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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의 문화톡톡] 아이와 함께하는 역사문화기행 : 백탑의 벗들과 청계천의 다리들- 수표교와 광통교
[김정희의 문화톡톡] 아이와 함께하는 역사문화기행 : 백탑의 벗들과 청계천의 다리들- 수표교와 광통교
  • 김정희(문화평론가)
  • 승인 2022.06.20 1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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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친구 없이 살 수 있을까?

코로나 상황이 이어지며 만나지 못한 지 이년 반이 되어 버린 친구들이 있다.

물론 서로의 근황에 대해서는 전화로 문자로 혹은 Social Media를 통해 언제든지 알 수 있기는 하다. 만나지 않으면 더 이상 친구가 아닌 걸까?

친구의 사전적 의미는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다. 친구의 순우리말인 ‘벗’은 비슷한 또래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을 뜻한다. 즉, 친구는 공간과 시간을 공유한다는 의미이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다 해도 어린 시절의 친구가 어색하지 않은 이유는 함께했던 공간과 시간 때문이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기억.

 

“술래잡기, 고무줄놀이, 말뚝박기, 망까기, 말타기 놀다 보면 하루는 너무나 짧아.

아침에 눈뜨면 마을 앞 공터에 모여 매일 만나는 그 친구들

비싸고 멋진 장난감 하나 없어도 하루 종일 재미 있었어.

좁은 골목길 나지막한 뒷산 언덕도 매일 새로운 그 놀이터

개울에 빠져 하나뿐인 옷을 버려도 깔깔대며 서로 웃었지.”

자전거 탄 풍경의 ‘보물’이란 노래다.

 

서울역사박물관앞 분수에서 노는 아이들 2022년 6월    ⓒ김정희
서울역사박물관앞 분수에서 노는 아이들 2022년 6월 ⓒ김정희

 

요즘 아이들은 무엇을 하며 놀까?

마스크를 쓰고 칸막이가 있는 교실에서 모든 이들과 신체접촉을 멀리해야만 하는데

어떻게 친구를 사귈까? 친구를 사귈 수는 있을까? 어른들은 걱정이 많다.

하지만 아이들은 회복이 빠르다. 아이들은 COVID-19에 대한 그들만의 기억을 공유하며

친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우리가 왜 친구 없이 살 수 없는지에 대해서 함께 얘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8세기 한양의 한복판, 탑골 - 백탑의 벗들

탑골공원안에 원각사 십층 석탑이 있다. 18세기 한양의 한복판에 우뚝 서 있던 원각사 십층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서 멀리서 보면 흰 빛이었기 때문에 백탑이라고 했다. 이 탑을 기준으로 동쪽을 탑골(탑이 있는 동네), 서쪽을 대사동이라 불렀다.

 

《탑동연첩》 〈탑동계회〉 서울역사박물관 1803년 7월 2일 무관 관원들이 순조의 장인 김조순(1765~1832)의 후원으로 자줏골(지금의 창신3동7번지)에서 연회를 가졌는데, 《탑동연첩》은 당시 연회의 장면을 그린 계회도 1폭과 연회의 취지를 알 수 있는 서문, 4편의 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탑동계회도〉이 그림의 중앙 상단에 우뚝 솟아 있는 백탑이 보인다. ⓒ김정희
《탑동연첩》 〈탑동계회〉 서울역사박물관
1803년 7월 2일 무관 관원들이 순조의 장인 김조순(1765~1832)의 후원으로 자줏골(지금의 창신3동7번지)에서 연회를 가졌는데, 《탑동연첩》은 당시 연회의 장면을 그린 계회도 1폭과 연회의 취지를 알 수 있는 서문, 4편의 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탑동계회도〉   이 그림의 중앙 상단에 우뚝 솟아 있는 백탑이 보인다. ⓒ김정희

 

이 주변에 살면서 우정을 쌓은 사람들이 있었다. 백탑의 벗들은 홍대용(1731~1783), 서상수 (1735~1793), 박지원(1737~1805), 이덕무(1741~1793), 유금(1741~1788), 백동수(1743~1816), 이희경(1745~1805), 윤가기(1747~1802), 유득공(1748~1807), 박제가(1750~1805), 이서구(1754~1825)를 비롯해 연암 박지원의 벗이었던 정철조(1730~1781)등이 있지만 언제나 확정적인 것은 아니다.

