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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아의 문화톡톡] 그림책 『엄마』에 대하여: 식물과 동물에 대한 은유와 사유
[김시아의 문화톡톡] 그림책 『엄마』에 대하여: 식물과 동물에 대한 은유와 사유
  • 김시아(문화평론가)
  • 승인 2022.05.02 10: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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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을 가꾸는 여성은 매일 경과를 기록해야 한다. 정원에 식물을 심거나 뽑아내고, 씨를 말리거나 뿌리고, 거름을 주듯이, 우리는 심리 안에 깃들어 있는 생각과 감정 등을 때로는 없애기도 하고 북돋기도 해야 한다. 마음속의 정원은 명상의 장소이기도 하다. 무엇을 없애고 무엇을 살릴지, 언제 수확할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은 물론, 위대한 야성적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그 리듬에 맞춰 사는 법을 알려준다. 그리하여 삶과 죽음이 자연의 섭리임을 배우고, 주기적인 야성을 획득하게 된다.” (클라리사 에스테스, 2013:121)

 

필자에게 그림책은 문학과 예술이 만나는 정원이자 ‘현실에서의 유토피아’이다. 일상의 리듬에서 잠시 벗어나는 곳. 물리적으로 흘러가는 크로노스적인 시간을 잠시 멈추고 그림책을 통해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다. 글로 발화된 화자의 목소리는 듣기 쉽지만 그림으로 하는 말은 여러 번 오랫동안 봐야 할 때가 있다. 상징과 은유가 익숙한 언어와 문화가 아니면 작가가 말없이 말하는 소리를 듣기 위해 더 많이 들여다봐야 한다.

최근에 번역·출간된 그림책 『엄마』를 그린 엠마뉴엘 우다의 그림은 많은 상징과 모티프가 독자의 궁금증을 자아내며 계속 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초현실주의적인 스타일로 그린 그의 그림은 아름다운 동시에 기이하다. 엄마의 하이브리드(Hybrid) 한 모습과 양면적인 모티프가 동시에 존재하니 초현실주의 예술이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 낯설게 다가갈 수도 있지만 옛이야기와 신화적인 모티프가 독자의 상상력을 확장시킨다.

 

식물에 대한 사유

 

Ⓒ 엠마뉴엘 우다, 스테판 세르방
Ⓒ 엠마뉴엘 우다, 스테판 세르방

 

“엄마는 꽃잎처럼 아주 예민해.

완전히 정원으로 된 세계야.”

 

『엄마』는 엄마를 신화화하지 않고, 희생을 강조하지 않고 엄마의 다양한 감정과 모습을 보여준다. 글을 쓴 작가 스테판 세르방이 남성이라 어린 남자아이를 그릴 법도 하지만 그림을 그린 엠마뉴엘 우다는 화자인 아이를 여자아이로 그렸고 어머니와 딸에게 헌정한다. 글에서 말하지 않는 부분을 상징과 은유로 재해석한 엠마뉴엘 우다의 그림은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작가가 스위스 알프스의 높은 산이 있는 발레주 마을에서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영향인지 그의 그림엔 꽃과 다양한 식물, 동물, 새들이 배경과 패턴으로 등장하여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엄마는 예민해서 “야생 풀, 칼루나, 라일락, 엉겅퀴” 같은 사람이기도 하다. 여기서 꽃말을 찾아보면 라일락은 소중한 사람을 뜻하고 엉겅퀴는 독립적이고 고독한 존재를 뜻하기도 한다. 게다가 칼루나, 라일락, 엉겅퀴는 유용한 약초처럼 약으로 쓰는 식물이다. 독자가 식물의 의미를 알고 나면 그림책의 해석은 더 풍요로워지며 의미는 단단해진다. 나무와 꽃과 풀은 각각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 이름을 알고 있을 때 언어는 풍요롭다.

