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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봉준호 영화의 희생양들④-<옥자>의 '착한 괴물'과 자본주의의 폭력
[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봉준호 영화의 희생양들④-<옥자>의 '착한 괴물'과 자본주의의 폭력
  • 임정식(영화평론가)
  • 승인 2022.03.07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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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산골의 자연에서 생활하는 옥자와 미자.

봉준호 영화에서는 인물들의 수직, 수평 관계가 분명하게 나뉜다. 이때 수직적인 상하관계는 불평등한 계급 구조와 관련되며, 이 불평등은 폭력의 근원이 된다. 인물 간 관계의 불평등을 초래한 핵심적인 원인으로는 권력(계급)과 자본을 꼽을 수 있다. 권력의 경우에는 교수/강사, 관리자/직원, 국가(경찰)/시민으로, 자본의 경우에는 고용인/피고용인, 자본가/소시민으로 구분된다. <플란다스의 개>나 <살인의 추억>에서는 권력이 폭력의 주 원인으로 작동한다. <옥자>와 <기생충>에서는 자본이 희생양을 만들어낸다. 봉준호 영화를 발표 순서대로 정리해보면, 폭력의 주체가 국가에서 자본가로 이동한 점을 알 수 있다. 즉 최근작일수록 자본이 국가 권력을 대체하는 폭력의 근원으로 나타난다. 이 폭력은 재난을 불러오고, 무고한 희생양을 만들어낸다.

권력과 계급의 문제는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에서부터 선명하게 드러난다. 대학의 학장은 교수직을 미끼로 시간강사로부터 룸살롱에서 술 접대를 받으면서 오만방자한 행위를 거듭하고, 급기야 어느 강사는 교수와 술을 마신 후 지하철 사고로 숨진다. 대학 시간강사인 고윤주는 그 교수에게 5,000만 원을 상납한 뒤에야 교수로 임용된다. 반면 아파트 관리사무소의 여직원 박현남은 관리소장의 한마디에 실직자가 된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경찰/시민뿐만 아니라 형사들 사이에서도 계급에 따라 철저한 수직 관계가 형성된다. 또 <괴물>에서는 경찰, 언론, 병원과 같은 권력 집단과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이 동시에 작동해 희생양을 만든다.

<설국열차>는 국가 권력과 자본의 문제가 동시에 포함되어있는 영화이다. <설국열차>의 열차는 철저한 수직적 계급 구조로 구분된 세계이다. 최고 통치자 윌포드가 권력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고, 경찰과 교사 등이 중간 계급을 형성한다. 꼬리 칸의 민중들은 하층 계급이다. 연주자, 요리사, 티미처럼 꼬리 칸에서 앞칸으로 이동하는 인물들이 종종 있는데, 그들의 이동은 계층 상승이 아니라 노동력 제공을 위한 차출일 뿐이다. 칸과 칸을 구분하는 육중한 철문이 상징하듯, <설국열차>에서 계급 이동은 원천 봉쇄되어 있다. 꼬리 칸 사람들이 하층민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열차 탑승 시 무임승차를 했기 때문이다. 반면 고가의 승차권을 사서 탑승한 앞칸 승객들은 호화 생활을 누린다. 그래서 <설국열차>에서는 자본에 기반을 둔 국가 권력의 폭력이 제2의 재난을 가져온다.

 

눈빛으로 대화를 하는 미자와 옥자.

<옥자>에서는 자본의 힘이 폭력의 근원으로 작동한다. 탐욕에 물든 자본가와 순진무구한 인물의 갈등이 서사의 중심을 이룬다. <옥자>의 폭력은 표면적으로는 미란도 그룹 직원들이 옥자를 뉴욕으로 강제 이송하는 사건으로 나타난다. 옥자는 뉴욕의 실험실에서 강제로 짝짓기를 당하고, 육류 생산공장에서 가공식품으로 분해될 위기에 처한다. 옥자는 납치-짝짓기-분해라는 폭력과 재난을 잇달아 경험한다. 미자 또한 폭력과 재난의 희생양이다. 미자는 가난하고 연약한 산골 소녀로서 할아버지와 사는 인물이다. 그런 미자에게 가족이나 다름없는 옥자가 뉴욕으로 강제 이송된 것은 엄청난 재난이다. 이러한 폭력과 재난의 뿌리는 글로벌 화학식품 회사인 미란도 그룹의 CEO 루시이다.

