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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의 문화톡톡] 슈퍼 IP로서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존재 가치
[김민정의 문화톡톡] 슈퍼 IP로서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존재 가치
  • 김민정(문화평론가)
  • 승인 2022.04.04 1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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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스트릿우먼파이터 공식홈페이지
출처: 스트릿우먼파이터 공식홈페이지

 

 

남자의 여자에서 여자의 남자로

성경에서 신은 아담을 먼저 만들고 그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든다. 남자에서 여자로 이어지는 창조의 패턴은 유독 한국 예능 프로그램 제작에서 고수되어왔다. <무한도전>과 <무한걸스>, <라디오 스타>와 <비디오 스타>, <쇼미더머니>와 <언프리티 랩스타>… 불과 몇 년 전까지 여성 예능은 흥행에 성공한 남성 예능의 스핀오프로 제작되는 경향이 강했다. 그리고 이러한 탄생 배경 탓에 기존 포맷에 성별만 여성으로 바꾼 ‘아류’ 혹은 ‘B급’ 취급을 받곤 했다.

그런 의미에서 2020년 여름, E채널 <노는 언니>의 등장은 여성 예능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신호탄이었다. 그동안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단체 예능, 그중에서도 스포츠 예능에 여성을 주요 출연자로 구성한 최초의 프로그램이었다. 우려 섞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노는 언니>는 방영 직후 큰 화제를 모으며 여성 예능이 독자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2020년 시즌1에 이어 2021년 시즌2가 인기리에 방영되었고 같은 해 남자 스포츠 선수들로 구성된 스핀오프 <노는 브로>가 제작됐다. 2021년 여름, <노는 언니>는 방송 1주년을 맞이해 <노는 브로>와 함께 단합대회를 개최하며 ‘노는’ 세계관을 확장함으로써 대표적인 여성 예능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하였다.

 

여자, 판을 바꾸다

사실 <노는 언니>가 처음부터 탄탄대로를 걸었던 것은 아니다. 시작은 일회성 파일럿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시청자의 호응에 힘입어 정규 편성되었고 시즌제 예능으로 무사히 안착했다. 그동안 방송에서 볼 수 없었던 여성 운동선수들의 이야기, ‘여성’ 운동선수로서 고정관념과 편견을 극복하고 한 분야의 1인자로 거듭나기까지 그들이 참고 견뎌온 시간의 가치에 대중들은 깊이 공감했다.

2021년 화제작 SBS <골 때리는 그녀들> 또한 여성 출연진이 보여준 진정성의 힘으로 설 특집 파일럿 프로그램이 정규 편성 전환에 성공한 모범 사례다. 기획 의도는 축구에 서툰 여성 연예인들의 좌충우돌 재미있는 실수담이었다. 하지만 대중들의 호응은 즐거움이 아닌 감동에서 터져 나왔다. 일주일 내내 팀 연습과 개인 훈련에 매진하는 여자 개그맨, 여자 모델, 여자 배우의 투혼과 열정, 눈물과 땀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축구에 진심인 그들의 진지한 태도 덕분에 <골 때리는 그녀들>은 제작진의 방송 편집 조작 논란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의 변함없는 지지를 받으며 시즌 2가 방영 중이다.

2021년은 여성 예능의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여성 출연진을 내세운 프로그램들이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중 단연 최고의 흥행작은 2021년 겨울 방영된 M.net <스트릿 우먼 파이터>(이하 <스우파>)이다. 댄스 예능 자체가 비주류인 방송가에서 ‘여성 댄스 크루 서바이벌’ 포맷으로 전체 예능 화제성 지수 1위를 기록하며 독보적인 흥행 신화를 만들어냈다. 이례적으로 방영 중 우승 상금 액수가 상향 조정되기도 했다.

