와서 1977년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현재 501호에 한글학회사무실이 있다. 

한글가온길

필자의 집 근처에는 한글가온길이 있다. 이 길에는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가 있어서 아이와 함께 나눌 수 있는 질문들이 많이 있다. 지금은 코로나로 인해 운영이 중단된 상태지만, 종로구청에서 진행하는 종로테마여행 골목길탐방 중 ‘세종한울길’ 탐방코스가 가이드가 될 수도 있다. 한글가온길은 구세군회관 앞 사거리에 있는 한글가온길 새김돌을 시작으로 한글학회가 있는 한글회관, 한글이야기마당을 지나 주시경마당과 주시경선생집터로 연결되어 있다. 길지 않은 길이 다시 한글글자마당, 한말글 수호 기념탑, 세종대왕 동상, 세종이야기 등으로 이어져 있다. 길 곳곳에 '나는 한글이다'라는 한재준작가의 작품부터 시작하여 18가지의 한글 숨바꼭질이 숨어있다. 놀이처럼 하나씩 찾아보면 아이들이 매우 좋아한다.

 

주시경마당     주시경선생
주시경마당에 있는 주시경선생부조 

글은 말을 적으면 그만일뿐

주시경 (1876~1914)

먼저 소개하고 싶은 장소는 바로 주시경 마당이다. 지금 공사 중이지만 주시경 마당에 가면 주시경 선생의 부조가 있다. <주시경선생전기>를 엮은 김윤경에 따르면, 주시경 선생이 어릴 때부터 '연구력, 지식욕, 철저한 의지력'이 있었다고 한다. 주시경 선생은 8살 때 서당에서 공부를 마치고 하늘이 어떠한가 만져보고 싶어서 산에 오르게 되었는데, 혼자서 산꼭대기 끝까지 올라가서 확인을 한 이후에야 하늘과 맞닿은 하늘이 눈의 착각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선생은 서당에서 공부하던 중 한문의 뜻을 해석하려면 반드시 우리 말로 번역함을 보고 ‘글은 말을 적으면 그만이다’라는 생각이 떠올랐다고 한다. 이것이 한글 연구에 일생을 바치게 된 동기라고 한다. 강의용 책 보따리를 들고 계신 주시경 선생의 부조 위에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나니라'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말은 사람과 사람의 뜻을 통하는 것이라 한 말을 쓰는 사람과 사람끼리는 그 뜻을 통하여 살기를 서로 도와줌으로 그 사람들이 절로 한 덩이가 되고 그 덩이가 점점 늘어 큰 덩이를 이루나니, 사람의 제일 큰 덩이는 나라니라. 그러하므로 말은 나라를 이루는 것인데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나니라.’

아이가 자신이 쓰는 말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장소로 이만한 곳이 없을 것 같다.

 

한글이야기마당
한글이야기마당. 한글회관 건너편 ‘이야기를 잇는 한글가온길’ 10개의 이야기가 전시되어 있다.

한글이야기마당- 역사 속 한글 이야기

한글이야기마당에는 생각보다 작은 액자에 한글과 관련된 10가지 이야기가 전시되어 있다. 10가지 이야기 모두 아이와 나눌만하지만, 이 중에서 인상적인 이야기 몇 가지를 소개하려고 한다. 첫 번째 이야기는 '한글 벽서 사건'이다. 세종28년(1446년)에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3년 뒤의 일이다. 황희정승이 87살의 나이로 은퇴하였는데 뒤를 이어 74살이었던 하연이 영의정 부사가 되었다. 하연이 나이가 많아 까다롭게 살피고, 행사에 착오가 많았다고 한다. 세종31년(1449년) 담벼락에 누군가 “하 정승아, 망녕되게 하지 마라”라는 한글 벽보를 붙여놓은 사건이 있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나와있는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면 깨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열흘만에 배울 수 있다.'는 정인지의 말처럼 쉬운 한글을 통해 백성들은 누구나 생각을 적어 알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하 정승아, 망녕되게 하지 마라” 세종28년(1446년) 한글벽서사건 

두 번째 이야기는 '임진왜란 때 암호로 활약한 한글'이다. 임진왜란 당시 포로가 된 사람들중 한문을 모르는 많은 백성들에게 조정의 뜻을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해 '백성에게 내리는 글'을 국문으로 썼다. 왜군들은 한글을 모르니 자연스럽게 암호처럼 사용되었다. “어쩔 수 없이 왜인에게 붙들려간 백성들의 죄는 묻지 않는다. 왜군을 잡아오거나 왜군의 동태를 알아오거나 포로가 된 우리 백성을 데리고 나오는 자에게는 천민· 양민을 가리지 않고 벼슬을 내릴 것이다. 조선군과 명나라군이 연합하여 왜군을 소탕하고 그 여세를 몰아 왜국으로 들어가 분탕할 계획이다. 그전에 서로 알려 빨리 적진에서 나오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당시 김해 수성장 권탁은 실제로 이 문서를 가지고 적진에 잠입해서 왜군 수십명을 죽이고 포로가 된 우리 백성 100여명을 구출했다고 한다. 선조 임금은 의주로 피난을 간 상황에서 이미 포로가 된 백성들에게 이런 교서를 내렸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한글이 전쟁상황에서 소통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을 아이는 어떻게 생각할까?

