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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숙의 문화톡톡] <거미의 땅> ― 망각된 기지촌의 여성들과 신체에 각인된 역사적 상흔
[서곡숙의 문화톡톡] <거미의 땅> ― 망각된 기지촌의 여성들과 신체에 각인된 역사적 상흔
  • 서곡숙(문화평론가)
  • 승인 2022.07.11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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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미의 땅>과 미군 기지촌의 세 여성 이야기
 

다큐멘터리영화 <거미의 땅>(김동령·박경태, 2012)은 철거를 앞둔 미군 기지촌을 중심으로 무덤들이 그득한 숲과 폐허가 된 유령 마을을 그려낸다. 세 명의 여성들, 즉 햄버거를 만드는 분식점 주인 박묘연, 뺏벌에서 폐휴지를 줍는 박인순, 아프리카계 혼혈인 안성자는 망각된 기지촌의 공간에서 신체에 각인된 역사적 상흔을 보여준다.

 

2. 남자에 대한 불신과 죽은 아기에 대한 죄책감

<거미의 땅> 전반부는 30년간 선유분식을 운영하며 햄버거를 만드는 바비엄마 박묘연의 삶을 그려낸다. 그녀는 예전 양공주일 때 26명의 애를 떼고 자궁하혈과 염증으로 29살에 자궁절제술을 받는다. 그녀는 결혼 약속에 대사관에 갈 준비를 하지만 바비를 데려가지 않겠다는 미군의 말에 7개월된 애를 낙태시킨다. 그녀는 집이 있는 양공주라는 이유로 자신을 이용만 하려는 남자가 싫으며 결혼에 대한 압박감으로 사는 게 재미가 없었다고 한다.

 

박묘연은 떠난 남자에 대한 불신과 죽은 아기에 대한 죄책감을 보여준다. 그녀는 미군과의 결혼이 무산되고 경제력 있는 자신을 이용만 하려는 것에 대해서 혐오한다. 그녀는 양공주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26명의 아기를 낙태수술로 죽인 사실에 대해 회한을 느낀다. 박묘연은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며 유령을 기다리는 사람이며, 과거에서 온 유령은 과거에 대한 회한과 현재 삶에 대한 절망의 존재를 드러낸다.

 

<거미의 땅> 전반부의 스타일은 텅 빈 공간, 내면으로 향하는 시선, 고정된 카메라, 시적 내레이션을 통해 과거에 대한 회한과 현재 삶에 대한 절망을 표현한다. 폐허가 된 마을을 고정된 카메라와 삽입화면으로 계속해서 보여주는 장면은 사람이 사라진 텅 빈 공간을 표현한다. 외면에서 내면으로 향하는 시선은 인물의 일상을 관찰하는 시선에서 인물의 심리상태를 들여다보는 시선으로 서서히 변화한다.

 

3. 여성에 대한 학대·착취와 수신되지 않는 편지

<거미의 땅> 중반부는 뺏벌에서 폐휴지를 주우며 폐휴지에 그림을 그리는 박인순의 삶을 그려낸다. 박인순은 양공주일 때 글씨를 모른다고 포주가 이용해먹고, 미군과의 결혼 후에는 다른 여자와 바람피우며 성병을 옮기는 남편 대문에 상처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오며, 남겨둔 푸셀라, 쿤티의 그림을 그리고 그들에게 편지를 쓴다. 그녀는 포주의 착취, 남편의 배신,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을 보여주면서, 아이들이 진실을 알고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박인순은 ‘꺼져. 사라져. 나 혼자 갈 거야.’, ‘포주들, 내가 죽어서 눈깔도 다 퍼먹고. 이 년아.’, ‘씨발놈아. 늑대가 다 잡아 먹을 거야.’, ‘내 몸에서 물러가라. 다 물러가라.’ 등 혼자서 계속 중얼거리고 소리 지르고 욕설을 하는 등 불안정한 정신상태를 보여준다. 그녀의 유일한 위안은 아이들에게 쓰는 편지와 폐휴지에 그림 그리기이다. 과거 기지촌은 과거 여자들에게 군인들을 위로해 돈을 벌어오게 하고는 태어난 아이들을 더러운 피로 멸시하고 여자들을 개미처럼 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여성에 대한 착취와 학대의 공간이다.

 

<거미의 땅> 중반부의 스타일은 검은 실루엣, 화면 안/밖 공간, 영상/사운드의 불일치를 통해서 삶/죽음, 배회하는 영혼, 과거의 상처를 표현한다. 폐허가 된 마을에서 쓰레기를 뒤지거나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인물의 검은 실루엣은 살아 있지만 마치 죽은 듯한 느낌을 표현한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인물이 화면 안으로 들어왔다가 밖으로 나갔다가 하면서 돌아다니는 장면, 골목 벽의 그림을 손으로 만지거나 빗자루로 쓰다듬다가 화면 밖으로 사라지는 장면은 고정된 카메라와 화면의 안/밖 공간을 통해 배회하는 영혼을 표현한다. 텅 빈 자연의 정경과 인물의 웃음소리·고함소리를 통한 영상/사운드의 불일치는 폐허가 된 과거의 공간과 아물지 않는 현재의 상처를 표현한다.

 

4. 엄마에 대한 원망과 실종된 친구에 대한 그리움

<거미의 땅> 후반부는 백인 남편과 살고 있는 아프리카계 혼혈인 안성자의 삶을 그려낸다. 그녀는 어릴 때 엄마에 의해서 고아원에 버려지고 15살에 고아원에서 탈출하며 미군부대에 도착한다. ‘인간이 인간을 버리면 어떡해’, ‘엄마가 나를 어디서 보든지 볼 수 있다면 내가 너의 엄마라고 말해’라면서, 그녀는 자신을 데리러 온다고 거짓말을 한 엄마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을 나타낸다.

