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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헤어질 결심>을 보면서 <현기증>을 생각하다(1)
[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헤어질 결심>을 보면서 <현기증>을 생각하다(1)
  • 김경욱(영화평론가)
  • 승인 2022.09.13 09: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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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마니아라면,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을 보면서 앨프리드 히치콕의 <현기증>(1958)을 떠올렸을 것이다. <헤어질 결심>에서, 형사 해준(박해일)이 변사 사건의 용의자 서래(탕웨이)를 감시하다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현기증>에서 전직 형사 스카티(제임스 스튜어트)는 대학 동창 앨스터의 부탁으로 매들린(킴 노박)을 미행하다 사랑에 빠진다. <헤어질 결심>과 <현기증>은 모두 여주인공의 죽음으로 끝난다. <헤어질 결심>의 마지막 장면에서 해준은 밀려오는 파도 속에서 (죽은) 서래를 찾아 “서래 씨!”라고 절규한다. 특히 이 장면으로 인해 논란이 많은 <현기증>의 마지막 장면을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는 스카티가 쥬디가 추락한/뛰어내린 교회 종탑에 서서 망연자실한 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너무나 많은 영화가 그렇기는 하지만, 두 편의 영화는 모두 ‘사랑’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의 판타지

<헤어질 결심>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기도수의 아내 서래는 남편의 시신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처음 등장한다. 오수완 형사는 서래가 남편의 죽음 앞에서 동요하지 않는 모습, 신문 받을 때 웃는듯한 모습 등을 보며 그녀를 범인으로 의심한다. 반면 해준은 아내와의 관계가 권태롭기 때문인지 그런 서래의 모습에 오히려 흥미를 느낀다. 게다가 해준은 잠복하며 서래를 관찰하다가 그녀가 간병인으로서 할머니를 헌신적으로 돌보거나 길고양이에게 밥을 챙겨주는 등의 모습을 보며 범인이라는 의심은 사라지고 점점 매혹되어 간다. 오수완 형사와 관객이 보기에는 서래가 여전히 의심쩍어 보이는데, 해준은 그렇지 않다.

 

카를로타 발데스의 무덤 앞에 서 있는 매들린
카를로타 발데스의 무덤 앞에 서 있는 매들린
​카를로타 발데스의 초상화를 바라보는 매들린​
​카를로타 발데스의 초상화를 바라보는 매들린​

<현기증>에서, 앨스터는 자신의 아내 매들린이 재규어 자동차를 끌고 하루 종일 구불구불한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몽유병자처럼 돌아다니곤 하는데, 무엇을 하는지 알아봐달라고 스카티에게 부탁한다. 매들린은 성당의 묘지에서 카를로타 발데스의 무덤 앞에 서 있거나, 미술관에서 카를로타 발데스의 초상화를 한참 동안 바라본다. 스카티의 미행이 계속되던 어느 날, 매들린은 금문교 아래에서 물로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한다. 스카티가 물에 빠진 매들린을 구해주면서, 두 사람은 급속하게 가까워진다. 매들린은 남자에게 버림받고 비참하게 죽은 카를로타 발데스에게 빙의되어 자신이 죽어야 할 운명이라고 스카티에게 이야기한다. 스카티의 여자 친구 미즈는 스카티에게서 매들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생각하지만, 스카티는 오히려 죽음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매들린에게 점점 더 빠져든다.

 

 

우아한 귀부인 매들린
우아한 귀부인 매들린
촌스럽게 보이는 쥬디
촌스러운 모습의 쥬디

서래와 점점 가까워지던 해준은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그녀가 남편을 죽인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게 된다. 멘탈이 붕괴된 그는 그녀를 떠나간다. 스카티의 간절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매들린은 결국 교회 종탑에 올라가 투신자살한다. 고소공포증 때문에 그녀의 투신을 막지 못한 스카티는 멘탈 붕괴로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된다. 퇴원한 스카티는 매들린을 잊지 못한 채 그녀의 흔적을 찾아 거리를 돌아다니다 어딘가 매들린을 닮은 쥬디를 발견하게 된다. 스카티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은 쥬디는 플래시백을 통해 사건의 전모를 회상한다. 앨스터가 부유한 아내를 완전범죄로 살해하기 위해 쥬디를 매들린으로 행세하게 한 다음, 스카티의 눈앞에서 매들린이 자살한 것처럼 꾸민 것이다.

