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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숭범의 문화톡톡] 폭력이 스스로 살아가는 풍경- <D.P.>론
[안숭범의 문화톡톡] 폭력이 스스로 살아가는 풍경- <D.P.>론
  • 안숭범(문화평론가)
  • 승인 2022.02.21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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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 다둔(Roger Dadoun)에 따르면 폭력은 인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호모 비오랑스(Homo Violence), 곧 폭력적 존재다. 성경 <창세기>도 신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의 역사가 폭력에서 폭력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폭력은 인간의 뇌 깊숙한 곳에 본성의 하나로 프로그래밍 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안다. ‘나’와 ‘너’를 가르고,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본능으로부터 혐오의 명분이 쉬이 발명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의 정체성을 연장·공유하는 ‘우리’는 ‘그들’에 대한 경계심의 강도만큼 비약적으로 결속한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 내에 폭력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 만약 누군가에게 폭력이 행사되었다면, 그와 연관된 악과 죄, 분노와 증오, 부조리와 광기가 증식하는 과정을 제어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팬데믹 이후,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아시아인 혐오 범죄는 이를 방증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역, 민족, 종교 등이 얽혀 벌어진 내전 때문에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고 있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테러 사건도 끊이지 않고 있다. 상식을 벗어난 아동 폭력이나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조직폭력배 간의 충돌도 특정 국가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니다.

이제 <D.P.>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D.P.>는 <오징어 게임>만큼 메가 히트작이 아니다. <마이 네임>처럼 장르적 쾌감이 확실했던 작품도 아니다. <지옥>만큼 참신한 상상력을 펼쳐 낸 작품도 아닐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D.P.>에 대한 평단의 평가는 매우 좋은 편이었다. 한국에선 낯선 밀리터리 드라마였지만, 대중의 호응도 상당했다. 특히 한국 남성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군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라는 질문을 놓고, 각자의 군대 시절을 비교하는 공론장이 펼쳐졌다.

더욱 이채로운 것은, <D.P.>가 해외에서도 오랜 시간 주목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해외 시청자들 중 상당수는 엄격한 징병제 국가인 한국의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인 절대다수가 군에서 의무복무를 한 사람을 가족 구성원으로 둔 걸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한국은 매우 예외적이고 특수한 안보상황에 놓여 있는 국가다. 해외 시청자들 중 상당수는 이미 20세기 말에 냉전체제가 종식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한국전쟁’ 중에 시작된 군대 의무복무의 역사가 벌써 7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병역 기간이 줄어서(꽤 긴 시간 의무복무 기간이 36개월이었고 이후 점진적으로 단축되었다) 지금은 육군 기준 18개월만 복무하면 되지만, 한국의 20대 남성은 국가에 헌신하는 시간을 당연스레 각오해야 한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하면, 오늘날 한국인이 전쟁 발발의 위험을 견디며 살고 있진 않다. 그럼에도 한국이 외관상 ‘휴전’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한국 군대는 가장 높은 수준의 규율과 질서가 강요된다. 정색하고 보면, 군대란 잘 조직화된 전쟁 수행 능력으로 평가받는 집단이다. 거기에서는 계급과 명령에 의한 타율적 관계망이 개인의 자율성을 제약한다.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에 대한 과도한 공감과 자긍심이 적극적으로 장려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게 ‘우리’는 위협이 되는 ‘그들’을 향해 일사불란한 폭력을 준비한다. 어느 나라 군대이건 마찬가지다. 예하부대는 국가가 허락한 폭력을 자동반사적으로 해낼 수 있을 때까지 훈련한다. 적에 대한 경계심은 순수한 애국심과 구별되지 않으며, 적으로부터 나를 지키려는 목적 아래에서 ‘우리’는 서로 상호의존적이 된다.

 

<D.P.>는 한국의 병영문화, 특히 헌병대의 특수임무 수행 과정을 세밀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런데 인간의 폭력성이 특수 환경에서 발현되는 양상을 구체화한 작품이기도 하다. 여기서 ‘밀그램 실험’에 대해 소개해보고자 한다. 이 실험은 평범한 인간이 권위에 복종하는 중에 얼마나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 결과, 권위를 가진 이가 공격적인 명령을 내리자 사람들은 의문을 품지 않고 피해자를 괴롭혔다. 추측할 수 있듯이,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사회 공동체 중에서 군대는, 계급에 따른 권위가 가장 강조되는 곳이다. 우리가 떠올려야 하는 것은, 반드시 군대가 아니더라도 권위에 의한 통제 문화 속에서 권력중독이 발생하기 쉽다는 사실이다. 권력중독은 약자에 대한 공격과 그로부터 주어지는 쾌감에 붙들릴 때 위험해진다. 그리고 그 메커니즘이 반복을 통해 구조화되면, 폭력도 전통과 인습으로 변질될 수 있다.

