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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미의 문화톡톡] 당신의 집은 누구의 것입니까?
[장윤미의 문화톡톡] 당신의 집은 누구의 것입니까?
  • 장윤미(문화평론가)
  • 승인 2022.02.14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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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설에 나타난 집과 가족의 의미②

1. 같은 집에 살지만, 가족은 아닙니다.

김하율의 소설 「어쩌다 가족」은 ‘신혼부부 공공주택 특별공급’ 자격을 얻기 받기 위해 위장 이혼을 한 부부가 겪는 해프닝을 담고 있다. 부동산 구매를 위해 위장 이혼을 했다는 기사는 이제는 식상할 만큼 흔한 일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어쩌다 가족」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비현실적 설정과 현실적 개연성 사이를 넘나들며 유쾌함을 만든다.

먼저 하나의 가족이 있다. 유정과 그녀의 남편 최성태다. 최성태는 뉴스에서 무주택자를 위한 특별공급 관련 소식을 듣게 되는데 무주택자가 집을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란 말에 귀가 솔깃해진다. 단,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 결혼한 지 7년 이내의 신혼부부여야 할 것, 부양가족이 있으면 가산점이 부여된다는 것.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유정과 남편은 결혼한 지 이제 막 7년하고 한 달이 막 지난 부부이고, 부양가족이라곤 유기견 ‘비싸’가 전부다. 고로 특별공급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하지만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나를 조건에 맞추면 된다. 다시 신혼부부가 되는 것, 부양가족을 만드는 것. 서로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 이유정과 남편은 집을 위해 ‘서류상’ 위장 이혼을 결심한다.

또 하나의 가족이 있다. 한국인에게 이민 사기를 당하고 불법 체류자가 된 우크라이나 출신 빅토르와 그의 가족이다. 졸지에 국제 난민이 된 그를 딱하게 여긴 ‘오지라퍼’ 지인이 빅토르에게 제안한다. 집을 가질 방법이 있다. 단, 조건이 있다. 자신의 아내와 이혼하고 한국 여자와 법적 부부가 될 것. 빅토르는 한국이란 나라는 이렇게까지 해야 겨우 집을 가질 수 있는 만만치 않은 나라였다는 걸 비로소 체감한다. 빅토르는 ‘오지라퍼’ 지인의 제안을 수락하고 이유정과 결혼을 결심한다. 그렇게 두 가족은 ‘주택 전쟁’ 시장에 ‘특공’(특별공급) 부대원으로 투입되어 공격적으로 덤벼들었고, 드디어 집을 쟁취한다.

 

김하율, [어쩌다 가족], 폴앤니나, 2021
김하율, [어쩌다 가족], 폴앤니나, 2021

두 가족이 이혼과 결혼을 반복한 이유는 단 하나다. 내 집을 갖기 위해서다. 전통적으로 집이란 ‘home sweet home’이 연상되지만, 지금의 집은 가족의 재산 증식을 위한 가장 강력한 레버리지 중 하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핵심은 질 좋은 재산을 소유하는 것이다. 집을 가질 수 있다면 부양하지 않는 사람도 기꺼이 동거인으로 만들 수 있고, 사랑하는 배우자와도 잠시 별거할 수 있다. 반대로 아파트청약 1순위 자격을 얻기 위해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을 동원해서라도 서류상 더부살이를 부탁하거나, 더 위험하게는 남의 이름을 빌려 집을 사는 것도 고랴한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본이 없는 보통의 사람은 특공과 같은 극적인 기회 말고는 집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만 있다면 가족은 언제든지 ‘해쳐모여’가 가능하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집이지 가족이 아니다. 집이 있어야 가족이 있는 것이므로.

가족이 해체되는 가장 분명하고 흔한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다. 서울만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가족과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도시 빈민으로 몰락했던 1970년대 무렵이 그랬고, IMF 사태가 터지고 경제적 부담을 나누기 위해 가족이 흩어져야 했던 1997년대 무렵이 그랬다. 그러나 이때 해체의 명분과 목적은 ‘성공적인 가족 재건’이었다. ‘돈 많이 벌어서 다시 만나자’라는 메시지도 분명했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 다른 점이 있다면 가족 해체의 궁극적 목적이 더이상 가족의 재건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자본 획득, 재산 증식이 먼저고, 이것을 충족했을 때 (필요하다면) 가족은 재구성 또는 재구성할 수 있다.

서로가 바라던 집을 얻고,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건 어렵지 않겠다고 생각한 소설 속 인물들에게 변수가 생긴다. 바로 유정이 임신을 하게 된 것이다. 유정의 아이는 남편 최성태의 아이지만 서류상으로는 빅토르의 아이다. 문제는 국가라는 공적 공동체는 오로지 공식 서류만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아이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최성태라는 걸 밝히게 되면 이 집은 불법으로 취득했다고 실토하는 꼴이고, 그렇다고 공식 문서에 아이 아버지 이름을 쓰는 란에 빅토르의 이름을 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족은 어디까지나 필요로 만들어진 이해 공동체라면 이제 유정의 가족에게 남은 건 해체다.

