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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부르는 4월의 노래
고흐가 부르는 4월의 노래
  • 최양국 l 문화평론가
  • 승인 2022.04.04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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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ry, starry night ~(중략)~. 
이제야 난 알아요, 당신이 내게 말하려 했던 걸
온전한 정신으로 살기 위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그들을 자유롭게 해주려 얼마나 애썼는지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죠, 어떻게 듣는지도 몰랐죠 
어쩌면 이제는 들을지도 
별이, 별들이 빛 나는 밤 
눈부시게 타오르는 불꽃 같은 꽃들 
보랏빛 아지랑이로 소용돌이치는 구름
빈센트의 푸르른 눈동자에 비쳐오죠.”

- <빈센트(Vincent)>(1971), 돈 맥린(Don McLean)

 

나무들이 잎을 돋우는 잎새달 4월. 잎보다 먼저 꿈이 일어난다. 겨울눈(冬芽)의 꿈이 노란색으로 피어난다. 노란색은 봄을 맨몸으로 터트리며 색칠해 간다. 색과 빛의 삼원색으로 어울리며 퍼져간다. 양립할 수 없는 낮과 밤, 삶과 죽음, 참과 거짓, 승자와 패자, 그리고 고흐와 고갱까지도 안는다. 산수유가 팝콘처럼 터져 가는 날, 트래블 버블(Travel bubble)을 타고 예술 공동체의 상징인 프랑스 남부 아를(Arles)을 찾아 고흐를 만난다. 

 

<노란 집> 공동체 추구와 퇴색

 

 

고흐가 체류한 아를에는 그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있다(그가 산책을 즐긴 카페에 그의 그림이 놓여있다), 2022.3 - 정락석

아를의 달은 눕고 집이 일어난다. 파란 하늘을 빠져나온 햇살이 몽환적 황금색의 그림자로 찾아오면, 별이 떨어진 군청색(Ultramarine) 그늘은 노란색으로 덮여간다. 노란 집이다. 이 노란 집은 아를에서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가 살던 집이며, 그의 공동체를 향한 꿈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작품 중 하나인 <노란 집>(1888)의 실재하는 장소다.

고흐는 모국인 네덜란드를 떠나 예술의 도시인 파리에서 화가로서의 성공을 꿈꾼다. 1년 6개월 동안 주로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새로운 화풍과 색채를 시도하며 활발히 활동한다. 하지만 기대와 다르게 어긋나가는 주관적 자아에 대한 실망과 객관적 타아에 대한 관계 설정에 서툴렀던 그에게 파리는 회색 겨울의 암울함으로 밀려온다. 결국 정신 및 육체적으로 피폐해진 상태에서 음울한 파리를 떠나 1888년 2월에 남프랑스의 아를에 도착한다. 그해 5월, 아를의 경이로운 노란 햇빛 아래에서 그림을 그리며, 파리에서부터 시도한 화가 공동체의 실현을 위해 고흐는 아를의 라마르틴 2번가에 있는 2층집으로 이사해 외관을 노란색으로 단장하며 꿈을 현실화하고자 한다. 

미술 칼럼니스트 박희숙(<The Science Times> 칼럼, 2009.4.)에 따르면, 고흐는 다음과 같이 노란 집을 묘사한다. “오늘 나는 이 건물의 오른 채에 세를 들었다. 방이 네 개 있는데 두 방에는 캐비닛이 갖춰져 있다. 볕이 잘 드는 집의 외부는 금방 만든 버터빛깔 노란색으로, 창틀은 진한 녹색으로 칠했다. 집은 광장으로 나 있는데 거기에 플라타너스와 협죽도, 아카시아 등 초록의 나무들이 우거진 공원이 하나 있다. 집의 내부는 모두 흰색으로 칠했고 바닥엔 붉은 타일을 깔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눈부시게 푸른 하늘이 있다. 이 집에서 나는 진실로 살 수 있고, 숨 쉬고, 생각하고, 그릴 수 있다.”

