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최양국의 문화톡톡] 승무~바다 그리고 파피용(Papillon)
[최양국의 문화톡톡] 승무~바다 그리고 파피용(Papillon)
  • 최양국(문화평론가)
  • 승인 2022.03.07 09: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의 배달부는 엘리트 계급이자 신성한 부류에 속한다. 그는 그 위치에 오를 만큼 재능이 있다. 지금 그는 오늘 밤의 세 번째 임무 수행을 준비 중이다.~(중략)~ 배달부는 단단하게 차려입은 팔을 깨진 창으로 내민다. 흐릿한 뒷마당 불빛 아래, 하얀 직사각형 물건이 빛을 발한다. 명함이다.~(중략)~ 명함 뒤에는 어떻게 그와 연락할 수 있는지 너절하게 쓰여 있다. 세계 어디서나 연결할 수 있는 휴대 전화번호. 사서함 번호. 대여섯 개나 되는 통신 네트워크상의 주소들. 그리고 메타버스의 주소까지.”

- 스노 크래시(SNOW CRASH), 닐 스티븐슨 지음(남명성 옮김) -

꽃 시샘달이 하얀 눈물로 졸졸졸 흘러간다. 눈과 꽃의 경계가 끝나는 고향에서 팔랑팔랑 날아오른다. 온갖 색의 향연으로 찰랑거리는 바다밭에서 아바타 되어 후줄근 젖는다. 햇살 바람을 마주 보며 철썩//써억철 달기둥에 눕는다. 산과 들에 물이 오르며 해기둥을 탄다. 자유 배달부 나비의 주소는 3월의 승무~바다 그리고 파피용(Papillon).

 

눈과 꽃 / 경계에서 / 승무로 / 날아오른

 팔랑팔랑~3월이 눈과 꽃의 경계가 끝나는 고향에서 날아오른다. 조지훈(1920년~1968년)의 <승무> 속에서 나비로 태어난다.

 

* 승무(1939년), 조지훈, Google
* 승무(1939년), 조지훈, Google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승무>(1939년), 조지훈 -

이어령(1934년~2022년)은 《언어로 세운 집, 2015년》에서 <승무>를 다시 읽는다. “~(중략)~.그리고 거기에서 우리는 곧바로 그 시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세 가지 정보의 회로 속으로 들어간다. 처음에는 ’얇은 사‘, ’고깔‘, ’박사‘와 같은 의상 정보에 관한 것이고, 다음은 ’나빌레라‘의 비유어에서 보듯이 나비와 같은 자연물에 관한 정보, 그리고 마지막에는 ’파르라니 깎은 머리‘의 그 신체 정보이다. 셰익스피어의 ’기저귀‘와 ’수의‘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인생의 기호로 사용되고 있는 것처럼, 이 시에서도 의상은 인간의 ’미와 진실‘을 드러내는 중요한 문화 코드로 작용한다. 반복형으로 강조된 ’얇은 사‘와 ’박사‘는 우리가 보통 때 입고 다니는 ’두터운 무명‘ 옷감의 재질과 대립하는 것이고,’하이얀‘ 빛깔은 삶의 쾌락을 나타내는 색동옷과 대칭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 절제와 정화를 나타낸다.~(중략)~. 단순하게 말해서 고깔의 의상 코드가 나비의 자연 코드와 합쳐진 것이 춤(무)이며, 삭발한 머리의 신체 코드와 결합한 것이 불교(승)이다. 그러니까 ’의상=자연=신체‘의 세 코드가 은유와 환유의 시적 장치를 통해서 하나로 수렴되고 승화된 것이 바로 그 「승무」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조지훈의 「승무」를 읽는다는 것은 그 첫머리에 제시된 고깔(의상)-나비(자연)-머리(신체)의 관계가 어떻게 선택, 결합되어 진전되어가는가를 추적하고 밝히는 일이기도 하다.”

<승무>는 ’나‘(현실적 존재)-자연-세상-’나‘(지향적 존재)로 확대되어 나아가며 청산(靑山)을 향한 나선형 원의 궤적을 그린다. 고깔로 대변되는 현실적 존재인 ’나‘의 탄생을 나비로 비유하며 시작한다. ’얇은 사’, ‘깍은 머리’ 그리고 ‘박사(薄紗)‘는 얇음에 대한 반복적 언어유희를 통해 인간으로서 가진 원초적 욕망을 향한 한(恨)과 절제를 강조한다. ’하이얀‘과 ’까만‘ 그리고 ’파르라니‘의 무채색과 유채색 간 색채 대비를 통해 어둠 속 밝음을 지향하는 지고 지순을 향한 의지를 나타낸다. 이제 ’나‘는 자연을 만난다. 빈 대, 밤과 달, 오동잎과 귀또리는 ’나‘를 둘러싼 시공간적 배경이다. 현실적 존재의 지향적 존재로 승화를 위한 매개체이다.