옥자는 ‘착한 괴물’이다. 옥자와 미자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 교감하고 소통하는 관계이다. 옥자와 미자의 일상생활을 보여준 프롤로그의 에피소드는 원시신화의 세계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옥자는 희생양의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존재이다. 루시는 세계 식량난을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비밀 프로젝트를 진행해 슈퍼 아기 돼지를 만들고, 그 아기 돼지들을 전 세계 16개국에 보내 그곳에서 기르도록 하고, 10년 후 옥자를 데려간다. 루시의 이 행위는 계약에 의한 것이므로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미자와 옥자에게는 예상치 못한 재난이다. 특히 옥자는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하고, 짝짓기 실험 대상이 되고, 자동차 생산공장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공장에서 식품으로 재가공될 운명에 처한다. 옥자는 루시의 탐욕과 그 탐욕의 추종자인 과학자가 만들어낸 희생양이다.

<옥자>에서 자본가들의 부도덕한 행위는 3대에 걸쳐 나타난다. 루시는 할아버지가 세운 공장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초대 회장인 할아버지는 끔찍한 분이었다. 이곳에서 온갖 가혹 행위를 저질렀다. 이 공장 벽은 성실한 노동자들의 피로 얼룩져 있다.”라고 말한다. 할아버지의 기업 건설 과정에 끔찍한 노동 착취가 있었음을 실토한다. 그러면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썩어빠진 CEO”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기업가의 탐욕과 불법은 현재진행형이다. 실제로 루시의 언니 낸시는 독극물을 호수에 방류한 행위가 들통나서 CEO 자리에서 물러난다. 루시는 식량난 해결을 명분으로 내세워 대중을 기만하고, 불법을 서슴지 않는다. 루시 일가는 자본주의의 폐해와 부조리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미란도 그룹의 CEO 루시. 

루시의 행태는 할아버지의 기업 운영 방식과 다르지 않다. 루시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돈이다. 그래서 슈퍼돼지의 가치도 환경과 생명이 아니라 ‘맛’이 우선순위를 차지한다. 루시에게 슈퍼돼지는 맛이 뛰어나 잘 팔리는 신상품의 재료일 뿐이다. <옥자>에서 슈퍼돼지의 부위를 나누어 설명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낸시와 미자의 거래 장면도 마찬가지다. 미자는 ‘가족’인 옥자를 구하기 위해 황금 돼지를 대가로 지불한다. 반면 낸시가 황금 돼지를 받고 옥자를 내주는 행위는 거래일 뿐이다. “상품 배송을 철저히 하라.”는 낸시의 지시는 그의 가치관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동물학자 조니 윌콥스에 대한 해고 통지도 자본에 기반을 둔 고용인/피고용인의 권력 구조가 여전히 변화하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옥자>에서 미란도 그룹의 CEO는 낸시-루시-낸시로 바뀐다. 이 교체는 낸시와 루시의 범죄 행위 때문에 이뤄진다. 낸시는 독극물을 호수에 대량 방류했고, 루시는 슈퍼돼지들에게 가혹 행위를 했다. 하지만 CEO는 다른 계층의 인물로 대체되지 않는다. 루시와 낸시는 쌍둥이로서 번갈아 가며 CEO 역할을 담당한다. 처벌이라고 해야 일시적으로 CEO 위치에서 내려오는 것뿐이다. 루시와 낸시는 재난의 설계자이자 원인 제공자이지만 실질적인 처벌을 받지 않는다. <옥자>의 이러한 권력 이동 과정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할아버지-아버지로 이어진 자본가의 권력은 그들의 세계에서만 교체된다.

<옥자>에서 미자와 옥자는 자본주의라는 수직의 세계를 극복한 뒤 수평의 세계로 돌아간다. 대구를 이루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생태주의 담론으로 연결된다. 구체적으로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동물의 공존과 상생으로 표현된다. 미자와 옥자가 메트로폴리스 뉴욕의 지하 실험실과 포드시스템으로 운영되는 생산기지에서 탈출하여 강원도 산골 숲으로 돌아오는 여정은 봉준호 영화의 세계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의 행적은 집단 폭력의 디스토피아적 세계에서 자연, 공존, 상생의 유토피아적 공간으로 회귀하는 것이며, 슈퍼 아기 돼지는 그러한 미래 세계를 상징한다. 다만 미란도 그룹이 상징하는 자본주의 시스템 역시 공고하게 유지된다. 그러한 점에서 <옥자>는 인류 문명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영화이자 폭력의 역사가 응축되어있는 작품이다. 또 국가 대신 자본이 폭력의 근원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설국열차>와 <기생충>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완벽하게 대조적인 세계관을 지닌 루시와 옥자.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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