고흐가 새로운 희망을 가꾸기 위해 생각했던, 화가들의 공동체 설립 꿈을 구체화하고자 한 공간, 노란 집. 고흐는 가장 먼저, 파리에서 만난 고갱(1848~1903)에게 그 계획에 함께할 것을 요청한다. 고갱은 당시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원시 자연과 가까이서 호흡하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타히티로 가기 위한 재정 확보를 위해 일시적이나마 고흐의 노란 집에 동참하기로 한다. 고흐는 화가 공동체 형성을 통해 각자가 그린 그림은 구성원 공동체 소유로 하고, 공동의 힘으로 그림을 판매해 그 돈을 나눠 각자 생활을 유지하는 공동체를 가꾸고자 한다. 하지만 고흐는 노란 집에서 고갱과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화가 공동체의 꿈이 이룰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결국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화가로서 유지해야 할 최소한의 생계유지와 추구하는 지속적 작품 활동을 보장하고자 하는 꿈은 실현되지 못한다. 그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고흐 개인으로부터 온다. 동생 테오의 결혼 이후 재정적 지원의 어려움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과 함께, 존중과 배려의 대상이었던 고갱과의 갈등이 심화시킨 정신 및 육체적 쇠약에서 온 환각 증세의 악화에 있다. 화가로서의 열정 이외에 외모와 기질은 물론 추구하고자 하는 화풍에서도 이견을 보이며, 화가 공동체라는 문에 진입도 하기 전에 두 달 남짓한 짧은 동거는 파국으로 끝난다. 

또 다른 근본적인 이유는 고흐가 추진한 화가 공동체의 생태적 다양성과 어울림에 대한 동력의 부족이다. 아를의 경이로운 햇살과 함께하는 노란색의 집은, 화가 공동체를 지향하는 색상의 상징성을 나타낸다. 한편, 일방향적 단일성의 한계도 고스란히 드러낸다. 고갱을 포함한 다수 화가의 참여를 통한 가치의 공유를 위해서는 다양한 기질과 화풍을 아우르는 다양성이 전제돼야 하는데, 고흐의 내성적이며 충동적이기도 한 이상적 낭만성은, 같은 사조(후기인상주의) 내에도 너무나 다른 개성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게 한다. 

또한 공동 참여와 분배라는 공동사회적 성격의 공동체 형성은 노란 집 참여 이후 화가로서 나아갈 길에 대해 각자가 바라는 이정표와 병행을 위한 해법 제시를 버겁게 한다. 이는 공동체에 대한 화가의 참여와 지속가능성장을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태생적 한계로 작용한다. 

 

태양 꽃 <해바라기>와 세대 바라기

아를의 노란 집 지붕이 햇비의 물방울로 일렁이는 오후. 물방울 너머에서 무지개를 꿈꾸며 콧등이 반듯하고 콧수염과 구레나룻을 기른 사내가 해바라기를 바라보며 그림을 그린다. 정물화 <해바라기>. 원래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은 두 가지 버전이 있다. 그 첫 번째는 파리 시절에 그린 바닥에 놓여있는 해바라기(1887)이며, 두 번째는 아를 시절에 그린 꽃병에 담긴 해바라기(1888)다. 태양의 황금빛 노란 햇살이 가득한 아를로 이사한다.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꽃인 해바라기를 연작 및 사본으로 여러 작품을 그린다. 노란색으로 단장한 아를의 집에 노란색 해바라기를 화실 가득 채운다. 

<해바라기>는 고흐가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고통의 시기를 지날 때, 대상인 해바라기를 통해 순수하고 강렬한 지향점으로써의 태양에 대한 숭배와 색채, 특히 희망의 발현을 상징하는 노란색에 대한 열망을 가득 담고 있는 작품이다. 그가 ”태양의 화가“나 ”해바라기 화가“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에게 있어서 노랑은 무엇보다 열린 희망을 의미하며, 당시 그가 시도하고자 한 공동체에 대한 기쁨과 설렘을 반영하는 색이다. 또한 유화를 두껍게 칠한 질감에 의해 고도의 입체감을 표현하며 해바라기 특유의 강한 원형력과 생명력을 자신의 분신인 듯 드러낸다. 대부분 노란색의 통일된 색조로 그리되, 화분에는 노란색과 대비되는 파란색을 사용해 자신의 서명(Vincent)을 남기고 있다. 