유득공은 1757년 백탑이 있는 경행방으로 이사를 했다. 이서구는 외가에 살다가 1765년 백탑아래 본가로 돌아왔고, 이덕무는 1766년 백탑 동쪽 관인방 대사동으로 옮겼다. 박지원은 1768년 백탑 인근으로 이사 했다가 다시 전의감동(종로구 견지동)으로 집을 옮겼다고 한다.

 

백탑의 벗들이 묘사한 백탑 풍경

 

백탑풍경

영롱한 상현달이

구름이랑 나오니,

백탑은 우뚝하고

푸른 하늘 더 넓네.

- 이서구, 『녹천지위』 「달을 보며 연암집으로 가다」 중에서

 

원각사에 우뚝한 백탑은

열네 층을 공중에 포개었네

운종가에 있는 흥천사의 큰 종은

커다란 집 가운데에 날 듯 하여라

- 이덕무, 『청장관전서』 「성시전도」 중에서

 

백탑에서의 맑은 인연

 

미중 박지원선생이 문장에 뛰어나 당세에 이름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탑 북쪽으로 선생을 찾아 나섰다.(중략)

그 무렵 형암 이덕무의 사립문이 그 북쪽에 마주 서 있고,

낙서 이서구의 사랑이 그 서편에 솟아 있었으며,

수십 걸음 떨어진 곳에 관재 서상수의 서재가 있었다.

나는 그곳에 한번 가면 돌아오는 걸 잊었다.

열흘이고 한 달이고 머물곤 했다.

밤낮으로 함께하며 쓴 글이 책을 이루었다.

- 박제가, 「백탑청연집서」 중에서

 

백탑탑골공원에 있는 10층 대리석 석탑. 원래 이름은 ‘원각사지 10층 석탑’ 1465년(세조11) 원각사가 세워지고 나서 1467년(세조13)에 석탑이 만들어졌다. 맨 위 3층은 오랫동안 무너진채 내려져 있었는데, 1947년 복구하였다.   ⓒ김정희
백탑      탑골공원에 있는 10층 대리석 석탑. 원래 이름은 ‘원각사지 10층 석탑’ 1465년(세조11) 원각사가 세워지고 나서 1467년(세조13)에 석탑이 만들어졌다.
맨 위 3층은 오랫동안 무너진채 내려져 있었는데, 1947년 복구하였다. ⓒ김정희

 

나의 벗들에 대하여

「그리운 내 벗들」

박제가

 

나(박제가)는 능한게 하나도 없지만

어진 사대부와 함께 노닐기를 즐긴다.

친해진 이들과 종일 어울려 그칠 수가 없다.

사람들이 쉴 날이 없다고 웃곤 한다.

 

청장산인 이덕무

청장이 굶어 죽은들 무슨 상관 있으리

죽는대도 시서(詩書)에선 향기가 날 터인데.

 

연암 박지원

연암 선생 문필은 사마천과 한유를 아우르니

고금을 섭렵하여 깨달음을 얻었다네.

 

관헌 서상수

맑은 새벽 먹을 가니 온갖 생각 경쾌하고

화로 연기 모락모락 좋은 차 끓인다네.

 

기하 유금

찬 집 아침상에 나물조차 없나니

벼슬아치 고기 삶아 먹는다고 하지 마오.

 

영재 유득공

지기(知己)는 머나먼 곳도 이웃 되나니

시(詩)의 명성 저 멀리 촉강(蜀江)까지 알려졌네.

 

강산 이서구

강산이 차갑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한밤중에 부드럽게 말하는 것 못 봐설세.

 

담헌 홍대용

책 읽는 여가에 만 리 밖 그리노니

최고운의 옛 고장서 중원을 꿈꾸었네.

 

선달 백동수

시절 맑아 장사(壯士)는 밭 갈기를 즐겨하여

가족 끌고 기린협의 안쪽으로 떠났다네.

 

-박제가, 『정유각집』중에서

 

수표교는 물의 수위를 측량하던 관측기구인 수표를 세우면서 수표교라 불렀다. 1958년 청계천 복개 공사를 시작하면서 철거하여 처음으로 옮겼다가 1965년 장충단으로 옮겨 세웠다.
수표교는 물의 수위를 측량하던 관측기구인 수표를 세우면서 수표교라 불렀다.
1958년 청계천 복개 공사를 시작하면서 철거하여 처음으로 옮겼다가
1965년 장충단으로 옮겨 세웠다. ⓒ김정희

 

원래 수표교 자리에 나무로 만든 다리가 세워져 있다. ⓒ김정희
원래 수표교 자리에 나무로 만든 다리가 세워져 있다. ⓒ김정희

 

백탑의 벗들에게 ‘벗’이란?

