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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숙의 시네마 크리티크] <갈매기> - 공동체의 이익과 개인의 존엄성 사이에 놓인 위기의 여자
[서곡숙의 시네마 크리티크] <갈매기> - 공동체의 이익과 개인의 존엄성 사이에 놓인 위기의 여자
  • 서곡숙(영화평론가)
  • 승인 2022.03.0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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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폭행 영화: 피해자 여성의 순결성/방탕성과 문제의 왜곡

성폭행을 다룬 영화들은 사회적 이슈와 분위기를 반영하며 항상 논쟁의 화두가 되어 왔다.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김유진, 1990)에서 주부 임정희(원미경)는 늦게 귀가하다가 두 청년에게 성폭행을 당하며, 최종민(김민종)의 혀를 깨물며 저항하여 청년에게 오히려 고소를 당하고 구속된다. 그녀는 과거 호스티스 이력이 밝혀지면서 검찰, 재판부, 상대 변호사의 성적, 인격적 모욕과 독설로 궁지에 몰리고, 가족의 불신, 주위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 등으로 자살을 기도하게 된다. 결국 최후 법정에서 사건 현장에 함께 있었던 시누이(진희진)의 위증 번복 증언으로 무죄를 선고받는다.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에서 성폭행의 피해자인 여주인공은 과거 호스티스 이력으로 방탕한 여성이라는 낙인이 찍혀 오히려 가해자로 처벌받는 위기에 직면한다.

<69세>(임선애, 2019)에서 69세 효정(예수정)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29세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경찰에게 신고한다. 하지만 경찰과 주변 인물들은 20대 남성이 40살이나 많은 60대 여성을 성폭행하는 일은 말도 안 된다며 효정을 치매 환자로 매도하고, 법원 역시 나이 차이를 근거로 사건의 개연성이 부족하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한다. 그 과정에서 경찰은 성폭행 당한 피해자 효정에게 “(그 남자가) 친절이 과했네.”라며 조롱하며, 나이든 여성에게는 젊은 남성의 성폭행마저 쾌락일 거라는 가부장적인 남성 위주의 편협한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69세>는 여성 성폭행 사건에서 일어나는 남성의 육체적 폭력과 공권력의 정신적 폭력에 직면한 60대 여성이 자신을 극복하고 가해자의 악행을 알림으로써 피해자인 여성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회를 비판한다.

<갈매기>(김미조, 2020)에서 오복(정애화)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알고 지내던 연하 남성 기택(김병춘)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경찰에 신고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처벌받지 않은 가해자 기택이 오복이 자신을 모함한다며 오히려 횡포를 부린다. 오복은 성폭행 사건을 통해서 내적 갈등, 사적 갈등, 공적 갈등으로 나아가면서, 가족도 세상도 외면한 자신을 돌이켜 보게 되면서 기만적인 가해자에게 소리 없는 항거를 시작한다.

 

2. 어머니의 굴레, 가족의 무게와 여성의 절망

<갈매기>의 전반부는 여주인공의 사적 갈등과 내적 갈등을 통해 어머니의 굴레, 가족의 무게, 여성의 절망을 보여준다. 시장 상인 오복은 큰 딸 인애(고서희)의 상견례 자리에서 점잖은 공무원 집안의 사돈댁과 눈치 없이 마구 먹어대는 남편 무일(장유) 사이에서 사적 갈등을 느끼고는 시장 상인들과의 공적인 회식 자리에서 취하도록 마신다. 다음 날 이른 새벽 오복이 멍한 표정으로 비틀거리며 옷 뒤에 묻은 것을 가리고, 집에 돌아와 계속해서 이불이나 옷에 묻은 피를 빨래하고, 산부인과 문진표에서 51세 폐경과 하혈 증상을 기록하고, 이웃 기택 가게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깬다.

 

이 영화는 오복의 이상한 일련의 행동들을 보여주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 불친절한 내러티브 전개를 보여준다. 이러한 불친절한 내러티브 전개는 바로 오복의 내적 갈등을 외면적인 행위로만 형상화하며 가족이나 주변 인물들에게 말할 수 없는 오복의 가슴앓이에 대해서 관객이 함께 느끼도록 만든다. 결국 관객은 술자리에서 오복에게 예뻐 보인다고 계속 칭찬하며 술을 따르는 기택, 멍한 표정으로 계속되는 하혈로 힘들어하는 오복, 기택의 가게에 돌을 던지는 오복의 모습을 통해 오복이 기택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유추하게 된다.

