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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의 문화톡톡] 우리는 왜 지금 윤리를 이야기하는가 (下) - 영화 <증인>과 <나의 특별한 형제>를 중심으로
[김민정의 문화톡톡] 우리는 왜 지금 윤리를 이야기하는가 (下) - 영화 <증인>과 <나의 특별한 형제>를 중심으로
  • 김민정(문화평론가)
  • 승인 2022.05.02 10: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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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 포스터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 포스터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왜 함께 살아야 하는가

 

기존 장애인 영화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사는 세상을 감동적으로 그리는 데서 영화가 끝난다. 그건 영화 <증인>도 마찬가지다. 연대가 아닌 연대에 이르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긴 하였으나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진행된다는 점에서 기존 장애인 영화와 유사한 결말을 맞이한다. 그런데 생일파티가 끝나고 친구들이 집으로 다 돌아가고 나서 영화 <증인>지우는 어떤 저녁을 보냈을까. 순호와의 연락도 점점 뜸해지고, 그러다가 어느덧 지우를 헌신적으로 돌봐주던 엄마는 늙어 세상을 먼저 떠나고, 그렇게 우리가 알던 사람들이 다 사라지고 나면 지우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장애인 영화에서 장애인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비장애인은 대부분 가족이다. 영화 <맨발의 기봉이>기봉옆에는 욕쟁이 엄마가 있고, 영화 <말아톤>초원옆에는 엄격하지만 속은 따뜻한 엄마, 아빠와 남동생이 있다. 그리고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진태옆에는 죽은 엄마 대신 그를 돌봐줄 의붓형이 있다. 가족이 아닌 비장애인도 등장하지만 그들은 가족관계인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연대가 깊어지는 데 도움을 주는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 뿐이다. 이처럼 장애인 영화는 장애 극복을 통한 장애인의 성장영화이면서 가족애를 그린 홈드라마의 형식을 지닌다.

그런데,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에는 가족이 없다. 가족이 진짜 없거나 있어도 없는 것처럼 그려진다. 무엇보다 영화 속 두 주인공들의 관계가 가족이 아니다. 그것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아닌 장애인과 장애인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함께 살아야 한다라는 기존 장애인 영화의 메시지는 등장인물 설정에서부터 성립이 불가능이다.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의 주인공 세하는 지체 장애인으로 총 세 차례 혼자 남겨진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자꾸 벌어지는 것일까. 무엇을 위한 사건이고 이것들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는 장애인과 소통하고 교감하며 도움을 줄 비장애인이 없다면 장애인은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라는 현실적인 가정에서 시작한다.

엄마가 죽고 삼촌에게 버림받은 세하는 사회복지법인 책임의 집에서 다른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한다. 그곳은 가족에 의해 버림을 받거나 위탁이라는 또 다른 버림에 의해 혼자가 된 장애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하지만 가족처럼 장애인들을 돌보는 신부님과 사는 그들의 모습은 기존 장애인 영화처럼 평화롭게 그려진다. 문제는 신부님이 죽고 그들만 남겨졌을 때 발생한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후원금도 끊기고 신부님도 없는 상황에서 책임의 집은 강제 폐쇄되고, 수십 년 동안 함께 살았던 가족 같은 장애인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각기 다른 시설로 보내진다. 왜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함께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장애인은 스스로 자립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눈물바다가 된 그들의 이별 장면 앞에서 관객들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함께 살아야 한다는 말 속에 담긴 장애인을 향한 비가시적 차별을 인지하게 된다.

