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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숭범의 문화톡톡] 절비는 아직 학교 옥상에 있다- <지금 우리 학교는>
[안숭범의 문화톡톡] 절비는 아직 학교 옥상에 있다- <지금 우리 학교는>
  • 안숭범(문화평론가)
  • 승인 2022.03.21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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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주권을 되찾았을 때, 한국의 1인당 연간 국민소득은 45달러에 불과했다. 국가 재건을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했던 1950년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해 3년 동안 국토 전역이 파괴되고 만다. 그 무렵 한국은 해외의 원조가 없이는 경제를 되살릴 밑천이 거의 없던 국가였다. 이를 감안하면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드라마틱하고 압축적인 변화가 있었음을 방증한다. 스탠퍼드 대학교 국제관계학 명예교수인 스티븐 크래스너의 말을 빌리면, 2차 세계대전 이후 피식민 상태를 벗어난 국가 중 경제적 부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룬 국가는 오직 한국뿐이다. 과거 서독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두고 명명된 ‘라인강의 기적’이란 수사가 한국의 상황을 두고 ‘한강의 기적’이란 용어로 재탄생한 것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국민 의식 개혁을 앞세운 정부의 강력한 리더십에 충성하며 한국의 전후(戰後)세대가 보여준 근면성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 결과 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가난을 탈출한 것은 물론, 풍요를 누릴 만한 경제적 기반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수출 지향 산업화를 통한 국가 주도의 강력한 경제성장 정책이 한국 사회에 긍정적 결과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경제성장의 가시적 지표가 나타나자, 한국인은 사회의 성장 동력이 우수한 인적 자원 확보에 있다는 확신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부모들은 자녀의 성공 여부가 학력 수준에 달려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입시 위주의 가혹한 교육 환경이 조성되었고, 대학 진학은 미래세대에게 인생을 걸어야 하는 도전이 되었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좋은 학벌을 갖는다는 건, 여전히 계층 이동 사다리를 오르는, 가장 확률 높은 방법이기도 하다. 지금도 소득 양극화에 따른 계층의 분화가 대학 서열화와 학벌주의 문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다는 진단은 어느 정도 사실이며,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OECD가 3년에 한 번씩 내놓는 세계 청소년 학업성취도를 기준으로 보면, 한국은 항상 최상위이다. 그러나 거기엔 다음과 같은 그림자가 존재한다. 대학 입시를 앞둔 한국의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들은 평균 5시간 정도 수면을 취한다. 대한민국 임금 근로자의 평균 임금이 320만원이고 4명 중 1명이 150만원 미만의 임금을 받는데, 서울 지역 고등학생 평균 사교육비는 109만원이다. 이 가혹한 환경에서도 한국의 대학진학률은 70%를 꾸준히 상회한다. 대졸 취업률이 65% 수준임에도 대학을 가야 한다는 건, 간단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할 수 있다면 더 높은 등급의 대학을 가야 한다는 의식은 종교적 열망 수준에 가깝다.

<지금 우리 학교는>은 팬데믹 이후 세계인이 실체험하고 있는 감염과 전염의 공포를 서사화하고 있다. 좀비 아포칼립스, 좀비 서바이벌 장르의 문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 학교는>을 장르적 쾌감에 충실한 장면들로 구성된 작품으로만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한국 사회 배면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그 작동 방식을 환기시키는 징후적 독해의 대상으로 보인다. 지면의 제약상 이 글에서 다루진 못하겠지만,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변곡점이 된 ‘세월호 사건’과 ‘5.18 민주화운동’ 등에 대한 기억을 우회적으로 자극하는 장면들도 존재한다다. 요컨대 이 글은 <지금 우리 학교는>이 반영론적 해석을 요청하는 특수한 학원물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것이다. 서사적 긴장감을 비약시키는 전염의 폭력성, 혹은 폭력의 전염성이 고등학교라는 장소에서 실험되는 이유에 주목해 논의를 전개해갈 것이다.