식물 세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말하지 않고 보여주거나 말없이 말하는 걸 보여준다. 그림책도 식물의 세계를 닮았다. 그림책은 글로 말하기도 하지만 그림으로 아주 많은 것을 직접적으로 발화하지 않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수지 작가가 글자 없는 그림책으로 한스 크리스티앙 안데르센 상을 탄 것도 그림이라는 보편적인 언어와 이야기가 전 세계의 독자에게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모성애가 강한 동물에 대한 사유

 

Ⓒ 엠마뉴엘 우다, 스테판 세르방
Ⓒ 엠마뉴엘 우다, 스테판 세르방

그림책 『엄마』에서 좋아하는 장면을 꼽으라면 아이와 엄마가 하얀 여우 굴에서 잠을 자는 편안하고 따스한 장면이다.

 

“엄마는 겨우내 여우 굴속에 숨어 지내.

나도 여우 품 안에서 따뜻하게 지내지.

마치 천 년쯤 지난 것 같아.”

 

동물들이 겨울잠을 자는 것처럼 사람도 자연의 리듬에 맞추어 살 수는 없는 걸까?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치고 힘들 때, 안전한 ‘여우 굴’에 들어가 쉴 수 있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편안함을 준다. 여우는 모성애가 강한 동물이다. 그러나 인간은 여우에게 교활함의 이미지를 덧씌워 위험한 동물로 그리는 경우가 많다. 늑대도 부성애와 모성애, 공동체성이 강한 동물이다. 반면 인간은 전쟁을 일으켜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종교와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사람을 학살하는 때론 동물만도 못한 짐승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오만함은 여우와 늑대를 두렵고 악한 존재로 그리며 동물도 차별하고 혐오한다. 이것은 원초적인 신성한 어머니 이야기의 원형을 가지고 있는 ‘늑대 이야기’가 기독교의 영향으로 차츰차츰 변형된 탓이기도 하다. 중세 시대 프랑스에서 공수병에 걸린 개가 사람을 공격하자 늑대의 소행이라 몰아가며 늑대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가 퍼지기 시작했다. 12세기, 마리 드 프랑스는 「비스끌라브레」 시에서 늑대 인간을 등장시켰고 근대로 접어들며 서양의 환상문학에서 보름달이 뜰 때 변신하는 늑대 인간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로마 건국 신화 로물루스와 레무스 이야기를 보더라도 늑대는 인간에게 젖을 주어 기른 이탈리아의 상징적인 동물이다. 늑대는 삶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길들여지기’를 거부하고 본능대로 살아가는 직관력을 가진 동물이라고 한다. 심리학자 클라리사 에스테스는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에서 이러한 원형적인 야성적 은유로 ‘늑대 이야기’에 주목하며 여성들이 내면의 야성적인 여성성을 회복하여 새로운 삶을 개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대한 동의를 엠마뉴엘 우다는 『엄마』에서 그림으로 말없이 보여 주고 있다.

베란다 정원에서 키우는 식물은 야생성을 잃어버려 물을 너무 많이 주거나 적게 주면 금세 시들고 죽는다. 이처럼 부모의 부족한 사랑뿐만 아니라 엄마의 지나친 사랑과 희생도 아이를 망칠 수 있다. 남녀 차별이 심한 사회에서 아이에 대한 집착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요된 충·효 사상은 아이의 본성을 죽이고 복종하는 사람으로 자라나게 해서 비주체적인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여성이든 남성이든 ‘길들여지기’를 거부하고 야성을 회복하는 일이 일상에서 무수히 일어나는 사고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직관적인 힘을 기르는 방법이 아닐까? 자살을 예방하는 근본적인 방법이 아닐까?

 

 

· 김시아 KIM Sun nyeo

문학·문화평론가. 파리 3대학 문학박사. 대학에서 문학과 그림책을 가르치고 연구하며, 『기계일까 동물일까』 『아델라이드』 『에밀리와 괴물이빨』 『세상에서 가장 귀한 화물』 『엄마』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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