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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방에서 만난 투명인간 어른들
만화방에서 만난 투명인간 어른들
  • 이상욱
  • 승인 2011.11.11 18: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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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한국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은 괄목한 만한 성과를 낳았다. 6편의 작품이 개봉하고, 1편이 개봉 대기 중이다. 그중 <마당을 나온 암탉>은 210만 관객을 동원했다. <소중한 날의 꿈>과 11월 3일 개봉한 <돼지의 왕>은 흥행과 별개로 ‘소장할 만한’, ‘2011년 최고의 영화’라는 찬사를 받으며 비평적 성과를 얻었다.

옛 만화방 모습. 출처 : 정상혁 블로그(정상혁 http://blog.naver.com/crazyemp)

한국 애니메이션은 왜 이제야 성공했나?

그러나 한국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을 평가하려면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1990년대 이후 애니메이션은 고부가가치를 낳은 산업이라는 기대 속에 막대한 국가적·사회적 자원이 투자됐다. 유사한 시기를 거치며 영화와 방송, 게임과 가요는 산업적 틀을 구축하며 한류의 대표 상품이 되었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은 그렇지 못했다. <뽀롱뽀롱 뽀로로>라는 걸출한 사례가 탄생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TV 애니메이션이며, 독보적인 만큼 예외적이다.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극장에서는 사실상 20년 만에야 성과를 보인 셈이다.

2011년 가시적 성과를 낳은 세 작품은 한국 애니메이션계가 수립한 공식에서 벗어나 있다. 유니버설한 스토리와 문법, 스타일. 정확히 할리우드 스타일이다. 아동 혹은 가족 타깃, ‘글로벌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국제 합작을 필수로 할 것. 그러나 <소중한 날의 꿈>과 <돼지의 왕>은 아동용으로도, 가족용으로도 적당치 않다. 가족 관객을 불러들인 <마당을 나온 암탉>은 각색과 연출을 통해 상당 부분 털어냈음에도 원작의 어둠이 여전히 짙다. 할리우드 스타일과도 거리가 있고, 국제 공용의 스토리라 하기엔 머뭇거려진다. 게다가 세 작품 모두 국내 자본과 제작진에 의해 만들어졌다. 애니메이션은, 적어도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은 왜 이제야, 이런 방식으로 성공한 것일까?

1980년대까지 영화와 애니메이션, 만화, 가요와 방송 드라마는 ‘쟁이와 딴따라’들이 만들고 우매한 대중이 ‘흥미와 오락을 위해 즐기는 여흥거리’였다. 창작자와 적극적인 수용자가 ‘대중문화·예술’로서의 가치를 인식했을지라도 사회적 인식은 그랬다. 문화적 자주성은 예외적 언급이었고, 외화벌이가 방어막이었다. 문학도 순수문학과 구분되는 대중문학은 미약하기도 했거니와 사회적 평가에서는 언제나 옹색했다. 이런 상황은 1980년대를 거쳐, 결정적으로 1990년대 들어 국가적으로 변화한다.

1990년대 한국 대중문화는 ‘재발견’됐다. 먼저 영화와 애니메이션, 만화 모두 오락 혹은 예술과는 구분되는 산업으로 재인식된다. 시장이 개방되고, 정부는 사회적 자원을 동원해 진흥을 시작한다. 자본 역시 수익 달성을 목표로 투자를 시작한다. 대중문화는 이제 세계(화) 속에 자리잡고, 국가 간 경쟁 속의 산업으로 인식된다. 동시에 대중문화는 세계 속에서 우리를 구분짓는 ‘문화’이자 ‘예술’로서 ‘상징 가치’까지 획득한다. 이제 사람들은 개별 문화 상품의 성패를 물질적 부와 상징 자원의 차원에서 국가적 성과로 인식한다. 한류를 자축하고, 영화제에서의 수상에 뿌듯해하고, 기록적인 흥행을 위해 스스로를 동원한다. 그렇게 대중문화는 ‘딴따라와 쟁이’들이 만든 ‘오락거리’에서 산업이자 문화이며 예술로서 재발견된 것이다.

그 결과 영화와 방송, 가요 그리고 게임은 국제적 경쟁력을 갖춘 산업이 되었다. 상업적 가치에 국한되지 않는 상징적 가치는 ‘콘텐츠’라는 가치중립적으로 보이는 단어를 통해 포괄됐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은 이 대열에서 탈락했다.