 

오복은 위선적인 가해자로 인해서 육체적/정신적 상처를 입고, 무관심한 남편으로 인해서 정신적 상처를 입는다. 피해자 오복은 성폭행의 육체적 폭력과 정신적 충격으로 시장 가게에 나가지 않는다. 가해자 기택은 오복의 집에 찾아와 오복의 남편에게 전복과 문어를 선물하는 등 친절을 가장한 기만적인 행위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오복의 남편도 아내를 성폭행한 가해자가 준 무마용 선물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전복과 문어를 먹으며 기뻐하고, 아내가 기택의 선물을 외면하는 행위, 큰 딸 인애와 셋째 딸 지애(김가빈)가 아내의 하혈을 걱정하는 말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무관심하여 비판의 대상이 된다.

 

<갈매기>의 전반부 스타일은 화면 밖 공간, 미장센의 대비, 시선과 표정의 강조, 숏 크기와 시선, 옆모습/뒷모습의 미장센을 통해 여주인공의 내적 갈등과 불안한 심리를 표현한다. 오복과 남편이 상견례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타는 장면에서, 택시를 잡기 위해 뛰어가는 능동적인 오복과 뒤따라가는 수동적인 남편의 모습을 대비시킨다. 이때 두 사람이 화면에서 사라진 이후에도 시장을 계속 비춤으로써 화면 밖의 공간과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는 시장이 향후 주요한 사건의 공간임을 암시한다. 오복, 남편, 큰 딸이 중식당에서 사돈댁과 상견례를 하는 장면에서, 식탁 아래에 낮게 배치된 카메라는 오복이 눈치 없이 허겁지겁 먹는 남편의 다리를 꼬집는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줌으로써 위축된 오복의 심리를 표현한다.

오복이 시장 상인들의 회식 자리에서 술을 먹는 장면에서, 불편한 상견례 자리를 회상하며 점점 만취해 가는 오복의 모습을 흐릿한 화면과 선명한 화면이 계속 번갈아가며 보여줌으로써 오복의 시점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술에 취해 의식을 잃은 오복의 모습도 검은 암전으로 오복의 시점을 표현한다. 오복이 목욕탕에서 피가 묻은 속옷을 빠는 장면에서, 계속 내리깐 눈, 넋을 잃은 표정을 클로즈업으로 강조함으로써 충격적인 사건을 당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산부인과에서 오복이 문진표를 작성하는 장면에서, 51세 폐경과 대비되게 하혈이라는 방문 이유를 적는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강조함으로서 성폭행에 대해 확신하게 만든다.

시장 사거리에서 오복이 기택의 가게로 향하는 장면에서, 버즈아이뷰숏과 롱숏의 내려다보는 카메라의 시선으로 길을 건너는 오복의 모습을 조그마한 피사체로 보여줌으로써 나약한 희생자의 모습을 표현한다. 오복이 시장 상인회의 단결투쟁 회합 모습을 쳐다보는 장면에서, 거울을 통해 보여주는 지친 옆모습과 유리창을 통해 내려다보는 뒷모습/옆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상인회 간부이자 성폭행 가해자인 기택으로 인해서 공적 활동에도 참여할 수 없는 오복의 갈등을 표현한다.

 

3. 기만적인 가해자, 무지한 남편과 여성들의 연대

<갈매기>의 중반부는 공적 갈등과 사적 갈등이 충돌하면서 공동체/개인, 남성/여성, 경제적 이익/도덕적 가치의 대립을 드러내면서, 기만적인 가해자, 무지한 남편, 연대하는 여성들을 강조한다. 오복이 상인회 원로에게 기택의 사과를 받아달라고 중재를 요청하지만, 성폭행 사실을 모르는 주변 상인들이 공적 투쟁을 위해서 사적 감정을 빨리 풀라고 강요한다. 오복이 경찰에 기택의 성폭행 사실을 신고하자, 분노한 기택이 오복을 찾아와 자신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운다며 오복 가게의 기물을 파손한다.

 

남자 상인들과 남편은 성폭행 피해 사실을 술안주처럼 재미 삼아 거론하며 오복에게 모욕감을 주고, 여자 상인들은 ‘한강에 배 한 번 지나간 게 뭔 대수냐’며 ‘젊은 사람의 앞길을 막지 말라’며 설득하여 오복에게 배신감을 안겨준다. 이에 오복은 ‘늙은 사람 모가지는 비틀어도 되냐’며 반문한다. 주변 인물들은 공적인 이익을 위해서는 사적인 희생이 필요하다는 논리 속에서 성폭행 사건의 가해자인 상인회 간부의 악행을 덮고자 한다는 점에서 경제적 이익과 도덕적 가치의 갈등 문제가 드러난다.