 

전기수살인사건 정조14년 (1790년) 8월10일

세 번째 이야기는 거리의 이야기꾼 전기수 살인사건이다.

“항간에 이런 말이 있다. 종로거리 연초 가게에서 짤막한 야사를 듣다가 영웅이 뜻을 이루지 못한 대목에 이르러 눈을 부릅뜨고 입에 거품을 물면서 풀 베던 낫을 들고 앞에 달려들어 책 읽는 사람을 쳐 그 자리에서 죽게 하였다고 한다. 이따금 이처럼 맹랑한 죽음도 있으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정조실록 (정조14년)

조선 후기 한글 소설이 빠르게 퍼져 나가면서 돈을 받고 책을 읽어주는 이야기꾼 전기수가 등장했다. 정조 때 전기수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종로의 담배 가게에서 전기수가 임경업전을 읽어주던 중이었다. 이야기를 듣던 한 사람이 임경업 장군이 억울하게 죽는 장면에서 “내가 우리 장군님의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라고 외치며 낫으로 전기수를 내리찍어 죽게 한 사건이다. 결국 형체없는 이야기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다. 아이와는 무슨 얘기를 해볼 수 있을까? 이야기를 나누며 말과 생각이 가진 힘을 잘못 사용하면 안된다는 교훈을 줄 수도 있겠다.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기념탑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탑. 일제강점기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희생하신 조선어학회 33인과 관련 위인들의 정신을 기리고 한글사랑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조성되었다. 옆에는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 투쟁기가 새겨져 있다. (세종로공원).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기념탑

한글이야기 마당을 지나 한글 숨바꼭질 ‘나무처럼 자라는 한글’을 찾으러 가본다. 그리고 건너편 로얄빌딩앞에 있는 ‘안녕하세요’를 지나 광화문역 승강기 맨 위에 있는 ‘글꽃이 피었습니다’를 찾고 나서 한글글자마당이 있는 세종로공원으로 걸어간다. 한글글자마당에는 손글씨 11,172자가 새겨져 있다.

19 (첫소리 글자)⨉21(가운뎃소리 글자)= 399(받침 없는 글자),

399⨉27(끝소리 글자)= 10,773자 (받침 있는 글자)

399+10,773=11,172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11,172자를 모두 쓰는 것은 아니고 실제로는 2,500여자를 사용하지만

<훈민정음해례본> 정인지 서문에서 '비록 바람 소리와 학의 울음소리와 닭의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라도 모두 적을 수 있다'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 의미를 알지 못했을 때는 그냥 앉아서 쉬는 돌의자 인줄 알았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어서 안쪽으로 조선어학회 한말글수호기념탑이 있다. 일제 강점기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희생하셨던 분들을 기리기위해 세워진 이 탑은 꼭 들러서 아이에게 생각을 질문해봐야 할 것 같다. 한글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쳐야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일제에 조선어 사전 원고를 빼앗겼으나 1945년 9월 8일서울역(경성역) 창고에서 발견하였고 1957년 10월 9일 ‘큰 사전’(6권)이 완성된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져서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다.

길지는 않지만 이야기가 있는 한글가온길을 걸어보았다. 이 길에서 우리는 말의 의미와 중요성, 말과 글의 관계, 우리 글이 필요한 이유, 한글의 역사, 한글을 지켜야 하는 이유 등을 생각해보았다. 이런 질문들에 하나의 정답이 있고 그 정답을 꼭 알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와 함께 길을 걸으며 아이가 다양한 생각들을 하게 되고, 거기에서 질문들이 생겨나면 된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생각이 자라고 자연스럽게 사고력이 키워질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분명하게 얻을 수 있는 한 가지는 아이가 엄마와 아빠랑 함께 한 시간일 것이다. 대화를 하며 걸었던 그 시간들이 차곡 차곡 쌓여 가면서 아이는 물론 부모들도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글 ㆍ김정희

교육컨설턴트, 문화평론가


*사진출처=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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