애니메이션도 한때 상업적으로 성공한 적이 있었다. 1960년대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이 있었고, 1970년대 후반 공상과학(SF) 애니메이션 붐을 일으킨 <로보트 태권V>가 있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한국 애니메이션은 적어도 장편 애니메이션에 관한 한 예외적인 몇 편의 작품이 전부다. 이는 ‘산업’으로서 실패만이 아니라, 다른 문화 영역이 19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며 획득한 ‘문화’와 ‘예술’이라는 상징 가치 역시 획득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별나라 삼총사>(1979) 포스터.

대중문화는 어떻게 재발견됐나?

이런 문제에 대해 일반적인 답변은 ‘하청 기지’라는 토대와 스토리 및 기획력의 부족을 언급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애니메이션을 보려 하지 않고 구매하지 않는 관객과 시청자, 소비자, 그리고 애니메이션은 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사회적 통념을 언급한다. 이런 상황은 다시 산업‘화’의 실패 탓으로 귀결돼 해석은 순환 구조를 이룩한다. 그러나 산업과 문화, 예술로서 정립하는 데 성공한 다른 문화 영역들과 비교할 때 애니메이션은 차이가 있다. 그것은 그냥 저급한 것만이 아니라 ‘아이들 것’이다. 다른 문화 영역들이 질 낮은 오락거리로 불릴 때도 비록 소수의견일망정 그것을 당당한 문화로, 예술로 봐야 한다는 인식이 존재했고, 우리는 아닐지라도 서구에서는 각 문화 영역이 문화요 예술이요 산업이었으며, 내국인들 가운데 적어도 지식인·엘리트 집단은 그 점을 알고 있었다.  오늘에 이르러 우리는 고급문화가 대중문화보다 우월하다고 쉽사리 말하지 못한다. 나아가 각각의 문화 영역과 장르에 대한 가치 평가가 내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적·경제적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 역시 이해한다. 사회계급과 계층은 각각의 문화 영역과 장르에 대한 취향을 통해 정체성을 구성하고, 타 집단과 구별지으며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재생산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구별짓기>·피에르 부르디외·2003). 따라서 애니메이션이 왜 대중문화 내부에서도 차별적 영역이었는지 이해하려면 내재적 속성 이외의 것도 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 1990년대 이전으로 가보자. 그리고 애니메이션의 출발에서부터 규정돼온 ‘아이들이 보는 것’이라는 인식을 살펴보자.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조금 다른 곳을 검토할 생각이다.
 
만화방에는 정말 아이들만 찾아왔을까?

‘만화’ 하면 떠오르는 만화방은 1950년 중·후반부터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1957년 서울 지역에 200개 정도 있던 만화방은 196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늘어나 1978년에는 전국 2만 곳에 달했다(<동아일보> 1978년 5월 28일치). 그러나 만화방은 탄생 초기부터 비난의 표적이었다. “불량한 만화가 (1962년 현재 서울) 시내 700여 개 만화가게에 번져 있고, 사실상 모든 어린이들이 이 거리의 도서실에 매일같이 드나들고 있다”며 당국의 단속과 검열을 촉구한다(<동아일보> 1962년 10월 8일치). 공권력에 만화방은 “소년범죄의 온상이 되는” 곳으로, 단속 대상이었다(<동아일보> 1969년 1월 28일치) .

그러나 어린이들이 드나들고 불량만화를 통해 소념범죄에 빠져드는 만화방을 아이들만 찾은 건 아니었다. 만화방에는 소설도 있었고, 그중 90%는 무협지와 애정소설이었으며 성인만화까지 비치돼 있었다(<경향신문> 1976년 4월 30일치). 한 언론인은 “(1960년대 후반) 어른들이 들어와서 담배를 피우며 책을 읽는다. 어린이들이 성인만화를 안 읽는다고 누가 장담할 것”이냐고 질타한다(1976년 시사잡지 <세대>). 게다가 만화방에는 읽을거리만 있던 게 아니다. 당국의 단속 대상에는 TV도 있었다. 만화방에서 사람들은 유료로 TV를 관람했고, <여로> 같은 인기 드라마라도 나오는 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돼지의 왕>(2011) 스틸컷.