 

오복의 내적 갈등이 사적 갈등, 공적 갈등으로 점점 뻗어 나오면서, 정보 전략에서 점차적으로 정보가 제공되면서 관객의 의혹이 확신으로 바뀌게 된다. 우선, 오복은 상인회 원로를 통해서 기택의 사과를 요청하지만 무슨 잘못을 했는지 정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다음으로, 오복이 큰 딸에게 가장 먼저 고백하지만 그 대화를 묵음 처리함으로써 직접적으로 들려주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남편이 ‘누가 자기를 따먹었다며 신고했다’며 소문을 전함으로써, 비로소 아내 오복의 성폭행 사실에 대해서 확실하게 밝혀진다.

 

기만적인 기택은 오복에 대해 성폭행이라는 정신적/육체적 폭행을 행할 뿐만 아니라, 거짓말과 기물파손이라는 정신적/물리적 폭행까지 행함으로써 비판의 대상이 된다. 무지한 남편은 ‘누가 자기를 따먹었다고 신고했다’며 아내의 성폭행 사실을 희화화하고, ‘누구인지 아는가?’라는 무지한 질문을 성폭행 피해 당사자인 아내에게 질문하여 정신적인 가해자가 됨으로써 비판과 조롱의 대상이 된다. 반면에, 성폭행 사건을 전해들은 큰 딸은 오복에게 경찰에 신고할 것을 권유하고, 셋째 딸은 상처 입은 오복을 위로함으로써 여성들의 연대를 보여준다.

<갈매기>의 중반부 스타일은 흑백의 색채 대비, 사운드/묵음의 대비, 행위의 대비, 내려다보는 앵글, 화면 밖 공간을 통해서 여주인공의 내적 갈등, 공적 충돌을 표현함으로써, 공동체/개인, 남성/여성, 경제적 이익/도덕적 가치의 대립을 드러낸다. 오복이 상인회 원로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기택의 사과를 받아줘야 한다는 말(인지)과 무슨 잘못을 했는지 말할 수 없다는 말(무지)을 대비시키며, 이런 대비는 건물 계단의 어두운 부분과 두 인물의 밝은 부분이 흑백의 대비로 표현된다.

자동차에서 오복이 큰 딸에게 고백하는 장면에서, 오복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백하는 모습과 큰 딸이 충격을 받은 모습을 보여줄 때, 영상으로 강조하지만 사운드로 묵음 처리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유추하게 만든다. 거리에서 큰 딸 인애가 자신의 집을 올려다보는 장면에서, 카메라가 내려오면서 옥상에서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밝은 표정의 아버지와 3층에서 경찰 신고 결심으로 착잡한 표정의 어머니를 대비시킨다.

오복이 고등학교 사거리를 건너는 장면에서, 천천히 걷는 오복을 버즈아이뷰숏과 롱숏으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카메라는 공적 갈등과 사적 갈등에 직면한 오복의 내적 고뇌를 표현한다. 기택이 오복 가게의 기물을 파손하는 장면에서, 갑자기 들이닥쳐서 ‘사람을 모함하고 있어.’라며 소리를 지르며 기물을 파손하고 ‘증거 있어?’라며 오복을 몰아세우는 모습을 보여줄 때, 화면 밖에서 기택이 기물을 파손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보여주지 않고 사운드로만 들려줘 가해자의 폭력성을 강조한다.

 

4. 외면하는 목격자, 모욕하는 남편과 저항하는 여성

<갈매기>의 후반부는 순결/방탕의 이분법적 시선으로 고통 받는 여주인공을 중심으로, 외면하는 목격자, 모욕하는 남편과 항거하는 여성을 대비시킨다. 오복은 성폭행 경찰 신고로 인해 더럽혀진 여성이라는 오명으로 사돈댁에서 비난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낀다. 큰 딸은 어머니의 성폭행 사건과 예비 시어머니의 예단값 압박으로 스트레스를 받아, ‘왜 술에 취해서 그런 험한 일을 당했어?’라며 어머니 오복을 비난하고는 후회한다. 남편은 오복의 성폭행 사건을 알게 된 후 술에 취해 ‘(젊은 남자에게 당하니) 좋았냐?’라는 모욕적인 발언을 하자, 성폭행 사건을 다른 남자와의 외도 사건으로 치부하는 남편에게 오복은 분노한다.