자연을 뒤로하고 세상과 함께한다. 세상은 ’까만 눈동자‘의 ’두 방울‘ 눈물처럼 진정으로 고와서 서러운 번뇌로 가득하다. 황촉불~오동잎~달의 하강, 외씨버선~하늘~별빛의 상승, 그리고 빈 대~소매~뺨의 멈춤. 세상은 하강-상승-멈춤으로 어울린다. 문득 귀또리 소리를 듣는다. 낯설은 듯 매정하게 모은 두 손을 노오란 삼베 나비 옷에 수줍은 듯 묻고, 버선코를 곧추세우며 오동나무 집으로 슬며시 떠나간 그 여인(麗人)을 그린다. 속세와 해탈의 경계면에서 내면적 참된 자아를 지향하는 존재로서의 ’나‘를 향해 합장한다.

 

흰나비 / 절은 날개 / 시린 허리 / 파란 나비

 후줄근~온갖 색의 향연으로 찰랑거리는 바다밭에서 아바타 되어 젖는다. 김기림(1907년~ ?)의 <바다와 나비>를 읽은 나비는 청산을 찾아 푸른 하늘을 날아간다.

 

* 바다와 나비(1946년), 김기림, Google
* 바다와 나비(1946년), 김기림, Google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 <바다와 나비>(1946년), 김기림 -

수심을 알지 못하고 바다를 모르는 나비는 청(靑)무우밭에서 여인(麗人)을 찾으며 청산별곡을 부른다. 바람이 분다. 청 무우밭이 흔들리며 바다로 변한다. 고이 접어 안아주는 청산과 나비의 관계는, 푸른색과 흰색의 대비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바다와 나비의 관계로 절어간다. 파르라니 깍은 3월의 청산인 줄 알고 바다에 내린 흰나비는, 급격한 기술발전과 지구 온난화 따른 세계 권력 질서의 재편 속에 시공간적 양극화와 인간소외를 향한 질주를 멈추지 않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은 아닌지. 우리는 허리를 흔들거리고 푸르게 펼쳐진 것은 모두 청 무우밭인 양 날갯짓을 하며 청 무우밭의 꽃을 꿈꾼다. 삼월의 서글픈 바다에서 흰나비의 아바타가 되어 온갖 허구와 유혹의 색으로 치장한 꽃을 찾는다. 꽃을 피우지 못하는 바다에서 나비의 날개는 파란색으로 절어 간다. 꽃을 피우지 않는 바다는 삼월에도 다음달에도 그리고 또 다른 계절에도 새파란 초생달로 피어날 뿐이다. 나비의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걸리면 흰나비는 파란 나비로 변하며 청산을 찾는다.

'공주처럼 지쳐서' 바다에서 돌아온 파란 나비. 바다를 향한 아름다운 비상을 이루지 못하고 무우밭으로 돌아온 나비의 ‘날개’와 ‘허리’는 방향과 의지의 상징이다. 설렘 같은 떨림으로 하얗던 나비의 몸은, 새파란 바닷물에 흠뻑 절어, 지쳐 돌아오는 파란 나비가 되어 저물녘 초생달과 함께 더욱 파랗게 비추인다. 아프도록 시린 모습이다. '바다'가 냉혹한 현실 또는 사실 같은 허구라면 '나비'는 꿈을 향한 방향과 의지의 표상이다.

우리와 함께 하는 3월의 임시공휴일은 달과 닮은 꼴이다. 로마인들은 라틴어 격언을 인용하여 ‘달은 거짓말쟁이다’라고 한다. 음력으로 매월 3~4일 정도 초저녁에 뜨는 달인 아미(蛾眉) 같은 초승달(초생달의 표준어:crescent moon)은 점점 커져가는 달이지만, ‘점점 작게’라는 뜻의 데크레셴도(decrescendo)의 약자인 D를 상징화하여, 점점 작아지는 달인 그믐달과 구분하기도 한다. 3월 이후 거짓말의 D화를 통한 진실의 C화를 그려 본다.

 

파피용(Papillon) / 자유 배달부 / 메타버스 / 이안류(離岸流)네

 철썩//써억철~햇살 바람을 마주 보며 나비는 달기둥에 눕는다. 젖은 날개를 말리다 잠이 든다. 꿈을 꾼다. 나비의 꿈~호접지몽(胡蝶之夢). 장자(莊子, 기원전 369년?-기원전 286년)의 제물론(齊物論)편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 호접지몽, 장자, Google
* 호접지몽, 장자, Google

“전에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그때는 분명히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로서 스스로 유유자적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다 갑자기 꿈에서 깨어보니 확실히 장주였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던 것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속에서 장주가 된 것인가? 분명한 것은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차이가 있으니, 이것을 물화, 즉 만물의 변화라고 하는 것이다.”(昔者莊周夢爲胡蝶, 栩栩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 周與胡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 <제물론(齊物論)>, 장자(莊子) -