그러니까 1970년대 전후 만화방은 아동과 청소년만이 아니라 성인만화와 무협소설, 월간 대중 잡지를 보기 위해 성인도 찾아오는 공간이었고, 때로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드는 서민들의 ‘문화 사랑방’이었던 것이다(<한국만화통사 2>·손상익·1998). 그런데 만화방은 왜 아이들의 공간으로 인식됐을까? 당대 언론들은 왜 애써 만화방을 아이들의 공간으로 인식하며, 성인이 드나든 흔적을 오직 ‘아이들이 읽으면 안 되는 책’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언급하는 것일까?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공간이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아이들의 공간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점이다.

1890년대 초 잡지와 신문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만화는 본격적으로 언론이 출현한 1920년대에 이르러 기틀을 다진다. 초기 만화는 언론의 일부로 시사만평과 일종의 4컷 만화로 자리잡아 이후 잡지와 단행본으로 확대된다. 초기 만화는 당연히 성인을 대상으로 했다. 하다못해 <멍텅구리>와 <허풍선이> 같은 당대의 인기 코믹 만화들도 어른을 대상으로 했다. 그런데 1930년대부터 어린이 만화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특히 해방 직후와 한국전쟁을 전후해 어린이 만화는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만화는 이때부터 비판의 표적이 된다.

1926년 <개벽> 2월호는 당대 인기 만화인 <멍텅구리>를 “민중에게 하등의 유익을 주지는 못한다”고 비판한다(<한국만화통사 1>·손상익·1996). 이는 <조선일보>의 상업주의적 편집 방향 전반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으나, 당대 만화 전반에 대한 인식이기도 했다.

1940년대 들어 만화는 이제 어린이 문제로 결부되기 시작한다. 1948년 7월 5일 잡지 <백민>에서 양미림은 “만화를 문제시할 때 거기에는 ‘어린이’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며 “허무맹랑한 것과 미신적 내지 비과학적인 내용”과 “졸렬한 그림과 색채”, “제멋대로의 사투리와 한글 철자법 사용”을 들어 청소년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고 비판한다(<한국만화통사 2>·손상익·1998). 이후 논쟁이 벌어지고 유명 문인들이 합류하면서 문학인들, 나아가 지식인 전반이 만화를 비판하는 형국에 이른다.

여기서 더 중요한 점은 저 비판이 “만화는 어린이들이 보는 것”이고 “교육과 (순화된) 정서 함양을 위해 기능”해야 한다는, 현재도 존재하는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인식은 1961년 쿠데타에 성공한 뒤 도박·폭력과 더불어 만화를 ‘사회 6대 악’으로 선정하고 만화를 검열·통제했던 군사정부와 거리에서 ‘만화 화형식’이라는 기상천외한 행사를 했던 관변단체들과 ‘에듀테인먼트’, 즉 공부에 도움이 되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자는 현재의 산업논리와도 공유된다.

그들은 왜 만화를 비판했을까?

그런데 문인과 지식인들은 왜 이토록 만화를 비판한 것일까? 당시 만화 비판의 선두에 섰던 사람들이 문인 중에서도 아동문학가였고, 만화가 갑작스럽게 폭발적으로 성장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견제일 수도 있다. 실제로 1970년대 원로 만화가 박기준은 색동회 회장 김수남씨로부터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라며 아동문학가와 만화가가 글과 그림을 나눠서 작업하자는 제안을 받았다고 증언했다(<한국만화야사>·박기준·디지털만화규장각). 이런 현상은 만화와 문학만이 아니라 방송 드라마와 영화 사이에서도 흔하게 벌어졌다. 한발 더 나아가 활자언어로 무장한 지식인 집단이 이미지와 상상력의 매체인 만화에 대해 갖는 차이와 배제의 논리로 이해할 수도 있다(<1980년대 한국 대중만화의 상상력>·김종현·2010). 그러나 만화 통제와 비판이 그토록 강력한 정당성을 갖고, 지식인과 군사정권에 공유될 수 있었던 것에는 좀더 주요한 측면이 있다.

