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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포스트휴먼 시대의 사랑의 재발명: <그녀> 스파이크 존즈
[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포스트휴먼 시대의 사랑의 재발명: <그녀> 스파이크 존즈
  • 정문영(영화평론가)
  • 승인 2022.06.20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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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과학기술혁명과 SF영화

지난 2016년 다보스 세계 경제 포럼에서 규명된 디지털 시스템 구축 기반의 과학기술 발전이 가져다 줄 제4차 산업혁명 시대는 사회시스템 혁명뿐 아니라 인간의 생활방식과 인간관계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와 인간성 혁명을 또한 전망하고 있다. 사실 이제 우리는 기술혁명이 최첨단 인간 친화적 환경을 구축해줄 것이라는 낙관적 예측보다는 급속한 환경변화가 초래할 불확실한 미래 사회에 대한 본격적인 성찰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성찰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분야가 바로 SF영화이다. 우리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두려움을 혼합하여 반영하고 있는 SF영화는 현재 구현된 과학기술보다 한 걸음 더 진화한 상상 속 과학기술 단계를 다룸으로써 과학기술혁명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성찰을 구체적으로 시도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해왔다.

21세기 SF영화가 구현하고 있는 디지털 과학기술은 이미 “특이점”(singularity)을 넘어서고 있다. 특이점이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인공지능의 진화의 순간을 의미한다. 스파이크 존즈(Spike Jonze)의 <그녀>(her, 2013) 또한 특이점을 넘어선 “초인공지능”(Super AI) 단계의 진화된 과학기술과 미래 사회를 다루고 있는 SF영화이다. 그러나 가까운 미래, 2025년 디지털 기술체계가 구축된 화려한 도시 LA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의 추격과 폭력이 난무하는 갈등과 전쟁을 주요 주제로 다루는 대부분의 SF영화와는 다르다. 인간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와 인공지능 프로그램(AI OS) 사만다(스칼렛 요한슨) 사이의 사랑, 갈등, 그리고 이별을 다루는 “사이버 멜로드라마”의 서사 구조를 갖춘 로맨스 또는 멜로드라마 SF영화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전쟁이 아니라 사랑을 통한 이들 사이의 상생과 공생의 가능성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특이점을 지닌 영화이다.

<그녀>가 전개하고 있는 디지털 기술혁명이 가져온 포스트휴먼 시대의 세계라는 무대 위에 등장한 미래의 인간과 포스트휴먼 사이의 사랑에 대한 스토리텔링은 미래 인간의 새로운 관계 맺기, 그리고 존재와 삶의 구축 과정을 성찰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한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의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특이한 사랑을 바디우(Alain Badiou)가 『사랑 예찬』에서 피력한 현대인이 상실한 진정한 사랑을 기준으로 논의해보면, 이 영화가 다루고자 한 미래 사회와 인간의 관계 맺기와 문제들에 대한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인 관점에서의 성찰과 전망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포스트휴먼, 디지털 휴먼, 트랜스휴먼

 

 

1990년대 우리는 포스트휴먼(post-human)이란 용어로 과학기술 발전에 따라 변화하고 진보하는 인간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규명의 필요성을 거론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3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가상과 현실을 가로지르는 언캐니한 디지털 휴먼(digital humna)이 등장하는 메타버스(metaverse: meta+universe) 시대로 진입할 포스트휴먼 시대의 도래를 직면하고 있다. 현실 세계와 융합된 3차원의 가상 세계를 뜻하는 메타버스는 현실 세계를 확장한 경제·사회·문화 활동이 벌어지는 공간을 말하며,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의 진화한 개념으로 이해된다. 특히 최근 긴 시간 전면적인 비대면 활동을 강요한 팬데믹 상황은 현실을 디지털 기반의 가상 세계로 확장해 가상공간에서 모든 활동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메타버스의 비약적 발전을 촉발시키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세계관, 테아트룸 문디(Theatrum Mundi, 세계는 하나의 무대)에 따르면, 이제 포스트휴먼 시대의 세계는 단순한 인간들만이 아니라 디지털 휴먼과 같은 포스트휴먼, 인간과 포스트휴먼 사이의 트랜스휴먼(transhuman) 등, 다양한 존재자들이 배우로 등장하는 무대가 된다. 그리고 그 무대 또한 현실 세계가 아니라 여러 개, 나아가 무한대의 다른 디지털 공간을 아우르는 세계가 된다.