그러므로 스카티는 진짜 매들린을 만난 적이 없으며, 애초에 매들린으로 변장한 쥬디를 만난 셈이다. 따라서 죽었던 매들린이 쥬디로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스카티는 기적을 경험한 듯 환호한 다음, 쥬디와 사랑을 나누며 행복한 미래로 나아가면 된다. 그런데 왜 스카티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일까?(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그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쥬디가 매들린인데, 스카티가 쥬디를 사랑할 수 없다면 스카티는 그녀의 무엇을 사랑한 것일까? 이 질문을 해준에게도 할 수 있다. 해준은 서래가 남편을 살해한 다음에 만나 사랑에 빠졌다가 그녀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헤어질 결심을 한다. 서래는 변한 것이 없는데 해준은 그녀의 무엇을 사랑한 것일까?

스카티를 사랑하는 쥬디는 자신의 현재 모습 그대로 스카티와 다시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지만, 스카티는 진한 화장에 촌스러운 옷을 입은 노동계급의 쥬디를 사랑할 수가 없다. 스카티는 쥬디에게 매들린의 옷과 화장과 헤어스타일을 하도록 해서 그녀를 아름답고 우아한 귀부인인 매들린으로 만든 다음에야 비로소 사랑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는 속담처럼 스카티와 해준의 사랑에는 ‘환상’이 개입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사실 그 사람이 아니다! 이 환상을 더욱 강화시키는 것은 나르시시즘이다. 스카티의 사랑에 작용한 나르시시즘은 쥬디가 아니라 매들린을 사랑의 대상으로서 ‘자아 이상’의 자리에 놓게 된다. 그래야 스카티 자신도 멋지고 품위 있는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되기 때문이다.

해준은 서래 앞에서 “품위 있고 자부심 있는 경찰이었는데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고, 완전히 붕괴됐다”고 탄식한다. 그럼에도 그는 서래를 체포하는 대신, 그녀의 범행 증거가 되는 물증을 제거한다.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트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라는 말을 끝으로 그는 그녀에게서 떠나간다. 이 말을 녹음한 서래는 해준이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말로 해석하고 끝없이 반복해서 들으며 위로를 받는다. 그러나 해준의 사랑에도 나르시시즘이 개입하고 있다면, 아름답고 선량한 미망인이 아닌 주도면밀하고 냉혹한 살인자에게 매혹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품위와 자부심 따위로 장식된 그의 나르시시즘이 붕괴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해준은 진짜 완전히 붕괴될 것이므로 그는 서래를 범인으로 체포할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무도 못 찾게 하라는 것’은 서래가 아니라 해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말이라고 해석된다. 그렇기 때문에 서래가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다”고 할 때, 해준은 “내가 언제 그랬냐?”며 황당해한다.

쥬디는 매들린의 살해에 가담한 죄가 있으므로 스카티와 마주쳤을 때 도망쳐야 했지만, 그에 대한 사랑에 미련이 남아 그렇게 하지 못한다. 서래는 해준을 잊으려고 다른 남자와 결혼까지 했지만, 해준을 만나고 싶어 그가 살고있는 이포로 온다. 그리고 두 여자 모두 ‘마침내’ 자신의 계급 또는 사회적 조건에 걸맞지 않은 남자를 사랑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P.S.: <헤어질 결심>과 <현기증>을 비교해 보면, 장면의 설정, 인물의 옷 색깔, 벽지 등에서 유사한 점을 여러 군데 찾을 수 있다. <헤어질 결심>에서, 해준과 서래가 송광사에서 데이트하는 장면은 <현기증>에서, 스카티와 매들린이 세콰이어 숲에서 데이트하는 장면과 묘하게 비슷한 점이 있다.

 

 

글·김경욱
영화평론가. 세종대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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