특히 <스우파>는 여성 예능을 넘어 예능의 장르 진화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적 사건으로서 주목할 만하다. 대중 투표 경연 미션을 발판 삼아 세계적인 흥행에 성공한 후, <스우파>는 방송 제작 관행대로 시즌제로 전환하는 길을 택하지 않고 <스우파>를 하나의 IP(지적 재산권)로 삼아 세계관 구축에 주력하였다. 10대 고등학생 여성 댄서를 주요 출연진으로 하는 <스트릿 걸스 파이터>를 제작하고 남성 성인 댄서를 내세운 <스트릿 맨 파이터>를 제작(예정)함으로써 댄서 캐릭터의 스펙트럼을 넓히며 ‘스트릿 댄스 유니버스’ 탄생을 예고하였다.

 

여자와 여자'들'

성공적인 IP의 자격 요건은 다양한 캐릭터에 기반한 견고한 세계관 창출이다. <스우파>는 독보적인 캐릭터를 기반으로 여성 예능의 벽을 넘어 ‘슈퍼 IP’로서 그 존재 가치를 확실히 증명하였다. 우선, <스우파>는 업계에서 손꼽히는 전문 댄서를 주요 출연진으로 구성하여 댄서 개개인의 캐릭터를 명확히 제시한다. ‘댄서들의 선생님’ 모니카, ‘걸스 힙합 창시자’ 허니제이, ‘영앤리치’ 리정을 포함해 방송에 참여한 여덟 명의 크루 리더들은 자기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가진다.

방송 초반, 댄스 크루 리더 여덟 명의 캐릭터에 관련된 서사는 그들 사이의 관계성을 기반으로 설정된다. 그룹 ‘환불원정대’의 안무 선정을 놓고 경쟁 관계였던 훅의 아이키와 라치카의 가비, 그리고 한때는 같은 크루였다가 해체하고 서로 다른 크루를 만들어 경쟁 관계가 된 홀리뱅의 허니제이와 코카앤버터의 리헤이가 대표적인 예다. 방송은 그들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전개해간다.

하지만 여덟 명의 주요 댄서들은 점차 캐릭터의 기본 설정값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자기만의 서사를 만들어간다. 그들은 각각 크루를 이끄는 리더로서 특유의 리더쉽을 선보이는데, 그 과정에서 각기 다른 스타일의 캐릭터가 구축된다. 프라우드먼의 모니카가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 장악력과 인솔력을 가진 ‘예술가형’ 댄서라면 그의 대척점에는 수평적 리더쉽을 선보이며 위트가 넘치는 퍼포먼스를 펼치는 ‘대중친화형’ 훅의 아이키가 있다. 소수의 출연자에게 스포트라이트가 편중되는 여느 ‘단체’ 예능과 달리, <스우파>는 다양한 캐릭터의 향연을 통해 풍부한 이야기성을 품은 새로운 개념의 세계관을 창출해낸다.

무엇보다 그 세계는 그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세계 창조라는 점에서 그 존재감이 더욱 도드라진다. 백댄서가 아닌 ‘전문 댄서’로서 그들은 자기들의 정체성을 새로이 정립한다. 가수 제시의 안무 창작 미션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프라우드만의 모니카는 복면의 동양 여전사 컨셉을 기획하여 가수의 얼굴을 복면을 가림으로써 댄서가 돋보일 수 있는 안무를 창작한다. 이때 안무는 노래를 뒷받침해주는 보조 역할이 아닌 하나의 독자적인 예술로 승격한다.

 

리스펙트의 여성 서사

<스우파>는 방송에 출연한 여덟 팀의 댄스 크루가 매 순간 상대를 이기지 못하면 프로그램에서 하차하는 서바이벌 방식으로 진행된다. 팀별 혹은 개인별로 이루어지는 배틀에서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언프리티 랩스타>로 대표되는 기존 여성 예능은 무한경쟁의 시스템에 ‘여자의 적은 여자다’라는 정형화된 프레임을 덧입혀 여자들 간의 신경전 혹은 감정싸움에 초점을 맞춘 연출을 선보이곤 했다.