장자는 나비가 되어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녔는데 깨어보니 꿈. 그런데 꿈속에서 나는 너무나도 생생한 나비였다. 비록 꿈에서 깨어났지만, 그는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물화(物化)’의 상태가 됐다고 한다. 김용훈(RTK News, 2021년)은 이를 이렇게 해석한다.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절대 경지에서 보면 사물과 나는 그냥 하나의 똑같은 자연일 뿐이므로 장자도 나비도, 꿈도 현실도 구별이 없다. 다만 보이는 것은 자연의 변화에 불과하다. 이처럼 너와 나(彼我)의 구별을 잊는 것, 혹은 물아일체의 경지를 비유해 호접지몽이라 한다. 이것은 장자 제물론의 핵심인 만물제동(萬物齊同) 사상이다. 즉 만물은 도(道)의 관점에서 본다면 모두가 가치가 있다‘라는 것이다. 나는 나대로, 나비는 나비대로 모두가 참이고 현실은 현실대로 꿈은 꿈대로 모두가 참인 것이다.” 또한 강신주는 《장자&노자:도(道)에 딴지걸기, 2013년》에서 장자의 만물제동 사상에 대한 ‘물화’에 대해 “장자는 나비가 되어야 할 때 분명 나비가 되고 장주가 되어야 할 때 분명 장주가 될 수 있는 ‘생성의 긍정’에 대해 말했다. 여기서 생성의 긍정은 타자와 만남을 긍정하고 타자와 소통하여 주체 자신의 변형을 긍정하는 것이다. 오직 타자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어느 때는 정말 장주일 수 밖에 없고, 어느 때는 정말 나비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장주와 나비의 분명한 구분에는 타자와 우연히 만나는 일이 분명하게 인식되어 있다.”라고 한다.

최근 디지털 DNA와 비대면 문화의 진화와 맞물려 현실과 가상의 교차로를 차지하며 메타버스(Metaverse)가 메가트렌드화 되고 있다. 메타버스 또는 확장 가상 세계는 가상 혹은 초월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우주 혹은 세상을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 ‘가상 우주’ 또는 ‘초월 세계’로 통칭되는 고도화된 가상의 공간 개념이다. 이는 닐 스티븐슨(Neal Stephenson)의 소설 '스노 크래시(SNOW CRASH, 1992년)'에서, 주인공인 히로(Hiro)의 명함 속 주소로 처음 등장한다. 생태계상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AR), 혼합현실(Mixed Reality, MR), 그리고 확장현실(eXpanded Reality/eXtended Reality, XR)의 상위 개념으로서, 현실을 디지털 기반의 가상 세계로 확장해 가상의 공간에서 모든 활동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시스템이다. VR에서 XR로 기술이 진화하고 상용화되면서 아바타를 내세워 몰입형 가상현실을 실현하는 메타버스와 그 접점을 점점 넓혀가고 있으나, 통상적인 의미로 메타버스는 사회⋅문화적인 의미에서 가상 사회를 지칭한다면, XR은 그런 가상 사회를 지탱하는 기반 기술적 성격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아바타를 향한 끊임없는 초대에 응하며 점으로써의 Bit에게 선~면의 데이터로 인식되어 가는 우리. 점~선~면이 향해 가는 마지막 역인 공간까지도 메타버스에게 내어 주려 하는 우리. 네모 상자 속을 바라보며 점점 더 현란하게 놀리는 손가락은, <승무>의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와는 다른 버스를 탄다. 지금 우리는 현실 속의 ‘나’가 아바타 인지, 메타버스 속의 아바타가 ‘나’인지 구분이 모호한 경계인으로의 삶에 대한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아니, 우리는 이미 아바타가 점령한 메타버스에 탑승 중이고, 양파 껍질과 같은 동심원을 하나둘씩 늘려 가며, 또 다른 메타버스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TV~Mobile Phone~Metaverse~Xverse.

호접지몽을 통해 장자가 우리에게 얘기하는 물아일체의 절대 경지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의 소통을 통한 끊임없는 변형과 생성으로 타아에 대한 자아의 고유성과 관계성을 가져갈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아바타와 메타버스로 대변되는 사물과 사물의 관계에 인간인 우리가 경계인이 되어 굳이 빗겨나간 ‘물화’의 개념을 고집하며 비집고 들어갈 이유는 없을 듯하다. 인간이 만든 수단인 허구의 서사에 빠진 노예가 되지 말고, 주도적 주인으로서 우리의 가슴에 마음의 문신을 새겨 보자. ‘파피용(Papillon)’.

 

* 파피용(Papillon)-악마의 섬(Devil’s Island), Google
* 파피용(Papillon)-악마의 섬(Devil’s Island), Google

‘메타버스 섬’의 이안류(離岸流, 거꾸로 파도)를 이용하여 자유를 향해 탈출하는 파피용은 철썩//써억철의 파도 소리를 들으며 외친다. “Hey, you Bastards, I'm still here!”. 달기둥을 베개 삼아 햇살 바람을 마주 보며 눕는다. <Free in a Bottle>이 철썩거리며 섬에 닿는다. <Free as the Wind>가 써억철거리며 바다로 나간다. 산과 들에 물이 오르는 물오름달, 3월. 자유 배달부 나비(Butterfly, Papillon)의 주소는 승무~바다 그리고 파피용(Papillon).

 

 

·최양국

격파트너스 대표 겸 경제산업기업 연구 협동조합 이사장

전통과 예술 바탕하에 점-선-면과 과거-현재-미래의 조합을 통한 가치 찾기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