 

성폭행 사건의 가해자를 처벌하려는 오복의 시도는 단계별로 이루어지며 대부분 실패한다. 첫째, 오복은 상인회 원로에게 사적 중재를 요청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이해 부족으로 실패한다. 둘째, 오복은 경찰 신고를 통해 공적 해결을 시도하지만, 증거 불충분과 가해자의 물리적 폭력에 직면한다. 셋째, 오복은 주변 인물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억울한 처지를 호소하려고 하지만, 대부분의 인물들이 오복을 피해 버린다. 넷째, 오복은 기택의 성폭행을 목격한 석태에게 협조를 약속받지만, 석태가 경찰에 출두하지 않음으로써 증언 확보에 실패한다. 네 가지 사적/공적 시도가 모두 실패하자, 오복은 다섯 번째 마지막 시도를 감행한다. 오복은 기택의 성폭행 사실을 폭로하는 피켓을 들고 기택의 가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면서 외로운 저항을 시작한다.

 

<갈매기>의 후반부 스타일은 인물들에 대한 앵글, 시선/표정의 대비, 숏 크기의 강조, 미장센의 변화를 통해 인물들의 가치관 차이, 사적/내적 갈등, 열악한 상황, 가해자/피해자의 대조 등을 표현한다. 술에 취한 무일이 가족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오는 장면에서, 위에서 내려다보는 카메라의 시선으로 술에 취한 무일, 무일을 부축하는 두 딸, 그 뒤를 따라오는 오복을 차례대로 보여줌으로써 가족의 균열을 암시한다. 화장실에서 오복이 술에 취한 무일을 씻기는 장면에서, ‘좋았냐?’라며 모욕하는 남편 무일의 사운드가 화면 밖에서 들리는 가운데 시선을 돌려 그를 노려보는 아내 오복의 얼굴을 시선과 클로즈업으로 강조함으로써 오복의 분노를 표현한다.

 

큰 딸과 셋째 딸이 오복을 기다려 만나는 장면에서, ‘사람들을 찾아가서 이야기해 보자. 언니랑 내가 도와줄게.’라며 셋째 딸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과 우두커니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오복의 옆얼굴(바스트숏)은 대비를 이룬다. 오복이 자동차에서 내리는 장면에서, 주변 인물들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 돌아다니는 오복의 모습을 버즈아이뷰숏과 롱숏으로 보여줌으로써 열악한 상황에서 발버둥치는 미약한 인물을 표현한다. 오복이 주변 인물의 집을 방문하는 장면에서, 인기척이 없는 집을 바라보는 오복의 옆얼굴(바스트숏)을 가까이에서 보여주다가 카메라가 멀어지면서 아파트에서 밖을 내려다보는 절망적인 오복의 모습(롱숏)을 보여줌으로써 비관적 상황을 표현한다.

골목에서 피해자 오복과 목격자 석태(박장용)가 만나는 장면에서, ‘목격했지만 시장 상황이 안 좋고 해서 말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석태와 ‘경찰에 말해서 금방 알려주고 아무에게도 말 안 할게.’라며 고마워하는 오복을 풀숏의 투숏으로 잡아내면서 두 사람의 유대감을 강조한다. 하지만, 오복과 석태가 대화를 나누고 헤어지는 장면에서, 카메라가 고정된 상태에서 석태는 풀숏으로 계속 그 자리에 있는 반면에, 오복은 풀숏에서 롱숏으로 점점 멀어지면서, 두 사람의 멀어지는 간격과 어지럽게 배열된 골목의 세로 직선으로 불길한 앞날을 예고한다. 경찰서에서 오복이 목격자 석태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경찰서 정문 앞에서 서 있는 오복(롱숏)에게 카메라가 가까이 다가가면 눈물자국이 있는 오복의 옆얼굴(바스트숏)이 보이면서 오지 않는 목격자로 인한 절망을 강조한다. 큰 딸의 결혼식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고정된 카메라로 오복, 남편, 셋째 딸이 자동차에서 내려서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롱숏에서 익스트림롱숏으로 점점 멀어지면서 암담한 현실에 처한 피해자 오복과 가족을 표현한다.