 

미군부대에서 만난 친구 세라는 미군 마크의 결혼 약속과 배신으로 자살 시도를 하고 6개월된 아기를 낙태시킨다. 이후 그녀는 아기를 지워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 덩치 큰 미군을 받아도 소리 한 번 내지 않는다. 세라는 보건증 없이 미군을 받아서 몽키하우스에 갇히며, 휴전선 마을에서 하루 열댓 명을 상대하다가 어느 날 사라진다. ‘케세라세라’(뭐가 되든지 될 것이다)에서 따온 ‘세라’라는 이름과 달리 세라는 자살 시도, 감금, 실종을 통해 허무와 상실의 삶을 보여준다.

 

<거미의 땅> 후반부의 스타일은 텅 빈 건물, 꿈·촛불·거울, 유사성/대비, 카메라의 움직임/고정, 영상/사운드의 불일치, 시선·편집을 통해 정신적/육체적 폐허, 환상/현실의 경계, 과거/현재, 상처·기억을 표현한다. ‘인간이 인간을 버리면 어떡해?’라는 원망의 독백과 강아지와 장난치는 장면에서 안성자가 서글픈 표정으로 물을 마시며 화면 밖을 응시하는 장면으로 전환함으로써 부조화의 어긋남을 강조한다. 친구 세라가 자신이 갇힌 몽키하우스에서 떨어져 죽는 꿈은 텅 빈 건물, 가득한 쓰레기더미를 배회하는 안성자로 표현됨으로써 과거의 끔찍한 사건과 현재의 텅 빈 건물의 유사성을 통해 정신적, 육체적, 물리적 폐허 상태를 표현한다. 촛불을 들고 복도를 걸어 다니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손으로 지우려고 하는 장면은 인물의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표현한다.

 

거실에서 백인 남편이 ‘봄날은 간다’ 노래를 구슬프게 부르고 방에서 아내 안성자가 슬픈 얼굴로 누워 있는 장면은 감정의 교감을 드러낸다. 안성자가 붉은 원피스를 입고 건물 공간에서 불을 켜려고 하는 장면은 어두운 공간과 어슴푸레 들어오는 빛의 대비를 통해 과거의 상흔과 현재의 치유를 암시한다. 미군에게 안겨져 있는 여자의 하반신 사진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얼굴이 보고 싶나요?’라는 내레이터의 질문에 카메라가 사진 속 여자의 가슴까지 올라가고, ‘보고 싶지 않아요. 우리 엄마 같아서요. 난 60이 되었고 엄마는 그곳에 있으니까요. 그들은 언젠가 잊어버릴 거예요.’라는 안성자의 대답에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끝내 사진 속 여자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후반부 선유분식에서 안성자가 햄버거를 먹으며 눈물을 글썽이는 장면은 전반부 안성자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인한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면서 동시에 아이를 버린 박묘연과 엄마로부터 버림받은 안성자의 상처를 연결시킨다.

 

5. 유령의 마을과 포획된 여성들

다큐멘터리 <거미의 땅>에서 망각된 기지촌에서 살아가는 세 여성의 삶은 미군·엄마에게 버림받은 존재이면서 동시에 아이·친구를 그리워하는 존재를 보여주면서 역사적 상흔을 드러낸다. 박묘연의 삶은 자신을 이용하려는 미군에 대한 혐오감, 26번의 중절수술과 죽은 아이에 대한 회한을 보여주며, 박인순의 삶은 바람피우고 성병을 옮긴 미군 남편으로 인한 상처, 두고 온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을 보여주며, 안성자의 삶은 흑인·한국인 혼혈로서 자신을 버린 엄마에 대한 원망/사랑과 미군 양공주 친구 세라에 대한 그리움을 보여준다.

 

<거미의 땅>의 스타일은 텅 빈 공간, 고정된 카메라, 화면의 안/밖 공간, 시적 내레이션, 영상/사운드의 불일치를 통해 버림받은 혹은 그리워하는 존재를 표현한다. 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독특한 부분은 적막한 산의 정경, 버려진 미군기지, 폐허가 된 마을을 계속해서 삽입화면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텅 빈 공간과 시적인 내레이션의 결합은 과거 시점에서 폐허가 된 마을과 현재 시점에서 아물지 않은 상처를 연결시킨다.

나무위키 백과사전에 의하면, ‘거미줄을 치는 거미는 먹이를 물어 독을 주입하여 가사상태로 만들고, 거미줄로 둘둘 말아서 한구석에 매달아 놓은 채 소화액을 주입하여 천천히 내부를 녹이며 빨아먹거나 먹이를 잘게 으스러뜨려 입에서 나온 소화액으로 녹여서 먹는다.’ <거미의 땅>에서 세 명의 여성들은 자신의 몸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개미처럼 살지만, 결국 거미에게 포획되어 서서히 가사상태가 되고 자신을 녹여 빨아 먹힌다는 점에서 신체에 새겨진 역사의 상흔을 보여주는 존재이다. 다큐멘터리영화 <거미의 땅>은 관찰자적 시선으로 역사적 현실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독백적인 내레이션으로 여성들의 상처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시적 다큐멘터리의 깊이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서곡숙
문화평론가, 영화학박사. 청주대학교 연극영화학부 교수로 있으면서, 서울영상진흥위원회 위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총무이사, 계간지 『크리티크 M』 편집위원장, 한국영화교육학회 부회장 및 편집위원장,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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