슬라보예 지젝은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객관적 폭력’, 상징적 폭력구조적 폭력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주관적 폭력과 싸우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체계 속에 내재된 폭력을 견고히 하는 주관적 폭력의 가해자 역할을 하는 자들의 위선을 비판한다. “하루아침에 생판 남하고 사는 게 얼마나 엿 같은 줄 알아요?”라는 극 중 세하의 대사는 나태하고 안일한 우리의 윤리의식에 균열을 일으키며 우리를 성찰의 자리로 내몬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함께 살아야 한다장애인은 비장애인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얼핏 비슷한 말로 보이지만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함께 사는 삶에 대하여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는 두 장애인의 연대를 통해 함께 사는 삶에 대한 재정의를 관객에게 요청한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 존재의 형식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극 중 세하는 갑자기 나타난 동구의 가족들과 동구는 누구와 살 것인가에 관한 문제로 법정 다툼을 벌인다. 5살 정신연령의 동구는 수영장에서 엄마에게 버려져 시설에서 살게 된 지적 장애인으로 세하와는 수십 년 동안 책임의 집에서 함께 살며 형제처럼 지낸 사이다.

영화는 세하와 살던 활기찬 동구의 예전 모습과 친엄마와 살게 된 동구의 무기력한 현재 모습을 시간 간격을 두고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거동이 어려운 지체 장애인 세하는 식사를 하거나 화장실에서 용변을 볼 때, 그리고 휠체어를 타고 외출할 때 모두 동구의 도움을 받았고 동구의 가족들은 세하가 자신의 편의를 위해 지적 장애인 동구를 이용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동구를 집으로 데려온 엄마는 일 안 해도 돼. 여기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라고 말하며 지적 장애인인 동구를 자신이 운영하는 음식점 카운터 옆에 가만히 앉혀 둔다. 과연 어떤 삶이 진정 동구를 위한 것일까. 가게에 불을 내고 사람들이 혼란한 틈을 타 예전에 세하와 살던 책임의 집에 찾아가는 동구의 모습에서 관객들은 자신의 지평으로 타자를 환원하려 했던 자아 중심적인 주체로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깊이 반성하게 된다.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에서 말하는 함께 산다는 것은 동정과 연민의 수직적 관계가 아닌 상호보완적인 수평적 관계를 의미한다. 모든 인간은 서로 돕고 산다. 도와가며 사는 것이 삶이고 인간의 본질이다. 장애인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비장애인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기에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자신이 동구를 이용했다고 몰아붙이는 동구의 가족들에게 세하는 장애인의 삶이 아닌 인간의 삶에 관한 문제로 환원하여 답변한다. “내가 동구를 이용했다면 동구도 나를 이용한 것이고 내가 동구를 도왔다면 동구도 나를 도운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같이 살아온 겁니다.”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는 세하와 동구가 사는 임대아파트에 비장애인 수영선생님 미연이 찾아와 함께 식사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기존 장애인 영화의 장애인들이 장애 극복의 과정을 거쳐 사회 구성원으로서 성장과 성숙의 장으로 진입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것만이 내 세상>진태는 교회와 집에서 나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광장에서 피아노를 치고, <>경우는 커튼 쳐진 암흑의 집에서 나와 브라질에서 개최하는 장애인 올림픽에 국가대표 유도선수로 출전하고, <말아톤>초원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라톤대회에 참가해 사람들과 함께 달린다. 그런데 왜, 세하와 동구는 오히려 사람들을 떠나 자기들만의 집으로 들어온 것일까.

악셀 호네트는 인정투쟁에서 개인의 자기 정체성(Identität)’은 사회적으로 규정된 또는 타인에 의해 기대된 목적격 나와 대상화되지 않은 어떤 자발성으로서의 주격 나의 긴장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고 말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각 개인을 단지 공동체의 구성원이 아니라 사회과정 속에서 개성화된 주체로 확증하는 상호인정이다.

동구는 수영에 재능이 있긴 하지만 특출나진 않고,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세하는 똑똑하지만 매사에 비관적이고 신경질적이다. 기존 장애인 영화의 주인공들과 달리, 세하와 동구는 절대적 선으로 그려지지 않고 신비화되지도 않는다.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으로 그들은 목적격 나로 굳어진 규범적인 자화상에서 벗어나 한 개인의 개성적인 자화상인 주격 나로 나아간다. 영화가 시작하고 끝날 때까지 세하는 세하고 동구는 동구. 그들은 그냥장애인이자 평범한 사람으로 자리한다. 그렇게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따로 또 같이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어간다.