오복이 1인 시위자를 보는 장면에서, 가해자를 처벌하려는 모든 방법이 막혀 절망한 오복이 옥상에서 혼자 피켓을 들고 있는 1인 시위자를 발견하는 순간에 오복의 얼굴(바스트숏)과 1인 시위자의 모습(익스트림롱숏)을 투숏으로 함께 담아냄으로써 오복의 결의를 암시한다. 기택이 오복을 보고 놀라는 장면에서, 평온하게 낮잠을 자다가 놀라서 벌떡 일어나는 가해자 기택의 모습을 피해자 오복의 다리 사이로 보여줌으로써 가해자의 평온한 일상과 피해자의 고통스러운 일상을 대비시킨다. 기택의 가게 앞에서 오복이 1인 시위를 하는 장면에서, ‘저는 주오복입니다······’라고 적힌 피켓을 든 오복의 상반신 모습(미디엄숏)에서 카메라가 점점 다가가면서 눈물을 글썽이며 비장한 표정을 짓는 오복의 얼굴(바스트숏)을 보여준다.

 

5.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드는 현실과 미약한 여성의 과감한 저항

<갈매기>는 김미조 감독의 단국대학교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2020년 졸업 작품이다. 이 영화는 여성 성폭행 범죄 사건에서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드는 모순적 상황, 가해자의 죄보다 피해자의 결백성을 따지는 이상한 문제제기를 드러낸다. ‘잘못은 그 새끼가 했는데, 나한테 가만히 있으란다’, ‘한강에 배 한 번 지나간 게 뭔 대수냐고 그란다’, ‘젊은 사람 발목 잡아 좋을 게 뭐가 있냔다’ 등 여주인공은 가해자의 성폭행 범죄를 비판하기보다는 피해자의 인내와 침묵을 강요하는 현실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왜 공식적인 회식 자리에서 술을 먹었냐며 가해자의 악행보다는 피해자의 실수를 부각시키는 딸이나, 성폭행 범죄를 쾌락적인 성행위나 외도로 치부하며 오명을 씌우는 남편으로 인해 상처 받는 피해자에게 공감하게 만든다.

 

최근 성폭행 사건을 다룬 영화들에서 피해자 여주인공은 공권력에 의한 해결에 실패하고, 주변 인물의 도움을 받는 것도 실패하고, 결국 혼자 저항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69세>에서 여주인공은 옥상에서 가해자의 성폭행 범죄를 알리는 전단지를 뿌리고, <갈매기>에서 여주인공은 가해자의 가게 앞에서 가해자의 성폭행 범죄을 알리는 1인 시위를 한다. 그래서 이러한 성폭행 사건을 다룬 영화들은 공권력에 대한 불신, 주변 인물들의 부정적 시선 등에 실망하며 혼자 문제를 해결하는 서사를 보여준다.

 

이 영화들은 피해자 여성의 나이 문제와 행실 문제를 거론하면서 가해자의 죄를 처벌하기보다는 피해자의 무죄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피해자 여성을 또 다시 고통에 빠지게 하는 현실을 드러낸다. <갈매기>에서 상인회를 중심으로 개발 보상금 투쟁을 하는 상황에서 집행부의 성폭행 사건을 끄집어내는 피해자에게 주변 상인들은 계속 사건을 들추지 말고 참으라고 강요한다. 이는 공적인 대의와 사적인 존엄성을 저울질하면서 항상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시함으로써 부도덕성과 악행을 덮으려는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성폭행 사건을 다룬 이전의 영화들이 성폭행 장면을 마치 성행위 장면처럼 자극적으로 묘사하거나, 여성의 육체를 관음증적으로 현시하는 장면으로 그리는 등 성폭행 영화 자체가 폭력적인 경우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갈매기>는 가해자 기택이 피해자 오복을 성폭행하는 장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암시만 함으로써 성폭행 영화의 폭력적인 재현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감독의 진보적 의식과 섬세한 연출이 돋보인다.

<갈매기>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스타일적 연출, 즉 버즈아이뷰숏과 롱숏으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억압적 현실에서 부서지고 눌리는 미약한 여주인공의 존재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여주인공이 슬픔, 고통, 배신, 실망 등으로 침잠할 때마다 화면 중간에 삽입되는 검은 암전은 관객이 여주인공과 함께 어두운 심연으로 끌려 들어가는 느낌을 준다. <갈매기>에서 내려다보는 카메라의 시선과 검은 암전이 공동체의 이익과 개인의 존엄성 사이에서 갈등하던 여성 피해자 오복이 처한 어두운 현실을 표현함으로써, 미약한 여주인공이 세상을 향해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과감한 저항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든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서곡숙
영화평론가. 청주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총무이사, 웹진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편집장, 웹진 《르몽드 문화톡톡》 편집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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