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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카메라를 바라보다 -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 세계
[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카메라를 바라보다 -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 세계
  • 정우성(영화평론가)
  • 승인 2022.02.14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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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 갈 수 없었기에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후 아피찻퐁)의 <메모리아>를 볼 수 없었다. <메모리아>가 개봉할 일은 없겠지만 다른 상영 방식으로 감상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아피찻퐁에 대해 짧게 써본다. 물론 아피찻퐁이라는 미스테리한 대상의 영화 세계 전체를 이 짧은 글에서 언급한다는 것은 무모한 선택임이 분명하기에 그의 영화에서 반복하여 등장하는 인물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장면 연출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이야기 해 보려 한다.

 

아피찻퐁의 영화를 알리게 된 <친애하는 당신>부터 <징후와 세기>까지 시기에 그의 영화 세계를 가장 함축적으로 요약하는 연출은 정글과 인간 육체의 관능성을 느린 리듬으로 담는 카메라도, 비인칭적 시선의 트레킹 쇼트도 아닌 단연 인물들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장면에 있다고 생각한다. 픽션의 인물과 현실의 관객이 카메라라는 경계를 통해 시선을 마주하며 영화와 현실의 관계에 대해 직관적으로 감각하게 하는 이 장면이야말로 삶과 죽음(엉클 분미), 타인과 나(열대병), 꿈과 현실(찬란함의 무덤)의 경계를 바라보는 아피찻퐁의 시선을 압축하고 있음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배우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면 안 된다’는 극영화의 오래된 규칙은 여전히 통용되고 있지만, 그 규칙을 어겨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았을 때 영화의 환영성을 방해하는 소격효과라는 특권적 의미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은 알고 있다. 이제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영화의 중요한 순간에 등장하는 강조점이거나 페이크 다큐나 시트콤과 같이 사실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 혹은 사실적인 스타일을 만들어 영화의 환영성을 더욱 그럴듯하고 공고하게 만드는 연출 방식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낡디 낡아 무감해진 이 장면 연출을 아피찻퐁은 기존의 영화들에서 약간 변주하거나 발상을 전환하여 다시 영화의 환영성을 뒤흔들며 스크린의 안과 밖에 대해 사유하게 하는 장치로 바꿔 놓는다. 이제 이 인장과 같은 장치를 중심으로 아피찻퐁의 미로와 같은 영화 세계를 탐험하고 방향을 잡아갈 수 있는 실타래를 풀어본다.

 

먼저 <친애하는 당신>과 <열대병>에서 카메라를 바라보는 인물들과 관객의 관계를 보자. <열대병>의 오프닝에서 누렇게 불타오르는 갈대가 인상적인 낮을 지나 조용한 시골 마을에 밤이 찾아오면 홀로 오두막에 앉아 있는 군인 켕(반롭 롬노이)의 모습이 보인다. 무언가 신경이 쓰이는 것이 있는 듯 손톱을 물어뜯는 켕은 명확히 보고 싶은 대상을 의도적으로 피하듯 허공 이곳저곳으로 고개를 돌리다 이미 의식하고 있던 카메라를 향해 천천히 시선을 옮긴다. 마치 어쩔 수 없는 매혹의 이끌림으로 바라보듯 약간의 미소를 띤 채로 말이다. 리버스 쇼트가 없는 이 장면에서 켕은 카메라-관객이 자신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시선을 의식하며 그 시선에 답하듯 카메라를 쳐다보다 수줍게 시선을 거두는 것을 반복한다. 단순히 영화의 환영성을 저해하는 소격 효과로 요약하기 힘든 이 장면은 그 앞뒤로 사랑의 시선을 비밀스럽게 주고받는 남녀의 모습이 담긴 씬을 배치하여 켕이 카메라를 바라보는 행위가 마치 카메라-관객과 나누는 유혹의 시선 교환처럼 느껴지게 만들고 있다.

