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안숭범의 문화 톡톡] 이것은 중력에 관한 이야기이다 - <파친코>론
[안숭범의 문화 톡톡] 이것은 중력에 관한 이야기이다 - <파친코>론
  • 안숭범(문화평론가)
  • 승인 2022.05.16 09: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파친코 한국 포스터 (공식 홈페이지)
파친코 한국 포스터 (공식 홈페이지)

 

<파친코>는 중력에 대한 이야기이다. 극중 조선인 4세대로 나오는 솔로몬은 미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이중의 타자라는 사실을 대면하는 중 ‘중력’에 대한 언급을 하곤 한다. 주지하듯, 중력이란 거대한 질량을 가진 지구가 잡아당기는 만유인력과 평소 느낄 수 없지만 자전에 의해 발생하는 원심력을 포함한다. <파친코>의 서사무대에 작동하는 중력도 크게 두 가지 차원으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만유인력은 ‘자식’, ‘가족’이라는 혈연 공동체를 향한 강렬한 애착의 강도로 확인된다. 한국인 중 많은 수는, 국경 내 이웃이 형제애(fraternity)를 공유한 균질한 혈연 공동체, 곧 단일민족이라는 신화적 관념을 갖고 있다. 이러한 관념은 20세기 초, 일본에 의해 식민 경험을 하는 중 더욱 예민하게 자각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파친코> 속 1세대(선자의 부모), 2세대(선자)는 ‘자식’과 ‘가족’, 혹은 ‘혈연’과 ‘민족’의 구심력을 절절하게 보여준다. 특히 선자는 젊은 시절, 서글픈 디아스포라의 현실을 견디면서 피식민자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끌어안게 된다. 그녀가 피식민자를 향한 식민자의 ‘주변화의 압력’을 견딜 수 있었던 힘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책임감으로부터 나온다. 그녀는 그 힘으로 ‘호모 사케르(조르조 아감벤)’, ‘몫이 없는 자(기욤 르 블랑)’에게 예고된 삶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파친코>에 나타난 원심력, 곧 중력의 두 번째 차원은 미국을 경험한 후 도쿄와 오사카를 오가는 솔로몬을 통해 확인된다. 그가 좇는 돈과 성공에 대한 욕망은, 그의 일상적인 선택과 실천의 순간을 규율한다. 그의 활동 배경이 되는 1989년은 일본의 버블 경기가 절정에 달했던 때다. 일본을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돌 정도로 경제 대국으로서 일본인의 자부심이 대단했던 시절이었다. 일본의 전후 세대, 즉 단카이 세대는 엄청난 거품이 낀 부동산과 주식 가격에두 불구하고, 자신들이 닦아온 경제적 기반을 믿었다. 그들의 틈바구니에서 조선인으로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솔로몬의 욕망은 1989년 일본의 사회적 공기를 그대로 머금고 있다. 주목할 것은, 그의 삶에서 식민 기간이 끝난 이후에도 조선(한국)을 향한 일본의 시선 속에 남아있는 물질적·정신적 식민화의 관성이 감지된다는 사실이다. 할머니(선자)가 견뎌온 세월과는 분명히 다르지만, 그 역시 더욱 은밀하게 작동하는 차별과 배제, 혐오의 메커니즘과 다퉈야 한다. 물론 그의 내면에는 일본인의 성공 신화를 전유하고픈 전혀 대별적인 욕망도 존재한다. 이로써 솔로몬의 내면은 이중적 분열의 점증하는 장소가 된다. 그는 태평양(미국/일본)과 현해탄(일본/조선) 사이에 끼인 그의 위치를 자꾸 확인해야 하는 존재다.

그처럼 <파친코>의 서사는 중력의 두 가지 속성이 식민시기와 탈식민시기에 걸쳐 절충·연장·길항하는 장면들로 가득하다. 먼저 일제강점기의 선자는 식민자가 의식하지 못한 이질적 영역이 실존한다는 것을 조용히 드러내는 존재다. 피식민자의 입장과 목소리를 강변하는 투사는 아니지만, 자식과 가족을 향한 그의 생애는 탈락될 위기에 놓인 타자의 정체성 문제를 끊임없이 소환한다. 그녀의 삶의 굴곡은 부산 영도에서 일본 오사카로 이주하는 과정에서부터 두드러진다. 그녀는 독립운동가도 아니고 의식화된 사회주의자도 아니며 아나키스트는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오사카 외곽 조선인 거리에 정착하는 과정은 실존적인 투쟁이 된다. 그녀는 <파친코> 8화에서 오사카 거리 한복판에서 김치를 내다 팔며 ‘엄마’의 책임을 다하려 한다. 그녀의 자리가 특별하진 않지만, 식민자의 권력적 시선이나 규율적 담론 안에 포박당하지 않은 타자의 자리, 곧 호미 바바의 ‘틈새(in-betweenness)’를 상기시킨다.