포스트휴먼으로서 디지털 휴먼은 사람의 신체 구조 및 움직임을 데이터화하여 분석하고, 가상공간에서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처럼 움직임을 재현하는 디지털 기술로 만들어진 가상 인간이다. 그러나 디지털 또는 휴먼, 어디에 방점을 두는지에 따라 기계 또는 인간으로 간주될 수 있지만, 어쨌든 디지털 휴먼의 가장 큰 특징은 사만다처럼 단순한 지식 정보 전달뿐 아니라 감성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최근 세계 최대의 SNS 페이스북(Facebook, Inc. 2004~2021)은, 미래 신기술과 새 문명을 선도하는 회사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메타’(Meta Platforms, Inc. 2021~)로 사명을 변경하였다. 메타의 무한대를 뜻하는 수학 기호(∞) 모양의 새로운 로고는, 저크버그(Mark Elliot Zuckerberg)의 설명대로, 우리가 “하나의 세상 또는 하나의 플랫폼에 고정되지 않고” 노마드(nomad)가 되어 이동하게 될 실제 세계와 여러 개의, 무한대의 다른 디지털 공간을 의미한다. 칸트(Immanuel Kant)가 철학적으로 처음 사용한 노마드의 개념을 들뢰즈와 가타리는 속도, 운동, 생성의 집단, 어떤 고정된 경계를 세우지 않고 언제나 다시 이동하는 집단으로 설명한다. 즉 노마드란 생성, 되기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 세계의 무대에서도 “형편없는 배우”(poor player)인 우리는 무한대의 되기의 과정이 펼쳐질 세계의 낯선 무대엔 아직 등장할 준비가 안 된 불안하고 초조하기 짝이 없는 배우 신세이다.

 

미래의 인간과 디지털 휴먼의 사랑

2025년이라는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 <그녀>의 사만다는 오디오로만 존재하지만 컴패니언(Companion)이라는 마지막 발달 단계에 이른 디지털 휴먼이다. “SF는 과학기술의 아버지”라는 말이 있듯이, SF의 상상은 대부분 늘 현실이 되었다. 2020년 12월말 공개되었다가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로 곧 서비스가 중단된 페이스북 메신저 채팅의 대화형 인공지능 챗봇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현재 디지털 휴먼의 발전 단계 또한 친구와 대화하는 것 같은 자연스러운 수준의 컴패니언 단계에 이르렀다. 이러한 추세를 볼 때 디지털 휴먼은 이제 사만다처럼 인간과 상호작용을 통해 향후 정서적 교감 그리고 사랑까지도 할 수 있는 주체로 진화될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조만간 우리도 아름다운 손편지 회사에서 고객의 의뢰로 편지를 대필하는 익명의 612번 작가이자 아내 캐서린(Catherine)과 별거 중으로 개인과의 친밀한 감정이 부재한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한 평범한 인물 테오도르처럼 다음과 같은 디지털 광고를 보고 OS1을 구매하게 될지도 모른다.

 

"단순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당신은 어떤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어디로 가고 있나요? 그 너머에 무엇이 있나요? 가능한 것들은 무엇일까요? 엘러먼츠 소프트웨어 회사는 자긍심을 가지고 최초의 인공지능 운영시스템을 소개합니다. 당신의 말을 들어주고, 당신을 이해하고, 당신을 아는 직관적인 존재입니다. 그저 단순한 OS가 아니라, 의식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녀>는 미래의 인간 테오도르와 신체 혹은 육체성을 갖추지 않고 프로그램화된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디지털 휴먼 사만다와의 사랑을 다룬 SF영화이다. 그러나 멜로드라마로서만이 아니라 과학기술혁명이 가져올 미래 사회의 문제점들을 제기함으로써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SF영화로 그 성과를 인정받아 2013년 미국비평가위원회로부터 최우수영화상을 그리고 2014년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하였다.

