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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경의 시네마 크리티크] <루이스 웨인: 사랑을 그린 고양이 화가 The Electrical Life of Louis Wain> ; 빈티지 찻잔에 담아 낸 치유의 차, 그러나…
[김 경의 시네마 크리티크] <루이스 웨인: 사랑을 그린 고양이 화가 The Electrical Life of Louis Wain> ; 빈티지 찻잔에 담아 낸 치유의 차, 그러나…
  • 김 경(영화평론가)
  • 승인 2022.05.11 09: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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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억압의 증상- 고양이 그림

예술가에 대한 전기는 대부분 드라마틱하다. 관객은 예술가의 특별한 직관과 남다른 열정에 매혹된다. 이런 드라마틱한 매혹은 대부분 극단적으로 강조되기 때문에 전기 서사로 작품화 되는 예술가에게는 흔히 정신병적 증상이 부각되기도 한다. 이는 낭만주의 시대 예술을 특징짓는 반항, 소외, 고통, 광기 등이 아직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데다가 예술가에게 있어서 병적인 열정은 여전히 호기심과 관음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고 이것이 상업적으로도 유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반려묘 피터와 함께한 전기 충만한 시절
반려묘 피터와 함께한 전기 충만한 시절

이 모든 것을 갖춘 영화 <루이스 웨인: 사랑을 그린 고양이 화가>(윌 샤프Will Sharpe, 2022)는 1860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서 고양이 그림으로 명성을 얻은 괴짜 화가 루이스 웨인 (베네딕트 컴버배치 Benedict Cumberbatch 연기)에 대한 전기 영화다. 19세기 낭만주의와 빅토리아 시대의 억압이 교차하던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루이스 웨인의 생애는 그가 그린 고양이 그림을 통해 ‘발화發話 parole’되었고, ‘증상으로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억압과 증상에 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루이스 웨인의 생애와 동시대라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프로이트 Sigmund Freud가 1956년생이니 루이스 보다 4년 일찍 태어났다.) 프로이트나 라캉 Jacques Lacan의 정신분석학에서는 억압을 신경증을 특징짓는 임상 구조로 본다. 여전히 논란 중이지만 실존 인물 루이스가 조현병 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다. 다만 영화를 만드는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루이스에게 증상이 있다고 말한다. 증상에 대한 의심도 덧붙인다. 더 나아가서 주요 인물 모두에게 신경증을 부여한다. 루이스의 노처녀 누이, 캐롤라인(안드레아 라이즈보로 Andrea Riseborough 연기)은 히스테리 증상이 있고, 마리는 조현병 진단을 받는다. 자궁의 증상이라고 보는 히스테리에 방점을 찍듯이 여동생의 초경이 급작스럽게 클로즈업되고, 에밀리(클레어 포이 Claire Foy 연기)는 치유자로 나서서 다독거려주며, 그 치료와 응원에 힘입어, 히스테리적으로 울던 여자아이가 “여자가 됐다”고 웃으며 외치는 장면은 코믹하고도 의미심장하다. 이런 소소한 과정을 거쳐 가정교사 에밀리는 이 가족에게 어느덧 치유자가 되기 시작한다. 캐롤라인에게는 자신에게 위로가 된다는 고향의 돌로 진정제로 선물한다. 돌 진정제도 어찌나 효과가 빠른지, 쇼트 한 장 내에서 빠른 치료를 보여주어 코믹하긴 마찬가지지만- 표정변화를 한 쇼트안에서 다 보여줄 수 있었던 건 안드레아 라이즈보로의 뛰어난 연기덕분이다- 캐롤라인이 숨을 거두는 마지막까지 소중히 보관해 놓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돌멩이 쇼트를 보면 에밀리가 꽤 의미 있는 진정제를 처방한 것이 틀림없다. 에밀리는 어린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한 공수증 hydrophobia이 있음을 고백하는 루이스에게는 자신도 갇히는 꿈을 반복해서 꾼다고 하여 레포 Rapport를 형성한다. 모든 정신적 치료의 첫 단추는 강한 레포 형성이니 이후 에밀리는 루이스에게 사랑하는 사람으로써 최선의 치료자가 된다. 외톨이 괴짜인 루이스를 이해해주고 사랑해주는 것 자체가 치료였겠지만 반려묘 피터를 가족으로 들여 암에 걸린 자신의 고통때문에 겪게 될 루이스를 위로한다. 그는 점차 반려묘 피터와 동일시하면서 더 ‘전기’를 보는데 빠져들었고, 수 많은 고양이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에밀리 곁을 지킬 수 있었다. 고양이 그림이 신문에 실리고 뜻밖에도 대중의 허용과 관심을 받으며 그는 비로소 대중과의 ‘소통’을 느꼈으며, 그동안 억압되어 있던 증상도 치유도 표면으로 모두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결국 에밀리 사후 루이스는 병적 증후를 보이기 시작한다. 루이스에게 나타나는 증상은 프로이트 정신분열증의 교과서라고 할 만큼 다양하다. 고양이격과 인격, 자아와 타자가 분리가 안되며, 사람이 고양이로 보이고 고양이가 사람으로 보이는 착시, 환시, 환청, 분노장애, 악몽, 강박 등이 그것이다. 프로이트의 유명한 명제, ‘증상은 기억의 상징이다’ 혹은 ‘환자는 말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증상으로 말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루이스가 천착한 고양이는 그의 말하지 못한 증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는 억압의 시대에 고양이 그림이라는 증상으로 말을 했던 화가였고 그의 반려묘, 피터는 에밀리와의 사랑에 대한 기억의 상징이 됐다.