<지금 우리 학교는> 속 효산고는 미래세대를 규율하는 기성세대의 억압적 시스템이 작동하는 곳이다. 전염성을 가진 폭력이 출현 배경을 보면, 학폭 피해자인 자기 아들을 구원할 수 없는 아버지의 울분이 있다. 과학 교사 이병찬(김병철)은 자신이 재직 중인 효산고에 다니는 아들의 학폭 피해 상황을 개선시키는 데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불합리한 교육환경과 일신상의 안위를 따지는 교장 등 기득권의 벽은 두터웠다. 디테일하게 보면, 이병찬은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기엔 다소 아까운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천재 과학자로 그려진다. 장르 컨벤션에 부합하는 전형성을 가진 그는 한국 고등학교 환경이 낳은 프랑켄슈타인이다. 세상이 아들을 구원하지 못하자 그는 스스로 아들을 구원하겠다는 일념으로 의뭉스러운 실험을 거듭한다. 좀비 바이러스, 곧 ‘요나스 바이러스’는 그렇게 탄생한다. 이로써 작은 폭력이라도 그냥 넘기면 결국 더 큰 폭력에 지배당하는 세상이 될 것이라는 그의 선지자와 같은 경고가 현실화된다. 그의 자조적 표현에 따르면, ‘요나스 바이러스’의 확산은 한국 사회에 선재했던 “폭력의 시스템”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효산고에서부터 세상으로 퍼져나간 요나스 바이러스는 피에 대한 굶주림만 남은 유사인간의 끔찍함을 보여준다. 여느 좀비 서바이벌 장르가 의도하는 공포감, 곧 원초적 폭력성 앞에 압도당한 극단적인 인간상에 대한 두려움을 견인한다. 그런데 전염의 확산엔 교내 기성세대인 교장, 교감, 교사의 최초 폭력(학폭)을 대하는 불합리한 태도가 결정적 기여를 한다. 경찰 등 폭력 사태 해결을 감당했어야 할 학교 밖 기구들도 미온적으로 움직인다. 이처럼 <지금 우리 학교는> 속 기성세대는 미래세대의 사회화를 인준하는 학교 시스템의 유지와 그것을 둘러싼 기존 질서의 수호 외에는 관심이 없다. 누군가는 교실 안에서 계급 불평등의 피해를 겪고, 누군가는 학업성취도에 따른 차별을 경험하며, 누군가는 또래 학생에게 물리적 폭력을 당하지만 그것은 기존 질서를 보존해야 한다는 목적 앞에서 사소한 문제가 되고 만다.

 

학교 시스템을 둘러싼 이 견고한 질서. 그것은 학생과 학생, 학생과 제도, 학교와 사회, 미래세대와 기성세대 사이에 확립되어 있는 실존적 조건이고 서로 간의 상상적 관계다. 효산고에서 촉발된 ‘요나스 바이러스’는 한국사회 전반을 지탱하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공포스럽게 마주하게 하는 힘이다. 르네 지라르는 원시사회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면서 폭력에 의해 피가 나타나면, 이 피는 어디든지 침투하여 무한정 퍼져나간다고 말한다. 피의 유동성은 폭력의 전염성을 보여주며, 불순한 피에 의한 공동체의 오염을 순화시킬 수 있는 것도 희생물의 순수한 피라고 말한다. 그렇게 보면 효산고 학생들이 흘린 피는 한국 사회에 내재한 폭력의 전염성이 투사된 것이 아닐까. 효산고로부터 퍼져가는 사태를 책임져야 할 재난본부, 군대, 방송 언론 등의 행태는, 폭력을 뒤탈 없는 희생물에게로 돌리기 위한 선택과 실천의 과정이 아니었을까. 이처럼 <지금 우리 학교는> 주인공들의 ‘서바이벌’ 과정은 불합리한 사회적 이데올로기와의 대결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진정한 적은 엊그제까지 친구였던 좀비가 아니라, 더 음험하고 거대한 질서인 셈이다.