근대 이후 어린이는 국민 형성의 핵심 자원으로, 보호와 교육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언론은 보호 범주를 ‘(소년)범죄’라는 이미지로 집약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범죄만이 아니라 어떤 가치·심성·지식·윤리관 일체로부터의 보호를 뜻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폭력의 경험과 사례가 강력하다. 그런데도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삼국지>조차 한동안 그리지 못했던 것은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는 과정과 관련된 문제일 수 있다.
 
이덕무는 왜 언문소설을 비판했을까?

훈육과 교육은 당대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근대적 인간형을 기준한 것일 테다. 따라서 허구와 실재, 윤리와 비윤리를 가르는 것은 민족과 국가, 국민으로 규정되는 가치에 준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어린이들의 ‘공부’는 근대국가에서 국민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경로일 뿐 아니라 ‘서구’와 ‘근대’, ‘발전’을 욕망하고 동원하던 사회에서 중요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재미의 명목으로 상상하고, 근대적 규율로부터 일탈을 암시할 뿐 아니라 ‘놀게 만드는’ 만화란 모두에게 지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는 비단 만화만이 아니라 방송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같은 대중적 오락 전반에도 적용됐다.

18세기 조선시대부터 ‘세책’, 즉 책을 빌려주는 일이 성행했다. 당대의 지식인들은 이런 현실을 개탄한다. 18세기 학자 이덕무는 “언문으로 쓰인 괴기한 이야기들을 (중략) 부녀자들이 (중략) 돈을 주고 책을 빌려보는” 것을 비판하고, 19세기의 이능화는 이런 “패설류의 책” 목록에 <심청전> <구운몽> <홍길동전> <흥부전> <삼국지> 등을 올려놓는다. 이는 근대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1910년대 지식인들은 기존 신소설과 대체할 근대적 대중소설에 대한 배제 논리 속에 순수문학을 구성할 뿐 아니라, 민중에게 근대적 소양을 ‘계몽’한다는 관점에서 대중소설을 집필한다. 이런 현상은 한국만의 일이 아니며 근대소설, 그리고 대중소설이 형성되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 여기서 논점은 근대 지식인들이 대중소설에 대한 비판과 부정, 배제의 논리를 통해 순수문학, 즉 문단을 구축했고 대중문학을 계몽 관점에서 평가했다는 점이다(<1910~20년대 대중문학론의 전개와 대중소설의 형성>·이주라·2010).

만화는 상대적으로 대중문화로서의 논리가 강력하고도 노골적으로 작동하던 영역이었다. 만화는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었고, 어린이라는 새로운 독자의 편입을 통해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그런데 어린이는 계몽돼야 할 국민 중 하나일 뿐 아니라 최후의 희망이기도 했다. 시사만화와 만평은 그 내부에서 차별적 위계에 놓여 비판의 화살을 벗어날 수 있었으나 아동을 대상으로 한 만화는 그럴 수 없었다. 이런 논리는 지식집단 외부에서도 받아들여져 한국전쟁 당시 유명 문인들이 전선을 방문해 귀빈으로 대접받을 때 만화가들은 그 대중성을 인정한 남과 북의 군대에 의해 선전물과 책자를 만들어내는 일에 투입되고도 결코 문인과 같은 지위를 누릴 수는 없었다(손상익 앞의 책).

만화는 여타 문화 영역에 비해 그 토대와 지위가 취약했다. 문단이라는 지식인·엘리트에 수렴되는 주체들에 의해 유지된 문학과 달리 만화는 지식인·엘리트 집단으로부터도, (순수·고급) 예술로부터도 배제됐다. 이런 상황에서 만화가 여타 문화 영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은 대량·대중 문화로서의 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화는 대중문화의 근간을 형성할 산업적 토대가 취약했다. 신문과 잡지의 연재만화는 대중적 파급력에도 불구하고 주류 언론과 지식의 영역에 의해 수렴됐고, 1950년대 말 이후 만화방을 중심으로 형성된 단행본 시장은 대중의 수용과 소비에도 불구하고 산업적 시스템을 갖추는 데 실패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왜 화가 났을까?