하지만 <스우파>는 기존 여성 예능 패턴에서 벗어나 같은 댄스씬에서 함께 노력해온 댄서로서 경쟁할 땐 경쟁하고 연대할 땐 연대하는 공생(共生)의 모습을 강조한다. 물론, 이러한 서사 패턴의 변화는 제작진이 아닌 출연자인 여성 댄서들의 자발적 의지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스우파>의 창조적 역동성은 더욱 빛을 발한다.

극 중 ‘약자 지목 배틀’은 자신이 댄스 대결에서 이길 수 있는 약자를 골라 배틀을 신청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약자 지목은 약육강식의 생태계에서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힘의 논리를 적용해 배틀 신청 상대에게 모욕과 멸시의 ‘노 리스펙트’ 딱지를 붙이는 행위로 가시화된다. 약자를 지목하고 약자로 지목당한다는 것, 그 행위 자체만으로 이슈몰이하기에 충분히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며 기존 여성 예능에서 무한 반복하고 답습해왔던 여성 혐오 프레임을 견고히 할 소지가 있다.

그러나 약자 지목 배틀은 제작진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방영 당시 가장 큰 화제를 모았던 배틀은 코카앤버터의 제트썬과 프라우드먼의 모니카의 댄스 대결이다. 제트썬은 가장 연장자이자 ‘댄서들의 선생님’인 모니카를 약자로 지목하여 배틀을 신청한다. 그녀의 선택 이유는 ‘노 리스펙트’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모니카가 배틀 강자라는 명성을 듣고 한번 배틀로 붙고 싶다는, 순수한 도전 의식에 의한 선택이었다. 명배틀로 온라인상에서 자주 회자되는 허니제이와 리헤이, 립제이와 피넛의 약자 지목 배틀도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스우파>는 서로 죽고 죽이는 치열한 전쟁에서 한 명의 영웅이 탄생하는 무한경쟁의 이야기가 아니다. 꿈과 도전으로 가득 찬 흥미진진한 모험 서사인 동시에 상호 존중과 인정에 근간을 둔 따뜻한 (유사) 가족 드라마다.

 

유사 가족 드라마

유사 가족이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이지만 한 곳에 거주하며 깊은 유대관계를 형성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스우파>의 댄서들은 같은 댄서 씬에서 활동하며 여성 댄서로서 어려움을 함께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끈끈한 유대감과 강한 소속감을 느낀다. 혈연관계가 선험적이고 필연적이라면 유사 가족 관계는 선택적이고 자율적이다. 이때 자유 의지는 강력한 권리행사인 동시에 무거운 책임 의식을 수반한다.

<스우파>는 댄서들의 경연을 평가하는 ‘저지’(Judge)가 전문 댄서가 아닌 아이돌 가수이거나 아이돌 출신 안무가라는 점 때문에 방송 직후 판정 시비가 주기적으로 대두되었다. 하지만 온라인상의 격렬한 논쟁과 달리, 실제 당사자인 댄서들은 심사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는 한편 승패를 떠나 그 안에서 자기만의 서사를 만들어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출연 댄서 중 가장 연장자인 모니카와 허니제이는 ‘워스트 댄서’ 선정 배틀이라는 굴욕적인 무대를 앞두고 “잘 봐, 언니들 싸움이야”라는 선언을 통해 여성 댄서들이 만들어갈 새로운 세계의 출연을 공고히 한다. 스스로를 ‘언니’라고 칭하는 두 사람은 연예인 심사위원과 그들의 불합리한 판정, 그리고 그에 따른 불공정한 승패 결과와 무관하게 오로지 여성 댄서들만이 주인공인 감동적인 가족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이때 <스우파>의 무대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축소판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여성’과 ‘백댄서’라는 두 겹의 소수자성은 누구나 가슴에 품은 자기만의 소수자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폭넓은 공감대와 열띤 호응을 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렇게 여성 댄서들은 자신들에게 덧입혀진 불합리한 시스템의 굴레에서 벗어나 ‘언니’들이 만들고 ‘여동생’들이 살아갈 세상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선보인다.