 

장애인이란 이름으로

 

특수학교에서 발생한 성폭행 사건을 다룬 영화 <도가니>를 기억하는가. 소설 원작자 공지영은 광주인화학교 성폭력 사건의 마지막 선고가 있던 날 법정 풍경을 그린 스케치 기사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집행유예로 석방되는 그들의 가벼운 형량이 수화로 통역되는 순간 법정은 청각장애인들이 내는 알 수 없는 울부짖음으로 가득 찼다.” , 이때 청각장애인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은 침묵인가. 이것은 분명 손짓에 의해 발화되었기에 침묵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으므로, 정확히는 아무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이것은 침묵이 분명하다. 침묵이 아닌 침묵. 그것은 발화되지 못한 침묵보다 더욱 가혹한 침묵이다.

<증인><나의 특별한 형제> 두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법정에 선다. 그리고 하나의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장애인이다. 나는 지우. 나는 세하. 나는 동구. 그런데 가 한 사람씩 다 호명되고 나서도 관객들은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순호는 재판을 다 망쳐놓고 로펌에서 해고당하진 않았을까. 아버지가 친구 보증을 섰다가 빚을 떠안았다고 했는데, 빚을 다 갚을 수는 있는 것일까. 스크린 밖 순호의 삶은 스크린 안 취준생 미연의 일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동안 쥐뿔도 없지만 그냥 센 척했다는 그녀는 세하에게 한 마디 툭 건넨다. “못 걷는 건만 억울한 거 아니에요. 계속 걷는데 제자리걸음하는 거 그것도 개억울해요.”

, 여기서 조금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비장애인순호와 미연의 소리 없는 아우성은 침묵인가 아닌가. 이것은 언제든지 발화될 수 있으므로 침묵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도 보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으므로 이것은 침묵이 분명하다. 침묵이 아닌 침묵. 그것은 또 하나의 강요된 침묵이다.

스크린 안과 밖에서 헐벗은 타자의 얼굴을 하고 주체의 자리에 서 있는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주체인가 타자인가. 장애인을 향한 질문들이 우리에게 돌아와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관객들은 우리 주변에 있는 다양한 모습의 소수자와 약자 들을 목격한다. 순호에게는 파킨슨병을 앓는 아버지와 이혼하고 혼자 딸을 키우는 싱글맘 친구가 있고, 법정에서 순호와 대립 구도를 형성하는 검사에게는 자폐가 있는 형과 그 가족들이 있다. 또한, 스크린 밖에서 남몰래 숨죽이고 있던 우리에게는 아들 병원비가 필요해 집주인을 죽인 가사도우미와 돈 때문에 아들에게 살해당한 홀몸노인, 그리고 나의 특별한 형제미연이 있다.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가득 찬 법정에서 우리는 이제 들리지 않던 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던 얼굴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또 다른 얼굴의 우리다. 순호 아버지는 홀로 지내는 아들에게 말한다. “남자라도 괜찮다. 사람이면. 사람 혼자는 너무 외로워.” 그들은 나의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나의 안’, 즉 나의 슬픔, 아픔, 그리고 상처받을 가능성에서 나온다. 우리는 그렇게 소수자가 되고 약자가 된다. 오늘도 우리는 법정에 서 있다.

나는 장애인이다.”

 

 

·김민정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한 사람이 한 권의 책'이라는 생각으로 문학과 문화, 창작과 비평을 분주히 오가며 나만의 장르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에세이 <언니가 있다는 건 좀 부러운 걸>(2021), 드라마비평집 <당신의 밤을 위한 드라마사용법>(2020) 드라마이론서 <당신의 삶은 어떤 드라마인가요>(2018), 논픽션<한현민의 블랙스웨그>(2018), 소설집 <홍보용 소설> (20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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