1961년 군사 쿠데타 뒤 만화출판이 사실상 중지된 상태에서 당시 만화가단체 간부인 이재화씨는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찾아간다. “백 과장은 수북이 쌓인 만화책 가운데 한 권을 집어던지며 ‘보라’고 외쳤다. 만화 제목은 <지옥과 천당>이었고, 내용은 우주전쟁에 관한 것으로,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타고 스탈린의 부하가 되어 활약한다는 것이었다.”(손상익 앞의 책) 이후 만화가단체는 해체되고, 만화는 사전심의 제도를 통한 강력한 검열과 통제의 대상이 된다. 사회 6대 악의 하나가 된 만화는 공식적으로 대중문화 안에서도 가장 낮은 지위에 고정된다. 이제 만화는 허용된 좁은 틈에서만 대중을 만날 수 있게 된다.

또 한 가지 언급할 것은 ‘합동’에 의한 독점체제다. 1967년 출현한 제작·유통·판매 기업인 ‘합동’은 강력한 독점체제를 형성한다. 작품 내용만이 아니라 작가들의 작품 편수와 고료까지 일방적으로 결정한 ‘합동’은 창작을 통제하고, 강제 판매 시스템을 도입해 만화의 독자인 ‘대중’까지 배제한다. 이런 독점체제는 군사정부에 의해 묵인됐고, ‘합동’에 저항하는 군소 출판사들은 세무조사와 각종 탄압에 시달리고 ‘합동’의 공세에 번번이 무너졌다. 1971년 <한국일보>가 만화출판 시장에 뛰어들며 독점체제가 무너졌으나, 결국 자본 간의 타협으로 독과점 체제는 더욱 공고화된다.

국가와 자본 양쪽에 의한 통제와 압력, 그리고 지식인·엘리트 집단에서의 배제는 결과적으로 대량·대중 문화로서 만화가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잠식했고, 문화 영역 간 서열에서 가장 낮은 위치를 배정받는다. 그래서 만화는 비평 대상도, 학문적 연구 대상도 될 수 없었다. 대중문화에서 일반적 현상이기도 한 이 상황은 1970년대 고우영과 박수돌 같은 성인만화의 성장, 1980년대의 뛰어난 작품과 작가, 그리고 결국 공식적으로 ‘성인도 소비하는 대중문화’로 인정받게 된 이후에도 문화 영역 내부에서 지위는 변하지 않은 채 1990년대를 맞이한다.
 
문화산업과 애니메이션의 쓸쓸한 조우

1967년 <홍길동> 개봉으로 대중문화로서 가능성을 확인했던 애니메이션은 이후 해외 작품이 대거 수입되면서 무력화한다. 1978년 <로보트 태권V>가 SF 애니메이션 붐을 일으켰지만 한국 애니메이션은 오랫동안 침체기에 빠진다. 너무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제작은 수입으로 대체되고, 제작자들은 하청으로 돌아선다. 애니메이션, 정확히 ‘만화영화’에 대한 인식은 만화와 큰 차이가 없었다. (극)영화 감독들이 나서서 교육적 효과를 강조하고, 언론은 권선징악이라는 최소 기준선을 통과했다고 승인하면서도 “주제 면에서 황당무계하거나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전개시킴으로써 어린이들의 단순한 호기심과 흥미 따위만 불러일으킨다”고 비판한다(<동아일보> 1979년 7월 5일치). 제작자들은 하청과 외국 애니메이션에 대한 모방과 흥행작의 자기 모방만을 반복하며 1990년대를 맞이한다.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물결 위에서 상업적 수익과 상징 가치라는 수렴점을 통해 산업화되던 여타 문화산업과 달리, 애니메이션은 산업화에 실패한다. 막대한 지원과 자본이 쏟아져 들어왔지만 당시 한국 애니메이션은 상품으로서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능력이 없었고, 대중문화로서 기반도 빈약했다. 그렇게 수많은 돈과 기회, 국민적 관심과 애정을 까먹은 애니메이션은 점점 사양화돼가는 하청과 국가를 통해 유입된 자원을 중심으로 버텨갈 수밖에 없었다. 몇몇 작품과 감독, 제작이 어려운 상황에서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단일 상품으로 한순간에 공인된 대중문화로 상승하려는 시도는 무산되고, 끝없이 잠재적 후보군의 하나로 유예된 채 존재해왔다.