이는 남부 지방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길에 대한 긍정적 희망의 메시지를 대변하는 노란색, 그리고 화가로서 성공하기 위해 벨기에를 떠나 파리에 진출한 후, 자신의 내면적 정체성으로 굳어지는 우울·고독·슬픔을 상징하는 파란색을 대비한다. 노란 집에서의 공동체적 동거가 불안한 시기에 고갱이 그린 <해바라기를 그리는 고흐>(Van Gogh Painting Sunflowers, 1888.12)는, 고흐를 바라보는 고흐 자신과 고갱의 엇갈린 시선을 자화상을 통해 서로 맞대어 비교한다. 고흐(평생 40여 점에 이르는 자화상을 그림)에게 있어서 자화상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극복하며 무언가를 추구하는, 순수하고 강렬한 욕망의 표출을 담은 내면적 가치 표현의 자기 고백적 수단이다. 

반면 고갱의 고흐 자화상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구도로 인해 초라하고 자신 없어 보이는 고흐를 멸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듯하다. 지향점이 다른 두 사람의 갈등은 자화상을 매개체로 둘 사이를 더욱 멀어지게 하고, 공동체를 향한 꿈도 스러지게 된다. 

무지개 환영(幻影) 너머 피어 나는 해바라기는 우리들의 꿈과 희망의 상징이다. 해바라기의 학명(Helianthus)은 그리스어로 태양을 뜻하는 ‘Helios’와 꽃을 뜻하는 ‘Anthos’가 합쳐진 것이다. 즉 ‘태양의 꽃’이라는 의미다. 꽃말은 지역에 따라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숭배’ 또는 ‘경배’(Adoration)를 뜻한다. 향일화(向日花:해를 향한 꽃)의 순우리말인 ‘해바라기’는 ‘해’라는 지향점을 가진다.

고흐의 노란 집처럼 모든 공동체는 해바라기와 같은 지향점을 꿈꾼다. 동서남북 중 가야 할 방향을 바라볼 수 있는 지향점이 필요하다. 지향점이 없으면 우리의 욕망을 향한 위도와 경도를 찾지 못하고 지향점이 다르면 우리의 욕망은 갈등으로 흔들린다. 그 소용돌이의 장 한가운데에 공동체라는 배를 같이 타고 항해하는 세대 간 또는 세대 내 갈등이 있다. 세대의 분류(베이비부머~X/Y/Z~MZ세대등)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꾸만 늘어난다. ‘수저계급론’, ‘N포 세대론’, ‘꼰대론’, ‘젊꼰론’, ‘젠더론’ 등 다른 세대 또는 구성원에 대한 비판・혐오와 자기 비하성 ‘밈(Meme)’ 문화가 만연한다. 편 가르기식 이기주의, 존중과 배려 없는 승자독식주의를 향한 악순환을 반복하며 공동체 구성원 간의 불안한 동거를 심화한다.

요즘 우리는 사실을 향하는 낮과 밤~삶과 죽음의 가치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오직 허구를 향한 참과 거짓~승자와 패자의 다양한 욕망 게임의 결괏값에만 몰두한다. 소속감과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지속적인 상호 작용을 해야 하는 우리들의 진정한 바라기는 무엇일까? 각 좌표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동서남북 통합형 바라기.

 

<별이 빛나는 밤> 나선형 성장과 세대 겨울눈

아를의 집이 눕고 별이 피어난다. <별이 빛나는 밤> (The Starry Night, 1889)은 고흐 말년 무렵, 정신 질환으로 인한 고통의 끝자락에서 자연에 대한 마음의 지극한 연결을 표현한 그림이다. 노란 원형 속 그믐달~까맣게 치솟은 나무(사람과 하늘의 매개체 형상)는 하늘 구름의 소용돌이와 함께 꿈틀거린다.