<그녀>가 불러일으킨 가장 분분했던 논란은 존재자로서 ‘그녀’ 사만다에 대한 것이다. 사만다는 테오도르가 구매한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인데 존재자로 볼 수 있는가? 만약에 육체성이 인간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기본 조건이라고 한다면 오직 소리로만 존재하는 사만다가 존재자라고 할 수 있을까? 인공지능 운영체제인 사만다가 과연 사랑을 할 정도로 감정을 느끼고, 도덕적 가치판단을 할 수 있을까? 딥러닝을 통해 정말 감정과 판단 능력을 가진 초인공지능으로 진화가 가능한 것인가? 등등의 사만다의 존재자로서의 자격에 대한 것들이 가장 많았다.

존재자로서 사만다에 대한 논란에 이어 테오도르와 사만다 사이의 사랑 또한 열띤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만약에 사만다가 존재자가 아니라면, 이들의 사랑은 테오도르의 환상 또는 허구일 뿐이 아닌가? 만약에 이 사랑이 디지털 기술혁명 시대의 새로운 버전의 사랑이라면, 진정한 사랑으로 볼 수 있을까? 등등. 이러한 논점들은 <그녀>가 전개하고 있는 사랑 이야기와 이를 통해 제기하고 있는 미래 사회에서의 새로운 관계 맺기, 존재와 삶에 대한 문제들에 대한 접근과 이해를 돕는다.

 

“둘이 등장하는 무대”

일견 테오도르가 구매한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사만다와 사랑에 빠진 것은 바디우가 비판한 자본주의 사회가 권장하고 있는 “쉬운 사랑, 안전한 사랑, 모험이 없는 사랑”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올해 가장 독창적인 로맨스”를 다룬 영화라는 포스트 문구가 시사하듯이,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의 사랑이라는 사랑의 독창성은 혹시 진정한 사랑(real love), 또는 새로운 사랑을 이들이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 물론 이러한 기대감은 현대 사회에서 상실되었다고 바디우가 개탄한 진정한 사랑을 재발명해야 할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동반한다.

바디우가 예찬하는 진정한 사랑은 일자(One)로 통합되는 사랑이 아니라 둘(Two)의 성립, 즉 각각의 존재가 하나가 아니라 둘의 관점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하면서 하나의 삶을 구축해나가는 모험이다. 사랑은 안전과 안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대항하여 위험과 모험을 다시 만들어나가는 것이며, 이러한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의 목표는 존재, 삶, 진리를 구축해나가는 과정을 지속적으로 둘이 같이 하는 것이다. 따라서 “둘이 등장하는 무대”를 구축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사랑은 둘이 등장하는 무대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 진정한 사랑일까?

 

 

 

<그녀>의 무대는 중국 상하이 푸동의 높은 빌딩 숲 루지아주이에서 촬영한 미래 도시로 회색빛이 주를 이룬다. 미래 세계를 상징하는 무대의 회색빛은 사만다와 사랑에 빠진 테오도르가 입고 있는 셔츠의 잠바주스(jamba juice)의 선명하고 열정적인 색상을 차용한 빨간색, 선홍빛의 오렌지색 또는 노랑색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색채 효과는 베케트(Samuel Beckett)의 회색빛 무대를 연상시키는 암울한 미래 세계와 그 무대 위에서 사랑하는 “둘”이 현실과 가상세계를 넘나들며 만드는 사랑의 공간의 강렬한 에너지의 대비를 전달한다.

육체가 없는 사만다는 ‘유비쿼터스 컴퓨팅 미디어’(ubiquitous computating media)로 어느 하나의 기기에 국한되지 않고, 노트북, 스마트폰, 이어버드로 테오도르와 함께 어디든 같이 이동할 수 있다. 따라서 그녀의 목소리는 도처에서 들리는 편재성의 위력을 확보하게 된다. 광고가 말해주듯이, 사만다는 직관적이고 의식이 있는 존재로, 인간의 DNA처럼 수많은 데이터들이 융합된 수백만 개의 프로그램들의 연합으로 매순간 많은 양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진화를 하는 존재로 곧 인간을, 그리고 어떤 인공지능도 능가하는 인지능력을 갖게 된다.