일제강점기 후반, 일본인에게 조선인은 각별한 규율 아래에 고정되어야 하는 존재였다. 일본인의 입장에서 보면 선택적으로 언제든지 배제시킬 수 있는 존재였다. 하물며 그 무렵 일본으로 이주해온 조선인은 ‘사회의 여백’에 고정되어야 하는 타자였을 것이다. 기욤 르 블랑의 표현을 빌리면 애초에 ‘추방의 이유를 안고 틈입한 타자’였을 것이다. <파친코> 7화는 관동대지진 때 일본에서 벌어진 끔찍한 역사적 사건들을 전경화시킨다. 그 무렵 조선인 탈옥범들이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고,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소문은, 조선인이 ‘추방의 이유를 안고 틈입한 타자’라는 사실을 강변한다. 그들은 존재 자체로 일본 사회의 질서를 교란하는 위험인자이며, 관리되어야 할 욕망을 가진 거북한 이방인이다. 그들의 신분과 지위는 엄격히 인준되어야 하며, 사회 상층부로의 이동은 억제되어야 한다. 조선인은 배제와 소외의 명분이 전제된 ‘호모 사케르’, ‘몫이 없는 자’의 불안한 실존을 벗어나기 힘들었던 것이다.

1938년 선량한 목사이자 선자의 자상한 남편이었던 이삭은 지하 공산주의 조직에 가담한 것이 밝혀져 경찰에 잡혀간다. 전근대적 가부장 질서가 견고하던 시절, 선자가 시집도 가기 전 아이를 밴 여자라는 손가락질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의 포용력 덕분이었다. 선자에게 그는 오사카에서의 힘겨운 삶을 견뎌낼 수 있는 버팀목이었고, 불안정한 미래에 내쳐질 뻔한 아들(노아)에게 최고의 아버지였다. 그런 그가 멀고 낯선 이상 세계를 꿈꾸며 선자가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을 살았다는 사실은 <파친코> 마지막 회차의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 무렵 일본은 중일정쟁을 일으켰고 조선은 병참기지화되기에 이른다. 조선인의 민족정체성을 박탈하기 위해 황국신민화를 위한 조치들이 가열차게 진행되고 ‘내선일체’ 사상이 강요되던 때였다. 조선인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민족 증발’의 상황이 실체화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선자에게 ‘남편의 증발’은, 그 시기 조선인의 상상 속에 존재하던 울타리의 해체, ‘뿌리뽑힘’의 경험과 유비적으로 중첩된다.

선자가 그 이후 일본에서 어떤 삶을 살아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1930년대와 1989년을 오가는 평행편집 과정에서 그녀가 이방인으로 견뎌낸 긴 세월은 추측과 짐작의 영역으로 남겨진다. 이제 중요한 것은, 선자의 삶만큼 큰 비중으로 다뤄지는 그녀의 손자 솔로몬의 삶이다. 선자의 삶이 피식민자를 향한 식민자의 가시적 억압과 차별, 구속을 벗어나려는 최소한의 자유를 향한 몸부림이었다면, 솔로몬은 적극적 자유를 지향하는 새로운 세대다. 물론 조선과 일본 사이에 ‘식민/피식민’ 관계가 청산된 지 40년 이상 지난 시점임에도 일본의 조선인을 향한 ‘정형화’의 의지, ‘동일화’의 욕망은 은연중에 남아있다. 그는 성공을 위해 조선인의 ‘타자성’을 의도적으로 감추거나 외면하기도 하지만, 결국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수용하며 경계인으로서의 현실을 직시한다.

기욤 르 블랑은 『안과 밖』이라는 책에서 억압된 얼굴과 배제된 목소리로 살아야만 하는 이방인의 실존을 철학적으로 탐색한다. 외국인으로서 이방인의 실존은 떠나온 자(망명자), 들어온 자(이민자), 떠도는 자(이주자)로 그 성격이 구분된다. 일제강점기의 선자는 떠나온 자이면서 들어온 자의 성격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솔로몬은 영원한 이주자, 곧 떠도는 자의 초상이다. 그는 일본에서 일본인들과 학교를 다니며 성장했고, 미국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금융회사에 취업한다. 그러나 그는 미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심지어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한 앞세대로부터도 마음의 ‘정처’를 찾지 못한다.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돈과 성공을 좇아 왔지만, 미국인, 일본인 상급자들은 그에게 예외적인 ‘인정의 절차’를 요구한다.

그는 오사카에서 파친코장을 운영하며 경제적 안정을 이룩한 아버지 모자스와는 다른 삶을 꿈꿨다. 그러나 더 합법적이고 명백한 성공의 꿈은, 조선인이라는 타자성의 흔적 덕분에 좌초될 위기에 처한다. 일본 사회가 우러러보는 경제적 성공 신화를 모방하려는 그의 욕망은 자꾸 미끄러진다. 그의 내면이야말로 이질적인 가치들의 격전장이다. 어쩌면 미국인이자 바라건대 일본인이며, 어쩔 수 없이 조선인인 그의 내면은 ‘상호텍스트적 혼성화’가 일어나는 장소다. 그래서 그의 안간힘은 선자의 그것과 다르면서 같고, 비슷하면서 전혀 다른 해석을 요청한다.

<파친코>가 꺼내놓은 중력의 문제는 시즌 1에서 소략적으로 다뤄진 고한수, 모자스, 노아, 에츠코, 하나, 나오미의 삶에서 전혀 다른 각도로 다뤄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벌써 마무리되어선 안 된다.

 

* 이 글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행하는 국가 홍보 영문 매거진 <KOREA>에 수정을 거쳐 영문으로도 게재되고 있다.

 

 

글·안숭범
문화평론가.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