2011년의 애니메이션, 영화라는 자원

최근 한국 애니메이션계가 수립한 유니버설과 아동 혹은 가족, 국제 합작이라는 공식은 이런 실패와 <뽀롱뽀롱 뽀로로>의 사례, 그리고 그나마 제작을 이어갈 수 있었던 방송 애니메이션의 경험 속에서 수립됐다. 이 전략은 문화산업으로서 애니메이션이 취할 수 있는 여러 전략 중 하나에 불과하다. 더구나 한국 애니메이션이 대중문화·예술로서 자기 가치와 기반, 특히 여타 대중문화 영역과의 경쟁·비교 속에서 차지한 지위의 현재적 특성을 고려한다면, 안전하지만 지나치게 소극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2011년 세 편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은 다른 전략을 구사했다. 1억2천만 원의 제작비로 <돼지의 왕>을 제작한 연상호 감독의 이야기는 이렇다.

“소년만화 시장이 죽으면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 수 있는 원작이 많이 없어졌어요. 오리지널은 기획도 힘들지만, (투자와 지원의 검증 시스템을) 통과하기도 힘들고 (중략) 반면 지금 만화시장은 성인만화예요. 강풀도 그렇고, 윤태호도 그렇고. 이런 상황에서 애니메이션도 성인물이 되어야 하고, 영화적인 느낌의 성인물에 적응하지 못하면 산업 자체가 힘들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죠.”(이상욱 인터뷰·2011년 11월 5일)

그러니까 연상호 감독은 ‘아동용 시장’이라는 기존의 안전한 시장 말고, 영화와 방송의 관객과 웹툰을 통해 존재를 잠재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교집합으로서 성인 관객에 주목한 것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그가 영화라는 자원에 착목했다는 사실이다. <돼지의 왕>만이 아니라 <소중한 날의 꿈>과 <마당을 나온 암탉>은 기존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극)영화 인력과 업체가 결합하고, 영화 제작·배급·투자 시스템이 적극적으로 활용됐으며, 영화의 스타일과 문법이 적용됐다. <돼지의 왕>과 <소중한 날의 꿈>의 비평적 성공은 사실 주류 영화계의 평가며, <돼지의 왕>은 아예 영화계에 의해 발견됐다. 물론 애니메이션, 특히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이 영화로 수렴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으나, 한국 애니메이션계가 처한 현재의 상황에서 바라본다면 이 작품들이 ‘살아남기’ 위해 일정한 지위와 자원을 확보하고 있는 영화라는 문화 영역에 기댄 것이 성공의 한 요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남겨진 이야기

한국 애니메이션과 만화는 ‘교육과 정서 함양’, ‘산업’의 논리만 살아 있다. 문제는 ‘아동용’이 아니라 그 속에 숨어 있는 서열과 배제, 통제의 논리다. 국가는 오랫동안 자본과 결합해 애니메이션과 만화를 통제하고, 산업이라는 맥락에서도 제한된 진흥 정책만을 펴왔다. 사실 국가가 할 일은 1960년대 만화가들이 ‘합동’이라는 독점 기업에서 구출해달라고 하던 그 순간에 있었다. 또한 애니메이션 초창기 ‘외국 애니메이션 수입을 막거나 제한해달라’고 하던 그 순간에 있었다. 이런 문제는 여전하다. 정부가 양산해낸 수많은 애니메이터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작권 문제는 다운로드족들만의 것인가? 독과점 포털의 무료화 정책에 대해 정부는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가? 열악한 환경에 처한 예술인과 노동자의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국가가 할 일은 과거에도 많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한국 애니메이션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정답이 있을 리 없다. 때때로 공백과 균열은 현재를 드러내기도 한다. 일본도 검열 문제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 표적이 된 작가 ‘나가이 고’는 압력에 맞서 다른 방식으로 대응했다. 명랑 학원물에 불과하던 작품을 초등학생들이 총을 들고 전쟁을 벌이고, 나중에는 부모들까지 살해한 뒤 그 주검을 들고 낄낄대는 무시무시한 작품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만화! 문화사회학적 읽기>·최샛별 외·2009). 그러니까 공백과 균열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차라리, 괴물이다.


글. 이상욱 (독집영화프로듀서)
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과 다큐멘터리 <당신과 나의 전쟁>을 프로듀싱했고, 현재 다큐멘터리 <뉴타운 컬쳐 파티>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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