 

전기electricity를 그리다

 

루이스와 에밀리가 함께 전기를 보다
루이스와 에밀리가 함께 전기를 보다

첫 장면. 병원에 입원해 있는 초췌한 루이스 웨인의 눈빛은 형형하게 살아 있다. 이 그 눈빛은 수미쌍관의 구조로 영화 후반부 빈곤자 병원의 웨인 눈빛에서 한 번 더 빛난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 이 첫 장면을 되새기게 한다. 그의 눈에 담긴 ‘전기electricity’를.

영화 전반부, 1881년, 21세의 젊은 루이스 웨인이 기차에서 만난 댄 라이더(아딜 악터 Adel Akhtar 연기)는 영화 후반부, 1925년, 빈곤자 병동 감찰 신분으로 입원해 있는 루이스 웨인을 다시 만나게 된다. 루이스 웨인은 댄 라이더에게 “여긴 고양이가 없어요. 바깥도 못 보고...”라는 짧은 말을 겨우 이어가지만, 댄은 그 두가지가 그에게 얼마나 가혹한지 알았고 그가 고양이를 키워도 되는 좋은 시설의 병원으로 옮길 수 있게 도와준다. 그에게 고양이 그림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도입부 실화라는 자막과 함께 남성 나래이션은 뉴스 앵커 톤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화가 루이스 웨인은 자신만의 고양이를 만들었습니다. 고양이 세상을…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루이스는 인생을 바쳐 우리의 삶을 더 행복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고양이 친화적으로 고양이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것과 더불어 우리의 세상을 더 낫게 바꾸었지요.” 그가 고양이 그림을 통해 이룬 것은 고양이 애호가들이나 고양이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고양이 그림을 통해 발화한 그의 증상과 치유를 통해 억압된 자신과 세상을 더 낫게 한 것이다. 그가 전기를 그리기 위해서는 고양이가 아니라 다른 무엇 이어도 무관했으리라. 그는 ‘전기’를 보았고, 전기가 없는 것은 그릴 수 없었다. 고양이는 ‘전기’고 ‘에밀리’며 ‘자기자신’이다. 그가 고양이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사람들과 동일시하여 ‘의인화된 고양이’를 주제로 삼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나레이션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루이스 웨인에게 전기는 다른 무언가였기 때문이다. “비범하고 기묘하고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그 무언가 신비로운 자연의 힘 이자 이따금 대기 중에 아른거리는 빛 이자 삶의 가장 심오한 비밀을 여는 열쇠였죠.” 다층적 의미를 가진 ‘전기’는 빅토리아 시대 과학과 혁신의 산물인 전기부터 웨인의 전기까지 압축적으로 설명된다. 넷플릭스 드라마 <기리/하지>(2019)로 감각적인 영상을 보여 준 바 있는 젊은 감독 윌 샤프는 그가 느끼는 ‘전기’를 표현하기 위해 조명과 카메라 속도 조절을 통해 그 순간을 포착하려 한다. 에밀리와 사랑을 나누던 시절의 서정적이고 따뜻한 조명과 색감, 전기를 느꼈을 때의 드라마틱한 카메라 속도, 열린 렌즈 그리고 광기와 슬픔을 드러내는 기억 속 무섭게 넘쳐 흘러나오는 물과 사각 앵글들이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달달한 신혼 부부 루이스와 에밀리가 만나는 부드러운 빛은 홀로 병원을 걸어 나와 자연 속에서 만난 빛과 동일하다. 동일한 배치, 동일한 빛, 동일한 자연풍광으로 촬영된다. 빛과 자연 속에서 다시 ‘전기’를 보았을 것이다. 그의 애묘 피터도, 그가 평생 잊지 못할 에밀리도, 그리고 그녀가 남긴 숄의 한 자락도 그에게는 ‘전기’다. 에밀리가 그를 프리즘이라 표현한 것도 알고 보면 그녀가 ‘빛 같은 전기’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등장할 때 마다 조명은 섬세하게 그녀를 위해 배치된다. 그녀는 빛과 함께 움직이고 말한다. 좁은 그녀의 방안에서도 빛은 움직이고 우리의 시야를 가렸다간 보여줌으로써 그녀의 전기를 역동적으로 만들어준다.