 

벗을 ‘제2의 나’라고도 했고, ‘주선인’이라고도 했다.

한자를 만드는 사람이 ‘날개 우(羽)’자를 빌려 ‘벗 붕(朋)’ 자를 만들었고,

‘손 수(手)’자와 ‘또 우(又)’ 자를 합쳐서 ‘벗 우(友)’자를 만들었으니 ‘붕우(朋友)’란 마치 새에게 두 날개가 있고 사람에게 두 손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런데도 “천고의 옛사람을 벗 삼는다”고 하니 답답한 말이다.

...벗이란 반드시 지금 이 세상에서 구해야 할 것이 분명하다.

- 박지원 「회성원집 발문」 중에서

 

벗이란

피를 나누지 않은 형제요

한집에 살지 않는 부부라.

사람이 하루라도 벗이 없으면

양팔을 잃은 것과 다름없다네.

- 박제가 「밤에 이서구의 집에서 자며」

 

『논어』에 “글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인을 돕는다”고 했고, 『맹자』에 “벗이란 그의 덕을 벗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이를 상관하지 않고,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집안을 내세우지 않고 벗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귀천이 달라도 덕이 있으면 스승이 될 수 있고, 나이가 달라도 인을 도울 만하면 벗이 될 수 있습니다.

- 박지원, 「서얼소통을 청하는 의소」 중에서

 

광통교 광통교가 처음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하진 않지만 조선 초 도성 건설과정에서 놓여진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흙으로 만들어진 토교였던 것을 1410년(태종10) 8월 큰 비로 다리가 유실되자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 옛터의 돌을 사용하여 석교로 만들었다. 일부 석물들은 거꾸로 놓여 있는데 이는 태종의 신덕왕후에 대한 원한이라는 의견과 당시 운반기술 때문이었을 거라는 의견이 있다.  ⓒ김정희
광통교 광통교가 처음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하진 않지만 조선 초 도성 건설과정에서 놓여진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흙으로 만들어진 토교였던 것을 1410년(태종10) 8월 큰 비로 다리가 유실되자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 옛터의 돌을 사용하여 석교로 만들었다. 일부 석물들은 거꾸로 놓여 있는데 이는 태종의 신덕왕후에 대한 원한이라는 의견과 당시 운반기술 때문이었을 거라는 의견이 있다. ⓒ김정희

 

백탑의 벗들과 수표교, 광통교

연암 박지원은 “취답운종교기”에서 여덟 명이나 되는 벗들이 운종교(대광통교를 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를 밞으며 난간에 기대어 대화를 나누다가 6년 전 이 다리 위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한다. 장소는 수표교로 이어지면서 지금은 함께 하지 못하는 벗들을 그리워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 글을 보면 이들이 광통교와 수표교를 무대로 함께 한 일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마음에 맞는 벗과

마음에 맞는 시절을 맞아

마음에 맞는 벗을 만나서

마음에 맞는 말을 나누고

마음에 맞는 시문을 읽는 것은

지극한 즐거움이다.

이런 일은 지극히 드무니

일생에 몇 번이나 될까?

- 이덕무, 「선귤당농소」 중에서

 

이덕무와 함께 자면서

하늘엔 가물가물 은하수 어지럽고

땅에선 휘리리릭 낙엽이 나뒹구네.

내 마음 깊은 근심 그대가 풀어주니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을 구하리오.

- 박제가, 「이덕무가 와서 자는데 마침 비바람이 불다.」 중에서

 

백탑의 벗들에 관해서는 도저히 간략하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어떻게 이들을 감히 몇 자로 평가를 할 수 있겠는가. 단지 간추려진 작품들을 통해 이들을 살짝 엿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벗이 어떤 존재이며, 어떤 이를 벗해야 하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한편으로 마음에 맞는 벗을 만나 마음을 나누는 일은 이들의 일생에서도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마음 한구석 안도감을 준다.

 

·김정희(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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