<D.P.>는 한국 시청자들을 유인하는 영리한 전략을 쓴다. 메시지를 강화하기 위해 군대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는 쇼트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예컨대, 습도를 유지하기 위해 내무반 바닥에 물을 뿌리는 모습, 휴가를 앞둔 후임병의 군화에 불을 붙여 선임병이 ‘불광’을 내는 장면, 취침 전 말년 병장의 전역일까지 남은 시간을 큰 소리로 알려 주는 후임병의 자세, 군대에서만 유통되는 음료수 맛스타와 봉지라면(뽀글이)이 등장하는 순간 등은 한국 시청자들을 군대 울타리 안으로 다시 데려다 놓는다. 이들 장면이 중핵 사건과 관련된다거나 플롯의 진행에 뼈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미 이때부터 한국의 시청자들은 <D.P.>에서 벌어지는 비극에 더 긴밀하게 연루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조성된 리얼한 서사무대는 폭력에 관한 트라우마의 파괴력을 실험하는 장이 된다. 주인공 안준호는 103사단 헌병대 탈영병 체포조에 투입된 첫날, 커다란 트라우마를 안게 된다. 선임병의 회유로 유흥을 즐기다가 술에 취해버린 그는 눈앞에서 탈영병을 놓친다. 탈영병은 그날 밤 자살한다. 이후 그는 탈영병의 목숨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선임병을 눕힌 후 주먹을 휘두른다. 그때 선임병의 얼굴이 자신의 얼굴로 바뀐다. 선임병을 향한 분노엔 탈영병을 놓친 자책 말고도 어린 시절의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가 얹혀 있다. 그는 폭력적인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트라우마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한때 복싱을 했던 안준호는 이런 고백을 하기도 한다. “아빠한테 안 맞으려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아빠 죽으면 진짜 크게 웃을 거예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폭력에 시달린 이의 내면에 잠재된 역방향의 폭력성, 곧 대물림되기 쉬운 폭력 바이러스의 일면이 그 말에서 확인된다. 탈영병 애인으로부터 가스라이팅을 당해온 문영옥을 지켜주기 위해 안준호가 복싱 실력을 발휘할 때, 우린 그 폭력성의 발현을 보게 된다. 이처럼 그는 폭력에 대한 혐오가 다시 폭력의 재생산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전시한다. 불침번을 서던 그에게 죽은 탈영병이 나타나 말을 건네는 장면이 있다. “할 만 해요? 사람 죽이고 사는 거 할 만 하냐구요?” 안준호의 내면이 불러낸 이 환영은 죄책감의 깊이, 트라우마의 무게를 증언한다. 그때 우린 알게 된다. 그는 폭력이 낳은 피해와 가해 사이의 굴레에서 결국 헤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그리고 최준목과 조석봉의 탈영에 대해 더 언급해야 한다. 24시간 함께 생활해야 하는 부대원들 사이에서 한번 ‘왕따’가 되면, 비극의 출구를 찾기 어렵게 된다. 최준목은 잠을 잘 때 코를 곤다는 이유로 집단적인 폭력에 둘러싸인다. 결국 탈영한 그의 흔적은, 지하철 운행이 끊기는 시간 종점에서 발견된다. DP조가 그를 찾아왔을 때, 지하철 막차에서 잠이 깬 그는 이런 질문을 한다. “여기 어디예요?”. 그는 소속감을 갖고 생활할 수 있는 삶의 정처를 잃은 지 오래다. “종점이요”라는 대답이 돌아오자 그는 “더 갈 데가 없네요”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종점’, ‘막차’의 이미지는 중요하다. 거기엔 폭력없이 폭력을 피하는 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들어 있다.

조석봉의 별명은 ‘봉디(조석봉=간디)’다. 누군가에게 해를 입힐 것같지 않은 착한 캐릭터다. 그런데 세상은 만화 캐릭터를 그리면서 오타쿠로 살아온 그를 비폭력 평화주의자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가 감당한 고통은 ‘아직도 군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라는 질문을 직접적으로 촉발시킨다. 소위 ‘내림구타’, ‘내리갈굼’이 오늘날 한국 군대 내에서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한국의 병영문화는 구성원이 짊어진 긴장의 강도에 비해 건실한 편이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타율적으로 엮인 계급 공동체는 ‘내가 당한 만큼 너도 당해야 한다’는 부정적인 보상심리가 언제든지 분출될 수 있다. 그런 비이성적 실천은, 호모 비오랑스의 본성을 자극하는 어떤 공동체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조석봉은 자기를 괴롭힌 선임병 황장수가 전역할 때 ‘좋은 추억’을 운운하는 장면에서 폭발한다. “좋은 추억이 뭐가 있습니까? 미안하다고 말하십시오.” 반항 한 번 못하고 폭력을 감내하던 그에게서 터져 나온 그 말은 전역 후 평범한 삶으로 돌아간 황장수를 다시 의미심장한 장소로 데려다 놓는다. 그곳은 103사단 이 관리하는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방공호를 갖춘 군사작전 터널이다. ‘멸공’이라는 글씨가 박힌 이 터널 은 남침을 위해 북한이 판 땅굴을 감추고 있다. 폭력의 계획을 더 강력한 폭력으로 갚아주려는 의지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을 품고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조석봉은 황장수를 비롯한 여러 선임병에게 갈굼을 당했다. 그 고통의 시간에 대다수의 전우들은 방관자에 머물렀다.

그 터널 앞에서 조석봉은 황장수를 죽이는 대신, 총구를 자기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긴다. 이 비극 속에서 끊을 수 없는 트라우마의 존재와 폭력에 의해 고조된 공동체의 위기를 보게 된다. 그는 자살했지만, 이때의 자살은 황장수와 수많은 방관자들에 의한 집단 살인에 가깝다. 이로써 조석봉이 감당했던 폭력은 해당 부대 내에서 당분간 잠잠해질지 모른다. 그러나 사족처럼 붙은 <D.P.>의 엔딩신은 오프닝신보다 우울하다. 치열한 반성을 모르는 호모 비오랑스 공동체에서 폭력은 잠시 숨을 고를 뿐, 다시 자기 삶을 살아갈 것이다. 로제 다둔의 말을 상기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권력과 폭력이 맺는 놀라운 친화력과 공조 관계”를 함께 응시할 수 있을 때, 폭력은 우리 앞에서 숨을 죽일 것이다.

 

 

 
글ㆍ안숭범(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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