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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호의 문화톡톡] 이야기 범람 현상에 관한 단상(1)
[이 호의 문화톡톡] 이야기 범람 현상에 관한 단상(1)
  • 이호(문화평론가)
  • 승인 2022.11.14 15: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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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들'의 홍수 사태에 관하여

세상은 온갖 이야기들로 넘쳐 나지만 정작 해야 하는 이야기보다는 듣고 싶은 이야기를 창조하는 데 혈안이 된 것 같다. 문화가 산업이 되었고, 경제 논리 위에서 움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이야기는 온갖 잡탕밥과 같다. 재료 자체도 참으로 다양해졌거니와 각종 요리법이 개발되고 서사 제작의 레시피들이 상호 참조된다. 오늘날의 서사는 사람들의 상식, 꿈과 기대, 판타지와 욕망을 현대적인 소재와 과학기술을 이용, 스펙터클한 장면들로 연출한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야기의 패턴과 주제, 양상은 지겹도록 단순하고 반복적이다. 이런 이야기들에 질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아마 망각력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 이야기의 원형과 구조를 발견하지 않고 주목하지 않으며 문제 삼지 않을 수 있는 무한긍정 정신의 소유자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새롭게 바뀐 이야기들의 외피들을 다시 한번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야기의 비본질적인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남주 여주의 얼굴, 장신구, 가구, 의상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도 이와 무관한 일은 아니다.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이야기는 무언가를 전달하고 소비를 진작시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알리바이처럼 작동하는 것만 같다. 무료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잠깐이지만 현실을 잊고 이야기 속으로 몰입하다 보면 재미도 있고 즐거워진다. 그러면 됐지 그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프랑스의 해석학자 폴 리쾨르
프랑스의 해석학자 폴 리쾨르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자신의 음란한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것 이상의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가 양적으로 보았을 때 다수와 대중은 아닐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대중문화는 그를 주된 타깃층으로 삼으려는 노력을 하는 대신 과감하게 그를 배제시킨다. 주요 소비대상, 드라마라는 이름의 상품이 개발될 때 그는 타깃 고객층은 아니다. 그럼에도 좋은 이야기와 나쁜 이야기, 영양가 있는 이야기와 불량 이야기를 발견하고 구별해야 하는 이유는 여전히 누군가는 양질의 이야기를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저질 서사가 범람할수록 그런 이야기에 대한 갈증은 증가하고 있다.

서사의 범람과 이야기의 질적 평균화는 우리 시대의 현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럴수록 사람들은 고급하고 본질적인 이야기에 목이 마르고 우리 시대는 이미 그런 시대에 돌입했다. 가치 있는 이야기, 자기 영혼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 자기가 발 디딘 현실과 가야할 곳을 일러주는 이야기, 우리의 현실감과 삶의 처지들, 우리가 인간이며 인간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이야기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그러한 이야기들을 찾아내고, 그 이야기들에 의미를 다시 부여하는 작업이야말로 우리에게 해석학이 필요한 이유다. 말하자면 잡담으로 소통되고, 상상력이 제거되고 맥락이 부여되지 못한 채 정보의 덩어리로 떠돌고 전락해버린 이야기를 구출하기 위한 작업이 해석학의 존재이유다. 말하자면 ‘가짜 이야기’(불량서사)들로부터 우리를 구출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가짜 이야기란 무엇인가? 텍스트가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를 돕지 않고 우리 자신을 망각하도록 돕는 이야기다. 어떤 이야기는 독자가 서사에 참여하고 해석하는 열정에 따라 무궁한 자기 이해에 도달하도록 만든다. 물론 우리 시대가 그런 것을 읽을 수 있도록 쉽사리 허락하지는 않는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혹은 따라 잡는 것)도 힘이 들어서 유튜브에서 요약본으로 보고, 그것도 1-2시간이 넘어가면 보기가 힘들어 15분 내외에 짤막한 요약 편집본으로 대체한다. 그것조차도 시간이 녹녹치 않아 유튜브 쇼츠로 시간을 때우는 경우가 많다. 이런 형국에서 두껍고도 지루하며 길고 긴 러시아 소설이나 프랑스 소설들을 어떻게 읽을 수 있겠는가. 물론 그런 소설을 꼭 읽어야 할 필요도 없다. 고전이야말로 모종의 이해계산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관점을 강요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억압적인 목록일 뿐임이 밝혀진 것조차도 이미 오래전 일이다. 

 

폴 리쾨르의 저서 '시간과 이야기'
폴 리쾨르의 저서 '시간과 이야기'

따라서 텍스트 자체의 퀄리티를 평가하는 작업은 매우 난경에 처해있다. 우리 시대는 그러한 구분을 수행하기 힘든 시대이며 구분 자체가 무용하다고 돌려진다. 대중적으로 인지되어 산업적 (경제)효과를 창출하면 좋은 이야기로 대접받는다. 사람들은 그러한 구분을 이데올로기적 작업의 결과로 의심하며, 그러한 판단을 수행하는 권한을 누가 부여했는가라고 묻고 그 권위를 부정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의 취향을 전제로 단지 어떤 텍스트가 좋다고 조심스레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타인의 취향’과 텍스트 선택 권리에 대한 인정이다. 이를 무시해선 안 된다. 하지만 또한 그 반대로 모든 이야기가 단지 주관적인 취미판단의 영역으로 떨어지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만은 않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특히 서사 전문가를 비롯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평가와 추천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사람들은 영화비평가의 이야기보다는 유튜버의 담백한, 가치관도 없고 강요하지도 않으며 단지 스토리만을 간추려 잘 전달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네가 뭔데 나한테 이야기의 해석 따위를 강요하지?’란 것이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이야기를 통해 세계와 자신을 이해하도록 돕는 이야기다.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과 세계와 타자에 대한 확장된 이해에 도달하도록 돕는 텍스트다. 리쾨르의 용어로 하자면 idem으로부터 ipse로 나가는 이야기다. idem은 타자성이 없는 정체성을, ipse는 타자성이 있는 정체성이다. 또한 ipse는 자기 자신이 경험한 모든 총체를 나의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여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는데 성공하는 이야기이다. 즉 이야기 정체성의 동일성을 유지해준다. 이때의 자기동일성이란 유아론적이거나 타자배제적인 동일성이 아니다. 끊임없이 타자나 세계와 교호하면서 더 넓고 웅숭깊은 세계 이해와 윤리적인 실천을 해나가는 주체적 형상이다. 서사가 단지 꿈과 몽상을 제공하고, 현실의 욕구불만을 대리 충족시키는 것으로 국한되어선 안 되며, 우리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방향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리쾨르는 텍스트 앞에서 ‘제자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텍스트를 자기 식으로 전유하여 자신의 사상을 펼쳐내기 위한 숙주로 삼으려는 태도가 아니다. 텍스트 앞에서 겸허한 자기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다. 텍스트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배우려는 자세, 그것은 언제나 세계와 타자의 진실 앞에 겸허한 자세이며, 세계를 전유하겠다는 제국주의적 열망이 아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야기란 마치 음식과 같은 것은 아닐까? 사람은 늘 배가 고파지지만, 메뉴는 바꾸어 식사를 하듯, 이야기를 바꾸어 섭식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세상 누군들 좋은 음식을 먹고싶지 않을까, 다만 무엇이 좋은 음식인지 그것을 찾아다니고 미각을 훈련할 시간과 사회적 조건이 안될 뿐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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