아이가 생기고 더이상 기형적인 가족 형태를 유지할 필요가 없게 된 유정과 남편은 하루라도 빨리 서류를 정리하고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으려 한다. 하지만 이번엔 빅토르가 거부한다. 집에 대한 권리는 자신에게도 반이 있으므로 그에 해당하는 만큼 보상을 하든지 아니면 영주권이 나올 때까지 절대 이혼할 수 없다는 이유다. 하지만 빅토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는 가족 공동체를 유지해야만 한다. 빅토르에게도 이 가족 역시 이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공동체일 뿐이다.

아이를 위해 더는 이혼을 미룰 수 없다는 남편과 집 문제를 해결해 줄 때까지 이혼할 수 없다는 빅토르의 주장은 결국은 같은 결을 하고 있다. 이들에게 집은 가족이 함께 머무를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의 의미 그 이상이다. 집을 위해서라면 가족의 해체도 가능하다고 생각한 유정과 남편의 논리도, 반대로 집을 위해서라면 비정상적인 형태의 가족 형태를 유지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빅토르의 논리도 충분히 타당하다.

이들의 혼란과 갈등은 부동산 감독원 조사관의 불시 방문으로 극에 달한다. 유정과 성태는 물론 빅토르와 아내는 진짜와 가짜 배우자를 혼동하며 우왕좌왕하고, 빅토르의 아이들과 애완견 비싸는 뒤엉켜 통제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다. 이 장면은 마치 영화의 슬로우모션처럼 묘사되는데 잘못하다가는 불법으로 집을 매매한 사실이 들통날 수 있다는 최대의 위기는 통제할 수 없는 엉망인 상황과 교차하면서 유머와 냉소를 동시에 유발한다. 여기에 조사관이 들고 온 도넛 냄새를 참지 못하고 유정이 그만 조사관의 옷에 토하는 장면은 마치 카니발의 정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토사물로 인해 바지가 엉망이 된 조사관은 유정을 향해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라고 반문한다. 조사관의 질문은 자신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는 걸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나에 대한 원망을 담은 질문이지만, 이유정에게는 이렇게까지 해서 집을 지켜야 하는 이유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당연히 집일 테다.

이유정과 최성태가 이혼을 결심할 수 있었던 건 집만 갖게 되면 얼마든지 이혼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일 테다. 원하는 집을 가지게 되면 가족은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현실은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빅토르 가족 역시 같은 오류를 범한다. 하지만 이들의 실패한 욕망을 두고 욕심, 허영, 또는 올바르지 못한 선택에서 오는 결과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인간의 욕망은 어디까지나 사회 구조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집을 향한 이들의 욕망과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하는 선택과 행위들이 비현실적이면서도 감정적 동의를 얻는 이유는 당연히 실패할 것이 뻔함에도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현실에서 오는 짙은 패배감 때문일 것이다.

생계를 위해, 윤택한 삶을 위해, 더 본질에서는 자본 축적을 위해 가족이 해체될 수 있다는 생각은 현재 우리 사회에만 적용되는 특수한 논리는 물론 아니다.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의 가족 해체는 최후나 최악의 선택이 아니라 여러 선택지 중 하나라는 점, 그리고 자본 축적이라는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하더라도 가족 재건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점은 앞으로 가족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데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어쩌다 가족」의 결말 역시 사건은 해결되지 않을 채로 끝내고 있는데 이는 가족에 대한 가치관이나 이념에 대한 열린 해석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2. 필요하다면 가족도 선택할 수 있다

소설 「타인의 집」이나 「어쩌다 가족」이 취하고 있는 서사는 집에 대한 고민을 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이다. 각 소설의 인물들이 가족 행세를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내 집을 가지려고, 그리고 지키려고. 집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원수도 가족으로 묶일 수 있고, 법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서류를 조작하는 것도 가능하다.

홈 스위트 홈으로서의 집의 기능은 이전과 비교하면 확실히 축소되었다. 그것을 뛰어넘는 기능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자본 축적과 재산 증식의 기능이다. 필요하다면 집을 위해서 가족은 해체될 수도, 재구성될 수도 있다. 이건 불법이 아니라 편법이고, 미래를 위한 투자다. 물론 서류상 해체가 아니라 영원히 가족이 해체될 수도 있는 ‘하이 리스크’가 따르는 투자지만 말이다. 그러나 ‘하이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고 ‘하이 리턴’을 바라는 건 투자를 모르는 하수들이나 하는 행동이다. 「어쩌다 가족」에서 조사관이 유정에게 질문한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에 대한 답은 「타인의 집」에서 쾌조가 말한 “아시죠, 자본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자본을 가지지 못하고 평생 남의 인생에 편입되어 적응하다가 결국 순응하며 살아야 할지 모른다는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이것보다 큰 불안과 두려움이 또 있을까. 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근본적인 방법은 자본을 획득하는 것 말고는 없다.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모험이 없는 곳에는 이익도 없는 법이다. 필요하다면 가족도 선택할 수 있다. 물론 해체도 마찬가지다.

 

 

글ㆍ장윤미(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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