밤하늘 속에서 빛나는 별의 풍경은 상중하의 삼단으로 나뉘어 고흐와 함께한다. 상단(하늘과 달)~중단(구름과 지평선)~하단(마을과 땅)~상중하단(나무와 사람). 땅 위의 사람이 나무를 통해 하늘의 별로 연결돼 있는 모습이다. 소용돌이치는 듯한 심리 상황과 정신적 에너지의 고갈은 그믐달의 하강 이미지로 이어지며, 사이프러스 나무를 통한 빛나는 별과의 연결을 표현한다. 마치 고흐의 죽음을 통한 별나라 여행을 암시하는 듯하다.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2020)에서 마틴 베일리는 <별이 빛나는 밤>에 대해 “고흐가 자신 앞에 놓인 시련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라고 말하며, 1889년 생폴드 모졸의 정신요양원에 입원하기 몇 개월 전에 고흐가 쓴 ‘별’에 대한 단상을 소개한다. “별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늘, 지도의 검은 점들을 보며 도시와 마을을 꿈꾸듯이 그렇게 소박하게 꿈을 꾼다. 우리가 기차를 타고 타라스콩이나 루엥으로 가듯 우리는 죽음을 통해 별로 간다.~(중략)~. 살아 있는 동안은, 죽은 사람이 기차를 탈 수 없듯, 별에도 갈 수 없지.”

선명한 보색 대비를 통한 강렬한 색채감, 하늘~사람~땅을 아우르는듯한 공간력, 흔들리듯 꿈틀거리는 원초적 생명력은 별을 향한 순환론적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특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굽이치는 하늘 구름은 중앙에 이르러서는 넘쳐흐르듯 꿈틀거리는 나선형으로 이어진다. 연속적인 듯 비연속적이고 동적인 듯 정적인 터치는, 양립할 수 없는 낮과 밤의 에너지가 상호 교차하며 충만하기만 한 삶의 에너지로 승화하는 듯하다.

우리들 공동체 내 세대 간 또는 세대 내 각 좌표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동서남북 통합형 바라기는 나선형 성장을 필요로 한다. 상반되는 힘과 힘이 부딪치는 갈등의 장에서, 각자 다른 단선적 직선형 성장의 추구는 허구를 좇는 참과 거짓 게임에 둘러싸인 승자와 패자만을 남길 뿐이다. 승자는 태양계속 화성을 바라보며 우주 개발에 대한 꿈을 현실로 만들어 가는 라이트(Wright) 3형제의 초대를 받아 짧은 느낌표를 남기겠지만, 패자는 설국열차의 마지막 칸에서 앞칸으로 나아가며 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우리는 소용돌이 치는 장의 한가운데에서 공동체라는 배를 내려서는 안 된다. 고흐와 같은 자연에 대한 마음의 지극한 연결이 필요하다. 세대 역할에 대한 고정 관념을 넘어 더 소중한 가치 공유를 위해 직선형 라테~꼰대~젊꼰이 아닌 나선형 라테~꼰대~젊꼰을 향한 밈(Meme)의 진화가 필요하다. 직선형은 일방향성 악순환으로 ‘나’를 떠난 ‘너’가 없으나, 나선형은 양방향성 선순환으로 ‘나’와 ‘너’가 함께한다. 세대 간 또는 세대 내 다양성이 뜰~들~숲의 꽃으로 번져가는 어느 봄날의 별을 바라보며, 나선형 성장을 향한 퀴즈를 푼다.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세대와 구성원이 고유하게 지닌 에너지는 또 다른 세대와 구성원을 위한 “그 무엇”이다. 이것은? 잎보다 꽃이 먼저 피어 나는 나무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그 무엇”은 “겨울눈‘이다. 이제는 우리 각자가 세대를 아우르는 공동체를 향한 지극한 겨울눈이 돼야 하지 않을까? ’나‘는 ’너‘를 위한 꽃눈과 잎눈, ’너‘는 ’나‘를 위한 잎눈과 꽃눈. 별이 빛나는 잎새달의 밤. 고흐가 어린왕자의 별 B612에서 부르는 <4월의 노래>를 듣는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 부노라
아~ 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 <4월의 노래> 2연, 박목월 작시 김순애 작곡

 

노란 집의 뜰, 그리고 들~숲속 해바라기는 비바람에 눕지만, 태양을 향해 일어나서 별을 부른다. 시간 회귀와 세대 생태계를 상징하며 그렇게 눕고 일어나며 부른다. 

 

 

글·최양국
격파트너스 대표 겸 경제산업기업 연구 협동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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