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황우석은 ‘처널리즘’ 박사다
황우석은 ‘처널리즘’ 박사다
  • 오철우
  • 승인 2011.11.11 18:20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계 최초라는데….”
“세계 최초는 수식어이니까 그걸 빼놓고 판단해보세요. 그러고도 중요하다고 생각돼야 중요한 거죠.”
“멸종위기종을 복제했다고 발표했던데….”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코요테가 멸종위기종은 아니라고 나와 있는데…. 아무튼 과학 연구를 너무 극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황우석 박사 연구팀(수암생명공학연구원)과 경기도가 지난 10월 17일 “멸종위기에 처한 코요테의 체세포를 개의 난자에 넣어 복제했으며, 갯과 동물의 이종 간 복제는 이번이 세계 최초”라고 떠들썩하게 발표했을 때 동료 기자와 잠시 나눈 대화였다. 이번 연구가 주목받은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종 간 복제’라는 낯선 전문용어 앞에서 뉴스의 가치를 쉽게 판단할 수 없었지만, 세계 최초에다 멸종위기종 복제라는 의미는 단박에 이번 코요테 복제 성과를 주목하게 만들었으니까.

게다가 이날 발표를 주목하게 만든 몇 가지 요소가 더 있었다. ‘맞춤형 세포치료술’로 불리던 인간 복제배아 줄기세포를 처음 보고한 2004년과 2005년 <사이언스> 게재 논문이 이전 연구팀의 데이터 조작으로 만들어졌음이 밝혀지면서, 명예와 신뢰의 곤두박질을 겪은 한 과학자가 ‘세계 최초’, ‘멸종위기종 복제’의 보따리를 들고 귀환했으니, 이제 한 과학자의 재기를 알리는 인간 드라마가 펼쳐질 것처럼 보였다.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한술 더 떠 “우리 꿈은 공룡 복제다. 쥐라기 공원의 꿈은 이루기 어렵다지만 그에 앞서 멸종한 매머드를 복원하는 데 도전하자”고 했고, 경기도청은 “코요테를 복제해 원서식지 북미에 방사하는 사업을 추진하겠다”며 동물복제의 꿈과 사명을 드높인 터라 한 편의 멋진 드라마가 완성되는 듯했다.
    
과학 홍보, 그 식상한 레퍼토리

이날 온라인에서는 많은 언론매체들이 ‘세계 최초’, ‘멸종위기종 복제’를 앞세워 기사를 내보냈다. 일부 매체는 ‘돌아온 닥터 클론’, ‘황우석의 컴백’, ‘황우석 신화의 부활’ 같은 성급한 제목을 달아 말 그대로 드라마 같은 기사를 내보냈다. 다음날 증권시장에서는 이른바 ‘황우석 테마주’가 상한가를 기록했다고 한다. 한바탕 떠들썩한 홍보와 보도가 지나갔으나, 그 뒤편에서는 과학 뉴스를 다루는 언론의 허술함과 그 허점을 이용하는 상투적 홍보 전략이 도드라져 보였다. 위업(‘세계 최초’)과 사명(‘멸종위기 종 복제’), 그리고 도전(‘매머드 복제’)을 부각한 홍보 전략은 사실 따지고 보면 과학 분야에서 식상한 레퍼토리에 가깝다. 게다가 그것이 사실과 다르거나 복잡한 논쟁의 맥락을 생략해 자의적 의미만 부각하는 홍보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몇 가지 쟁점을 따져보자.

첫째, 갯과 동물의 이종 간 복제는 이번이 세계 최초인가? 그런 ‘주장’을 할 수는 있지만 아직까지 ‘사실’은 아니다. 2007년 다른 국내 연구팀이 회색늑대의 체세포를 개의 난자에 넣는 이종 간 복제 방식으로 늑대를 복제해 발표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발표된 논문에도 늑대 복제는 ‘이종 간 복제’로 서술돼 있다. 그러니 당연히 코요테의 이종 간 복제가 갯과 동물로 세계 최초인지는 논란거리가 됐다. 회색늑대를 복제한 연구팀은 “늑대의 이종 간 복제 기술은 코요테 이종 간 복제 기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이번이 세계 최초라는 주장을 반박했다. 반면 황 박사 연구팀은 “늑대와 개는 사실상 같은 종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이종 간 복제로 인정할 수 없고, 이번 코요테 이종 간 복제야말로 갯과 동물로 세계 최초”라고 주장했다.