알튀세르는 권력의 형식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강제적 압력을 행사하는 공적 실체인 ‘억압적 국가 장치(RSA)’와 다양한 가치를 주입하며 사적 영역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ISA)’가 바로 그것이다. ‘억압적 국가 장치’에는 정부, 군대, 경찰, 법원, 감옥 등이 있고,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에는 종교 시스템, 교육 시스템, 문화적 기업과 방송·언론 시스템 등이 있다. 그렇게 보면 <지금 우리 학교는>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 중 하나인 학교의 비상식적 작동을 둘러싸고 다양한 국가 장치들 간의 시스템이 내부의 문제들을 드러내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알튀세르는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라면, 학교가 가장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는 <지금 우리 학교는>이 학원물로 만들어진 이유, 곧 한국 사회 시스템을 성찰하는 문제적 장소가 고등학교인 이유를 설명한다.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의 국가 장치들은 효산고 옥상에 살아남은 학생들을 구하지 못한다. 단지 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희생해야 할 존재들로 열외시킨다. 마지막까지 학생들의 편에 서려고 했던 교사 박선화(이상희), 주인공 남온조(박지후)의 아버지이면서 구급대 팀장으로 나오는 남소주(전배수), 사명감 넘치는 경찰 송재익(이규형), 이중적 해석이 가능하지만 종국에 가서 최소한의 양심을 지킨 군인 진선무(김종태) 등은 눈여겨 볼만한 장면들을 남긴다. 그러나 그들은 학교, 구급대, 경찰, 군대와 같은 ‘억압적 국가 장치’의 평범한 기능태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속한 집단 속에서 예외적인 희생과 열정을 보여준 개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예외성’이 억압적·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의 왜곡된 실체를 고발하는 셈이다.

‘K-좀비’ 학원물로서 <지금 우리 학교는>의 가장 특징적인 캐릭터는 ‘절비(절반만 좀비)’들이다. 절비가 된 윤귀남(유인수), 민은지(오혜수), 최남라(조이현)가 만들어내는 긴장감이 없었더라면 <지금 우리 학교는>은 대중적인 흥행 여부와 상관없이 평범한 좀비 학원물에 머물렀을 것이다. 과학 교사 이병찬의 말을 빌려 해석하면 그들은 ‘요나스 바이러스’가 인간의 의식까지 학습하면서 진화한 흔적이자 새로운 인류일 수 있다. 기성세대의 규율화의 의지에 의해 제물로 바쳐진 이들이면서, 그 희생대체의 폭력에서 살아남아 ‘가해/피해’의 성격을 한 몸에 지닌 그로테스크한 캐릭터다.

그들 중 최남라는 ‘시즌 2’를 끌고 가기 위한 모든 조건을 갖췄다. 그녀는 엄마의 ‘치맛바람’ 속에 학급 반장이 되었지만, 학업성적 1등이라는 목표에 충일한 삶을 살아온 아이다. 절비가 된 그녀는, 존재 자체로 기성세대의 폭압적 규율체계와 미래세대를 향한 기대를 위반하며 저항의 가능성을 내보인다. 최남라는 절비가 된 이후에야 효산고 생존 아이들의 진정한 학급 반장이 된다. <지금 우리 학교는> 중반을 보면, 기성세대에게 버려진 생존 아이들이 모여 효산고 옥상에서 모닥불을 피우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에서 아이들은 기성세대의 이데올로기가 작동하지 않는 시공간을 만들어낸다. 계급의 구별과 빈부 차별, 성적상의 우열이 사라진 정감적 공동체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최남라와 남온조를 비롯한 아이들은 이제 대학입시의 더 강한 압력을 이겨내야 할 고3이 될 것이다. 그들이 기성세대에 의해 부여된 과잉 경쟁의 부작용을 딛고 새로운 미래세대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폭력의 전염성을 감춘 채, 세상을 뜻대로 규제하며 살 수 있다고 믿는 기성세대를 위해 이 드라마의 마지막 신(scene)이 존재한다. 절비는 아직 학교 옥상에 있다.

 

 

 
·안숭범(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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