 

언니가 여동생을 키우는 법

<스우파>가 출연진 스스로 새로운 세계를 이룩해낸 ‘각본 없는 드라마’였다면 <스우파>의 스핀오프로 제작된 <스걸파>는 성공한 세계관에서 파생된 ‘각본 있는 드라마’다. 10대 여고생을 대상으로 하는 <스트릿 걸스 파이터>(이하 <스걸파>)는 ‘저지’ 대신 ‘마스터’에 의해 오디션이 진행된다. 마스터는 <스걸파>에 출연한 리더 댄서들을 중심으로 구성되며 각기 자신의 팀에 속할 10대 여고생 크루를 선발한다.

마스터들은 자신의 팀과 댄스 혈통이 유사한 10대 크루들을 선발하고자 하는데, 이는 그들을 제2의 훅, 혹은 제2의 라치카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다. 각 크루별로 최적화된 멘토링을 해주기 위함이다. 때문에 팀 홀리뱅에 속한 10대 크루 ‘브레이크 엠비션’과 ‘앤프’가 마스터 허니제이의 댄스 스타일과 지나치게 유사한 퍼포먼스를 선보이자 높은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혹평을 받고 하위에 랭크된다. 마스터와 구별되는 10대 크루만의 독창성 개발은 <스걸파>가 단순히 <스우파>의 스핀오프, 즉 기존 포맷에 나이대만 고등학생으로 바꾼 ‘아류’ 혹은 ‘B급’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주요 포인트다.

독립적인 콘텐츠로서 <스걸파>의 독창성은 캐릭터뿐 아니라 서사를 만들어가는 방식에서도 <스우파>와 확연히 구별된다. <스우파>가 새로운 세계를 향한 꿈과 도전이 가득 찬 흥미진진한 모험 서사라면 <스걸파>는 지속 가능한 세계관 확장을 위한 성장 서사를 보여준다.

<스걸파>는 여성 단체 예능인 동시에 10대 여자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기존 걸그룹 선발 오디션과 많이 비교된다. 특히 오디션에서 중요시 다루어지는 ‘예쁨’, 즉 정형화된 여성상으로서 ‘예쁜 소녀’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별화를 확실히 한다. 정확히 말하면 예쁨에 대한 요구는 있으나 예쁨이 요구되는 영역이 다르다.

트레이드 안무 미션에서 클루씨는 상대팀이 소화하기 어려운 황당한 안무를 주어 상대 팀의 패배를 유인하는 작전을 구사한다. 이에 마스터들은 단순히 이기는 것이 아닌 경쟁과 연대를 통해 좋은 퍼포먼스를 선보일 것을 강조하며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동시에 10대 댄서들이 경쟁자이자 동료 댄서로서 상호발전적인 관계가 될 수 있도록 미션에 임하는 태도를 재정립해준다. 이름하여, ‘예쁜 경쟁’. 여기에서의 예쁨은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서의 성취물이다. 즉, <스걸파>의 ‘예쁜 경쟁’은 <스우파>에서 강조된 ‘리스펙트’의 자매품이다.

<스걸파>에서 실패는 실패가 아니다. 실패는 또 다른 도전의 시작일 뿐이다.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아마존은 탈락 소감에서 <스우파>에서 만나자는 희망찬 다짐으로 새로운 미래를 약속한다. 이처럼 <스걸파>은 <스우파>의 세계관 반복이 아닌 세계관 확장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며 언니와 여동생이 함께 창조해낸 ‘스트릿 댄스 유니버스’를 향한 무한 기대를 품게 한다. 물론, 그 유니버스의 중심에는 댄스 테크닉이 아닌 지난한 삶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영혼의 기술을 가르친 ‘스트릿 우먼 파이터’들이 있다.

 

 

·김민정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한 사람이 한 권의 책'이라는 생각으로 문학과 문화, 창작과 비평을 분주히 오가며 나만의 장르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에세이 <언니가 있다는 건 좀 부러운 걸>(2021), 드라마비평집 <당신의 밤을 위한 드라마사용법>(2020) 드라마이론서 <당신의 삶은 어떤 드라마인가요>(2018), 논픽션<한현민의 블랙스웨그>(2018), 소설집 <홍보용 소설> (20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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