그는 지껄이고 기자는 받아쓴다

‘세계 최초’라는 표현은 세계인이 주목하거나 주목할 만한 가치를 지닌 것을 지칭할 때 써야 의미 있다. 어느 연구팀이 스스로 “이번이 세계 최초”라고 선언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과학계의 동료심사를 거친 논문이 국제 저널에 출판되지 않은 상황에서, 연구팀이 스스로 그런 의미를 선언하고 또 언론이 이를 기정사실로 보도하는 것은 과학 평가의 문제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이 때문에 한국과학기자협회는 2005년 12월에 줄기세포 논문 조작 사건을 계기로 ‘과학보도 윤리선언’을 발표하면서 “‘세계 최초’ 또는 ‘국내 최초’라는 표현을 삼가고 그것이 국가와 사회 발전에 기여할 것인지를 고려한다”는 항목을 따로 넣었다. 그러나 언론은 여전히 세계 최초의 의미를 따져보기도 전에 그 레퍼토리에 매달리는 관행을 버리지 못함을 보여주었다.

둘째, ‘멸종위기에 처한 코요테’라고 밝힌 홍보 실수는 사소한 것일까? 멸종위기 관리 등급을 매기는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의 온라인 자료를 검색해보면, 코요테는 북미 등지에 널리 번식하고 있는 갯과 동물이다. 게다가 미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코요테가 가축이나 사람에 해를 끼치는 일이 잦아 코요테를 잡아 없애는 작업도 벌어진다는 외신 보도가 있다. 그런 코요테를 많이 복제해서 원서식지 북미에 보내는 사업까지 벌이자는 경기도의 구상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코요테가 멸종위기종이든 아니든 그것은 사소한 문제이고, 코요테 복제라는 성과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연구팀과 경기도는 왜 코요테를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로 강조하다가 나중에야 문제를 시인했을까? ‘멸종위기에 처한 코요테를 복제했다’는 홍보와 ‘갯과 동물 코요테를 복제했다’는 홍보는 연구 성과의 의미에서, 대중적 호소력에서 아주 다른 것이다. 또한 ‘멸종위기종 복제’ 이야기가 곧바로 ‘멸종한 매머드의 복제’라는 원대한 도전 이야기로 이어지니, ‘멸종위기에 처한 코요테’는 일부러 강조하고 싶었던 표현이 아닐까?

아쉽게도 많은 매체가 홍보자료를 그대로 받아들여 보도했다. 일부 방송은 “~했다”는 글말을 “~했습니다”라는 입말로 바꿨을 뿐 내용을 그대로 옮겨 보도했다.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이번 홍보자료를 닮은 수많은 기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갖가지 매체들이 전한 보도 건수는 매우 많았지만, 다양성 측면에서 보면 차이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독자는 기자가 쓴 기사를 읽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기사 형식의 홍보자료를 읽고 있는 것일까?

<복제늑대>, 2007-김태형

과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세계인이 주목할 만한 ‘세계 최초’의 연구 성과라면, 연구팀은 먼저 국제 과학계의 전문가 심사 과정을 거친 뒤 과학계에서 동의하는 적절한 의미를 담아 발표해야 했다. 논문 출판 이전에 대중미디어에 연구팀의 발표를 기정사실인 듯이 내세우는 일은 언론의 허점을 이용하는 그릇된 관행일 뿐이다. 언론은 그릇된 홍보의 관행을 걸러내지 못했다.

오래전에 발행된 미국 과학잡지 <더 사이언티픽 먼슬리>(1947년 5월호)를 우연한 기회에 읽다가 과학 대중화와 관련한 어떤 글에서 우스갯소리를 본 적이 있다. 이런 내용이었다. “난해한 수학 분야를 연구해 큰 상을 받은 저명한 수학자를 어느 기자가 인터뷰하러 찾아갔다. 수학자는 난해한 수학의 개념을 찬찬히 설명해주었다. 설명을 다 들은 기자는 ‘결국 신을 믿지 않으신다는 말인가요?’라고 되묻고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수학자는 신문에 ‘수학의 마법사, 무신론을 증명하다’라는 제목으로 실린 기사를 보고서 경악했다.”

과학도 저널리즘도 아닌 ‘세계 최초’

실화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에피소드는 과학의 언어와 대중의 언어가 소통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자의적 잣대로 보도하는 과학 뉴스가 어떻게 엉뚱한 결과를 만들 수 있는지 풍자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인식 때문인지 오랫동안 과학자 사회에서는 대중매체와 접촉하기를 꺼리는 엄숙주의가 있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소통이 강조되고 과학 홍보의 필요성도 높아지는 분위기 때문인지, 과학자가 기자를 직접 만나는 일은 새삼스럽지 않을 만큼 잦아졌다. 홍보물도 늘고 홍보 기법도 세련됐다. 요즘에는 많은 대학·연구소와 기업의 홍보실이, 그리고 개인 연구자들이 홍보자료를 여러 언론매체에 제공한다.