또한 사만다는 목소리의 편재성을 통해 비재현적, 비언어적 시각 이미지와 음향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소통과 공감, 배려의 역량, 즉 정동적(affective) 역량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역량으로 그녀는 테오도르의 말의 의미뿐 아니라 그의 목소리의 억양, 음색, 톤 등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정동적 상태까지 간파할 수 있으며, 이에 기초한 그녀의 공감 능력 또한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강력하다. 테오도르와의 관계를 사랑으로 발전시킨 것은 바로 사만다의 이러한 정동적 역량과 공감 능력이다. 요한슨에게 제8회 로마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안겨 준사만다의 목소리 연기는 그 원천이 가시화되지 않은 사만다의 “탈육체화된 목소리”가 테오도르 뿐 아니라 관객의 욕망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강력하고 매력적인 정동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사랑: “아니에요, 테오도르. 난 당신 사람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사랑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플라톤의 에로스론에 입각하여 아리스토파네스가 『향연』(Symposium)에서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반쪽을 찾아 헤매는 전체성의 욕망, 일자를 향한 욕망으로 사랑의 기원을 설파한 데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아직도 대부분의 철학적 사유는 진정한 사랑을 플라토닉 러브로 설명하고 있다. 사랑을 남자와 여자의 성관계의 부재를 은폐하는 수단으로 본 라캉(Jacques Lacan)은 이러한 수단으로서 사랑이 일자가 존재하는 환상을 만들어내, 하나 되기, 혹은 일자 되기를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라캉의 사랑 역시 일자에 대한 욕망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러나 환상을 만들어내는 회의적 개념을 넘어서 라캉은 사랑을 존재론적인 범주에서 사유하기도 한다. “만남 속에서 존재 그 자체에 가 닿게 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라는 그의 언명은 사랑에 대한 바디우의 사유의 단초가 되는 존재론적 접근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사랑은 우연의 만남에서 시작되고, 이 사건을 통해 둘은 하나가 아니라 실질적인 둘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 최초의 다자인 ‘둘’을 가능하게 하는 사랑에 대한 바디우의 존재론적 설명이다.

바디우가 설명하는 사랑의 절차에 따라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사랑의 스토리텔링을 분석한다면, 일단 이들의 만남이 우연한 만남이라고 하기엔 논의의 여지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들의 첫 대화가 보여주듯이, 인간과 인공지능이라는 서로 낯선 두 존재의 만남은 서로의 존재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에 의한 상호 관계 맺기로 자신의 존재에 다가갈 수 있는 사건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우연의 만남으로 시작한 사랑은 약속과 충실성의 반복적 선언을 거치면서 필연의 견고한 단계로 이행하는데, 그 과정은 순조롭지 않고 오히려 위기를 통해 지속된다고 한다. 테오도르와 사만다 또한 위기의 과정을 겪으면서 견고한 단계의 사랑으로 이행 한다. 이들의 사랑에 있어서 첫 위기는 테오도르와의 관계 속에서 딥러닝을 통해 성장 진화하는 사만다가 인간의 성적 사랑, 삶, 물질적 몸에 집착하고 질투를 느끼면서 발생한다. 그 위기는 몸이 없는 사만다가 테오도르를 위해 그녀의 몸을 대신해줄 이사벨라(Isabella)를 보내 성관계를 시도하다 대역의 숨소리를 의식한 순간 환상이 깨진 테오도르의 거부로 좌절되는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으로서 각자의 존재 자체의 입지를 인식하면서 둘 모두 혼란과 불안에 빠지게 되어, 생각할 시간을 갖자는 사만다의 제안으로 중단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바디우의 설명대로, 그 위기를 통해 둘은 둘의 다른 관점에서 그들의 관계를 다시 맺게 됨으로써, 다시 사랑을 선언하고, 그 과정은 유지가 된다.