 

꽃액자에 담는 빛
꽃액자에 담는 빛

루이스와 에밀리의 ‘전기’를 담은 정점은 빛과 자연과 꽃으로 장식한 프레임에 두 사람이 마치 인증샷을 함께 만드는 것처럼 마지막 빛을 담아두는 장면이다. 이제 그들에게서 그 전기가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그 빛의 정점에 불안이 담긴다. 그래서인지 그 둘은 눈을 감는다. 이 장면 이후 빈티지한 아름다운 조명과 색감은 퇴색하기 시작하고, 마지막에 루이스가 자연 속의 충만한 빛 속으로 걸어 나올 때까지 계속된다.

 

증상과 치유라는 전제에 대한 합리적 의심

이 영화의 매력은 묘하게 전복적이라는 점이다. 표면적으로는 히스테리, 조현병, 악몽, 망상, 과도한 고양이 동일시, 트라우마 등을 모티브로 삼아 주인공은 물론 주변 인물들까지 거의 모두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이것은 증상이 아니라 증상이라 섣불리 판단하는 소통불가의 또 다른 억압이라고 강변하는 것 같다. 누가 환자고 누가 아니며, 어디서 부터 치료해야 할 증상이고 어디 까지가 허용 가능한 증상인가. 어떤 진단의 잣대에 놓이느냐에 따라 감금의 증상이 달라질 수 있다. 병원에 입원 격리된 루이스의 형형한 눈빛을 수미쌍관으로 강조한 것도 그같은 것에 대한 함축된 메시지일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심각한 증상이 현대에는 열정이나 전기 일 수 있고, 때로는 현대까지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의 일상은 매일 증상과 치유가 반복되는 나날 이기도 하다. 운명의 짝이 치유과정을 통해 사랑의 확신을 주기도 한다. 루이스와 에밀리처럼. 어린 시절의 심리적 갈등이 증상을 통해 상징적으로 나타난다는 정신질환, 정신신경증은 이제 여러 서사에 흔히 나오는 클리셰 cliché 가 되고 있다. 이러 저러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해 왕따가 되고 문제아가 되고 범죄자가 된다는 식이다. 이런 다소 진부할 수 있는 에피소드도 진정성과 아름다운 영상문법이 뒷받침된다면 언제나 아름답다. 루이스와 에밀리는 루이스의 구개구순염을 통해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혹은 수염이라는 억압으로 가린 증상과 그 치유의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이 영화에 언급되는 대부분의 정신병은 보이지 않지만 구개구순염은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증상이다. ‘전기’는 보이지 않지만 가려진 흉터는 수염만 제거하면 쉽게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상처와 치유를 시각화 하여 압축하기 좋은 모티브였을 것이다. 드라마<파친코>에서 선자의 아버지가 같은 증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닐 듯 하다. 