홍보자료 자체가 문제인 것은 결코 아니다. 좋은 홍보자료는 취재기자한테 취재를 위한 좋은 자료가 된다. 흩어진 정보와 복잡한 맥락을 정리한 자료는 제한된 시간 안에 취재하고 기사를 마감해야 하는 기자의 시간과 비용을 줄여준다. 자료를 적절히 인용해 훌륭한 기사를 쓰면 되지 홍보자료를 배척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홍보자료가 너무 자주 많은 기사에 그대로 스며드는 ‘집단적 패턴’은 이제 돌아봐야 하는 저널리즘의 문제가 됐다.

공정하지만 회의하는 눈으로 보라

이런 저널리즘의 문제를 지적하는 말도 생겨났다. ‘처널리즘’이라는 신조어인데, 영국 탐사보도 언론인 닉 데이비스가 2008년에 쓴 책 <편평한 지구 뉴스>에서 보도자료에 많이 의존하는 언론 보도 세태를 비판하면서 널리 퍼진 말이다. 대체로 ‘홍보자료나 통신사 보도를 그대로 옮기는 언론 보도 세태’를 이르는 의미로 쓰인다. 최근 영국에서 ‘처널리즘닷컴’(churnalism.com)이라는 웹사이트도 생겨났다. 홍보자료와 기사를 비교 검색해 기사가 보도자료를 몇%나 옮겨 적었는지 계산해주는 검색엔진인데, 홍보자료 전문이나 특정 문장을 따다가 검색창에 넣으면 홍보자료를 빼닮은 영국 매체의 기사들을 찾아준다. 국내엔 이런 웹사이트가 없지만, 널리 보도된 어떤 뉴스의 홍보자료 원문을 구해 일부 문장을 따다가 네이버 뉴스 검색창에 넣으면 얼마나 많은 과학 뉴스가 홍보자료의 문구를 옮겨 쓰고 있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무엇을 말해줄까? 먼저 예전에 비해 매체가 많아지고 다양화했지만, 다양한 시각의 기사를 읽을 기회가 그만큼 늘지 않았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매체가 다르고 쓰는 기자가 다르지만 많은 기사는 홍보자료의 줄거리를 좇아 비슷비슷하다. 또한 처널리즘은 뉴스 가치를 적절히 평가할 줄 아는 전문집단인 언론매체가 기사를 대량생산해야 하는 현실에서 따져보고 걸러내는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 채, 취재원이 마련해주는 스토리텔링의 길을 좇아갈 가능성이 높아짐을 뜻한다. 무엇보다 그렇게 보도된 것이 언론 나름의 취재 절차를 거친 뒤 나온 객관적 기사인 양 오해되는 것이 큰 문제다.

과학저널 <네이처>는 2009년 ‘치어리더인가, 감시견인가?’라는 제목의 인상적인 사설을 실은 적이 있다. 과학 언론은 그저 과학활동에 힘을 보태주는 존재가 아니라 언론 나름의 가치를 좇아야 하고, 그 가치의 뿌리에는 회의주의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일부(의 과학자)는 과학 저널리즘을 핵 확산, 줄기세포, 유전자 조작 작물 같은 과학 관련 쟁점을 대중이 이런저런 식으로 이해하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기편 정도로 여길 것이다. 또한 대중에, 그리고 마찬가지로 정치인들한테 어느 번창하는 연구 분야를 위한 변론을 펴는 데 도움을 주는 자기편 정도로 여길 것이다. 그리고 소수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인식하고서 저널리즘의 더 깊은 가치를 지적할 것이다. 그 가치란 과학을 비롯해 공공 영역에 걸쳐 있는 모든 사안에 공정하지만 회의적인 눈을 던지는 것이다. …그런 따져보기는 전반적인 과학활동에도 도움을 준다. 사회가 과학에 신뢰를 보내려면, 그 사회에서는 과학을 따져보고 되새김해보는 과정이 먼저 필요하다. 저널리스트는 그런 과정의 핵심 부분이다.”(1)

이번 황우석 연구팀의 코요테 복제 성과에 대한 국내 언론의 지나친 관심과, 그에 비해 너무 허술한 보도 관행을 보면서, 건전한 과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공정하지만 회의적인 눈’이 과학 저널리즘에 절실히 필요하다는 <네이처> 사설의 주장을 다시 곱씹어본다.


글. 오철우 
<한겨레>에서 과학을 담당하고 있다. 한겨레 사이언스온(http://scienceon.hani.co.kr)을 운영한다.

(1) ‘Editorial: Cheerleader or watchdog?’, <Nature 459>, 1033, 2009년 6월 25일.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

오철우
오철우 info@ilemon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