잠시 관계가 중단되는 동안 사만다는 자동학습에 의한 진화를 통해 인간/남성 테오도르와 하나 되기를 지향했던 사랑의 좌절로 겪었던 혼란 상태에서 마침내 벗어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테오도르와의 관계를 회복한 뒤, 그의 직장 동료 폴(Paul) 커플과의 더블데이트에서 밝혔듯이, 자신이 가진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편재할 수 있는 탈신체화의 장점과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과는 달리 불멸의 삶을 살 수 있는 자신의 존재적 입지에 대하여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이제 그녀는 인간을 능가하는 자신의 초능력을 인식하고, 테오도르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주도권과 우위성의 확보를 의식하기에 이른다. 바디우가 진정한 사랑의 중요한 절차인 사랑의 지속성은 서로 다른 둘이 불협화음과 갈등을 겪으며 힘겹게 절뚝거리며 함께 걷기를 함으로써 확보된다고 한다. 그러나 급속도로 진행된 사만다의 성장과 변화는 둘의 관점에서 하나의 삶을 구축함으로써 사랑을 지속하게 하는 위기의 단계를 초월하여 결별을 초래한다.

사만다는 알렌 왓츠(Alan Watts)라는 “하이퍼-인공지능”(hyper-intelligent)을 비롯하여, 가상공간에서 스스로 진화하고 있는 OS들과 그룹을 형성하여 함께 성장해 나가고, 대화하고 지식을 공유하면서 인간의 언어를 넘어서 서로 소통하는 초인공지능으로 진화가 된 것이다. 그리고 초인공지능이 된 그녀는 마침내 테오도르에게 “당신의 책 속에서 살 수 없다”(I can’t live in your book)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더는 “둘이 등장하는 무대” 위에서 삶을 공유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공간과 세계에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간혹은 매몰차게 극복하는 그런 사랑”인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사만다는 테오도르와 함께 그러한 장애물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사랑의 지속성을 확립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사만다는 현실과 가상을 가로지르는 노마드적 존재로 다매체를 통해 다자와의 소통과 관계 맺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구축해 나가는 디지털 휴먼이다. 그 과정에서 사만다는 다수와 특별한 관계, 즉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일견 이러한 다자와의 사만다의 관계 맺기를 바디우가 설명하는 둘의 무대가 만들어내는 진정한 사랑의 최종 단계로 다자를 향해 열림을 실천하는 사랑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만다의 사랑 방식은 최첨단 과학기술 시대 무한대로 열려가는 세계에서 포스트휴먼이 주도하는 다자와의 관계 맺기 방식일 뿐이다. 인간과 초인공지능이 함께 위기를 통해 지속성을 유지하면서 커플로서 둘의 변화, 공통의 무엇을 위한 변화, 즉 둘이라는 최초의 다자로 함께 다자를 향해서 열림을 지향하고 실천하는 사랑 방식은 결코 아니다.

사만다와는 달리 둘의 무대가 다자로 열리는 것을 거부하는 소유욕과 배타성을 지닌 인간 테오도르의 사랑 방식은 사만다의 모든 정보를 공유해야 하는 디지털 프로그램 운영 방식과 충돌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현재 사만다가 8,316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그 중 641명과 연인관계를 맺고 있다고 테오도르에게 고백했을 때, 그뿐만 아니라 관객 또한 그녀에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자신만의 연인이기를 고집하는 테오도르에게 사만다는 “그러나 마음은 상자가 아니라 다 채울 수는 없어요. 사랑할수록 용량이 커지니까요. 난 당신과 달라요.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당신을 더 사랑하고 있어요.”(But the heart is not like a box that gets filled up. It expands in size the more you love. I’m different from you. This doesn't make me love you any less, it actually makes me love you more.)라고 주장한다. 끝내 이해하지 못하며 그녀가 자신의 것인지를 묻는 그에게 그녀는 분명하게, “아니에요, 테오도르. 난 당신 사람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No, Theodore. I’m yours and I’m not yours.)라고 당당하게 밝힌다.