얼굴에 남긴 증상은 드러내 놓고 일생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면도 시퀀스’는 서정적인 피아노 선율을 배경으로 치유의 과정에 깃든 정성처럼, 루이스 인생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경배처럼, 의식을 치르듯이 묘사된다. 슬로우 모션과 트래블링 인, 클로즈 업, 빈티지 한 소품과 필터링 된 조명으로 부드럽고 느리게 시각과 시간을 확장시킨다. 수증기 가득한 욕실에서 면도칼은 수술칼처럼 그의 수염을 제거하고, 서서히 상처가 드러난다. 루이스가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쉬는 장면은 바로 자기 내면의 트라우마로 디졸브 Dissolve 된다. 어린 루이스가 잠옷을 입은 채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은 로우 키 조명 low-key light의 사각斜角 앵글 Oblique Angle로 아이리스 쇼트 Iris Shot에 담긴다. 이 영화에서는 기억과 트라우마가 주로 아이리스 쇼트로 장면화Mise-en Scene된다. 영화적 배경이 되는 시간대와 영화 역사의 초창기가 동시대인지라 초창기 무성영화 문법에 대한 오마주 Homage로 사용하기도 했겠지만 아이리스 원형 안에 갇혀 있는 과거라는 중의적 의미도 담겨있을 것 같다. 역시 그 다음 이어지는 아이리스 쇼트에서 아이들에게 따돌림당하는 외로운 어린시절의 모습. 그는 그 모습들을 수염으로 감추고 살아왔지만, 이제 사랑하는 에밀리에게는 조심스럽게 드러낸다. 이후 둘이 연인에서 부부까지 진행되는 서사는 애틋하고 아름답다.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에밀리는 루이스의 치유자로서 가르치고 간섭하고 관계를 주도하지만 (심지어 에밀리는 그 둘의 첫만남을 상기시키는 숄 조각을 가위로 잘라 루이스의 스케치북 갈피에 꽂아 놓아 사후에도 영향을 미친다. 물론 그 영향이 마지막에 그를 또 한 번 치유한다.) 빅토리아 시대의 가정교사라는 건, 모든 시대의 학교와 교사가 그러하듯이 학습을 통해 규칙을 가르치는 또 다른 억압적 구조 재생산 조력자들이다. 그런데 그가 아이들에게 그림 수업을 하려는 그녀에게 단 한 번 조언한다. “그림에서 가르쳐야 할 규칙은 하나 뿐이에요. 보는 것.” 그것도 에밀리 방의 문 밖에서 낮은 소리로. 그는 ‘전기’를 보았고 ‘전기’를 그렸다. 다른 모든 규칙은 이제 무의미하다. 그가 본 전기를 제외한 모든 규칙은 억압일 뿐이다.

증상에 대한 영화의 시선은 애매모호하다. 빅토리아 시대적 편견으로 여전히 그를 증상으로 보는가 하면 그것은 편견이었다고 고백하며 그는 처음부터 증상이 아니라 ‘전기’를 본 것이라고 얘기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모든 예술가 전기서사가 그러하듯이 작가와 감독이 그를 선택한 순간, 우리는 그 서사의 예술가 주인공과 쉽게 동일시된다. 그렇다면 그가 고양이와 동일시했듯이 우리가 그가 된다면, 스스로 증상이 있다고 할 것인가 ‘전기’를 느끼고 있다고 할 것인가. 전기를 볼 지, 증상을 볼 지. 다시 우리 몫이다.

 

 

글·김 경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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