이를 전작인 <친애하는 당신>의 오프닝 크레딧이 떠오르는 씬에서 룽(카녹폰 통가람)이 카메라-관객을 바라보는 장면과 나란히 놓는다면 유혹과 사랑의 시선교환이라는 가설은 좀 더 명확해진다. 영화 안에서 룽은 그녀가 사랑하는 민(민오)을 바라보고 있지만 민이 룽을 바라보는 리액션 쇼트는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녀의 시선은 카메라-관객을 향하게 된다. 이 시선 교환은, 허구의 인물이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영화란 환영에 불과하다’라고 알려주는 고압적 표정의 시선이거나 카메라를 향해 말을 걸며 유희적 태도로 일관하는 연출 스타일이 아니라 룽이 민을 바라보듯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이입의 시선이 된다. 이는 관객과 영화 속 인물 사이에 존재하는 시선의 권력에 의한 비대칭적 착취구조 없이, 영화에 눈을 떼지 않는 관객의 관음증적 시선을 피사체와 서로 마주 보는 유혹의 시선으로 전환시키며, 소격효과도 ‘그럴듯한 사실’로서 환영성을 강화는 장치도 아닌 영화라는 픽션과 관객이 속한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감각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징후와 세기>에서는 이러한 시선 교환이 스크린 안과 밖의 위계를 흐리는 것을 넘어 둘의 관계를 뒤집어 버리는 역(逆)의 순간으로 존재한다. 영화의 후반부 닥터 농(자루차이 이아마람)은 지하실 안에서 지인인 할머니와 앉아 방으로 들어오는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다. 어느 순간 카메라는 트랙-인하여 방 안의 인물 중 하나를 천천히 프레임 밖으로 배제 시킨다. 관객들은 카메라의 움직임을 따라 자연스럽게 프레임 가운데 놓인 환자를 치료하는 행위에 시선을 빼앗기고 그 몰입의 순간 카메라는 배제했던 인물 쪽으로 서서히 패닝을 한다. 그러면 프레임 바깥으로 밀려났던 인물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홀로 배제당한 것에 항의하듯 집요하게 노려보는 여성의 눈은 강렬하고 그녀의 시선에 압도당한 듯 카메라는 트랙-아웃하여 뒤로 물러선다. 이 순간만큼은 시선의 권력은 온전히 그 여성에게로 넘어가고 관객은 관음을 들킨 자가 된 것처럼 기이한 공포감에 휩싸인다.

이제 이 공포감은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최면적 공사 소리와 드론/앰비언트 음악과 함께 불이 꺼지는 건물과 스크린 안쪽으로 사라지거나 무기력하게 잠에 빠져드는 사람들을 비추며 영화의 전반부에 나타났던 일식과 대구를 이루는 검은 구멍을 향해가는 순간으로 전이된다. 스크린에 난 검은 심연, 일식이 은유하는 종말 혹은 죽음은, 스크린의 안과 밖이 뒤집힌 것과 같은 공포감, 비인칭적으로 느리게 움직이는 카메라의 기계적 움직임과 뒤섞이며 인간의 삶이라는 연약한 지반의 현실을 빨아들이고 거대하고 심원한 세계의 시간 속에 잠깐 나타났다 사라질 나-관객의 존재가 영화의 이미지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한다. <친애하는 당신>이 관객과 피사체가 시선을 나누며 사랑과 이입으로 서로에게 젖어든다면, <징후와 세기>는 스크린 안의 가상과 밖의 현실 사이의 권력 구조를 뒤집어 관객들이 딛고 있는 현실이라는 지면에 금을 내고 마침내 부서지게 하는 것이다.

 

결국, 아피찻퐁의 영화에서 픽션의 이미지와 현실의 관객이 시선을 마주한다는 것은 사랑과 공포처럼 나와 타자의 경계를 지우는 행위이다. 내가 타자에게 타자가 나에게 시선을 던지고 둘 간의 모호한 경계로 뒤섞이는 것이 사랑, 에로틱한 감각이라고 한다면 죽음, 잠, 꿈, 공포로 빠져드는 것은 나와 세계 사이의 경계로 향하는 것이다. 예컨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열대병>이야말로 그러한 사랑과 죽음이 지닌 경계의 감각을 전후반부로 나누어 정확히 반으로 포개는 영화이지 않은가.

그리고 이것은 카메라라는 경계의 매개체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당연히 카메라가 사랑이나 죽음의 감각을 실재적으로 전달할 수 없으므로 영화라는 이미지가 할 수 있는 것, 현실과 유사하지만, 현실이 아닌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한다.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현실에서 비현실로 향하며 관객들이 하나의 이야기, 이미지, 세계에 접속하여 사랑과 죽음처럼 내가 내가 아닌 경계의 체험을 가능케 하는 영화의 감각으로 말이다.

 

그러므로 사랑과 죽음, 잠, 꿈, 유령, 빙의와 같이 아피찻퐁 영화에서 대립하는 항들의 경계를 흐리는 주요 소재들은, 종교적 범신론으로 쉽게 접근 가능하기도 하지만, ‘영화’라는 매체와의 유사성을 중심으로 엮여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앞 서 언급했듯, 이것으로 아피찻퐁 영화 전체를 온전히 설명할 순 없다. 다만 그 미로와 같은 세계를 탐험하며 길을 잃지 않게 하는 하나의 실타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친애하는 당신>, <열대병>, <징후와 세기>가 두 개의 이야기로 나뉜 것은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향하는 영화 체험을 구조화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정오의 낯선 물체>의 우아한 시체(Cadavre exquis)를 변주한 이야기 만들기는 관객들이 영화에 접속하는 것을 거꾸로 뒤집은 것과도 같다. 또한 <엉클 분미>에서 분미가 죽음을 맞이하는 동굴은 과거, 현재, 미래가 겹쳐진 우주, 자궁과 같은 곳이기도 하지만 영화관 같은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찬란함의 무덤>의 하나의 꿈에 접속한 군인들의 모습이야말로 영화 보는 경험을 은유하고 있음을 쉽게 짐작 가능하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글·정우성
2021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현재 예술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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