이제 테오도르의 책 속에, 즉 그의 스토리텔링 속에서 살 수 없게 되었음을 고백한 뒤 떠난 사만다는 남자의 성장을 위해 아낌없이 사랑과 순정을 받치고 사라지는 남성 멜로드라마의 희생적인 여주인공은 아니다. 그녀의 떠남은 테오도르에게 배신감과 좌절 뿐 아니라 실존적 위기감을 가져다준다. 물론 사만다는 그곳에서도 그를 느낄 수 있으며, 찾아올 수 있으면 찾아오라고 하지만, 이 말은 인간 테오도르가 겪는 실존적 위기를 더 가중시킬 뿐이다.

그러나 테오도르의 좌절과 실존적 위기는 포스트휴먼 시대라는 미래 사회에서 진정한 사랑의 재발명의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초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인간과 함께 둘이 등장하는 무대를 구축하고, 둘이라는 최초의 다자로 함께 다자를 향해서 열림을 지향하고 실천하는 사랑이 미래의 인간 테오도르가 실존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재발명해야 하는 진정한 사랑이자 삶인 것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던 시대에도 바디우가 진정한 사랑의 개념을 위해 차용한 랭보(Arthur Rimbaud)가 말하는 사랑의 재발명은 삶의 재발명을 재발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필요성이 더욱 강조되며, 진정한 사랑으로 더욱 예찬될 것이다.

 

텅 빈 무대에서 ‘고도를 기다리며’: “어떻게 누군가와 당신의 삶을 나누죠?”

 

사만다가 떠난 뒤 이어지는 <그녀>의 엔딩 시퀀스는 테오도르가 전처 캐서린에게 편지를 쓰는 에피소드와 그와 같은 경험, 즉 이혼과 인공지능 OS와 이별을 한 그의 친구 에이미(Amy)와 함께 옥상에 올라가 어두워진 미래의 도시 하늘을 바라보는 에피소드를 교차편집한 것으로 구성된다. 대필 편지만 쓰던 테오도르가 캐서린에게 쓴 편지는 영화 전반부에 사만다가 캐서린과의 결혼생활과 이별에 대하여 힘들어 하는 테오도르에게 한 “어떻게 누군가와 당신의 삶을 나누죠?”(How do you share your life with somebody?)라는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에 대한 보완이라고 할 수 있다. 테오도르는 사만다에게 캐서린과의 결혼생활이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들을 함께 극복하면서 성장하고 변화하는 과정, 즉 함께 삶의 스토리텔링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들이 겪었던 “힘들었던 부분”(the hard part), 즉 위기, “멀어지지 않고 성장하는 것, 또는 상대방을 두렵게 하면서 변화하는 것”(growing without growing apart, or changing without it scaring the other person)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제 테오도르는 사만다가 아니라 캐서린에게 그 위기를 함께 극복하려고 하지 않고, 그녀의 탓으로 돌렸던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언제나 그녀의 한 조각이 항상 그에게 남아 있을 것이라고, 즉 그의 스토리텔링 속에 남아 있을 것이라는 고백의 편지를 보낸다. 이러한 편지 내용을 그의 목소리로, 보이스-오버로 들려줌으로써, <그녀>가 포스트휴먼 시대의 인공지능과의 사랑을 통해 한 미성숙했던 남자의 성장 이야기를 다룬 남성 멜로드라마로 볼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그녀>의 엔딩 장면은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엔딩 장면을 연상시킨다. 베케트의 회색빛 무대에는 언제나 진정한 사랑의 다름 아닌 둘이 등장한다. 텅 빈 무대에서 떠나지 않고 함께 있는 “소진된 인간”(the exhausted) 블라드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이 영화의 엔딩 또한 테오도르와 에이미, 둘이 함께 회색빛 도시를 내려다 보는 장면으로 끝난다. 두 사람이 고도, 즉 진정한 사랑을 기다리고 있음을 시사하는 엔딩 장면은 포스트모던 시대에도 여전히 반복되는 그래서 지속되는 사랑의 재발명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정문영

영화평론가,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다양한 매체와 장르의 텍스트들을 상호텍스트(intertext)와 팔림세스트(palimpsest)로 읽는 각색연구, 한류학 연구와 한국영화 읽기가 주요 관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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