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리다 갑자기 멈추게 되면 그제야 달려온 속도를 가늠하게 된다. 그리고 멈춰 선 자리에서 비로소 나를 들여다보게 된다. COVID19은 전속력으로 내달리던 우리를 갑자기 멈춰 세우고, 그동안 인지하지 못하던 삶의 속도를 감지하고, 들리지 않던 혹은 귀 기울이지 않던 소리와 리듬을 듣게 했다. 그리고 일상과 가장 멀었던 “격리”를 새로운 방식으로 일상 속에서 위치 지었다. 자고로 말은 상황에 따라 변하고 벗어나고 확장되고 새로운 의미로 탈바꿈한다. 올 상반기 <나의 해방일지>의 ‘추앙’이 그렇고, <헤어질 결심>에서 ‘붕괴’가 그렇듯, COVID19로 인해 ‘격리’ 또한 거듭 났다. 이제 격리는 비자발적이고 강제적인 고립과 차단만이 아닌,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일상 속에서 휴지기를 갖고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는 행위로도 확장되었다.
<로그 인 벨지움>은 팬데믹 시대에 갑자기 고립된 배우 유태오의 자전적 영화이다. 벨기에 엔트워프로 합작 영화를 찍으러 간 태오는 유럽의 락다운으로 각국에서 모였던 영화 제작팀이 모두 자국으로 돌아간 후 그 도시에 홀로 남는다. 한국 오가는 하늘 길 역시 막힌 상태에서 태오는 갑작스레 마주한 고립으로 그동안 내달렸던 삶의 속도를 멈추고 마음 한켠으로 미뤄둔 “자기 자신”(이후 “또 다른 태오”로 명명)과 대면하게 된다. 영화는 태오와 또 다른 태오가 서로 대화하는 ‘도플갱어’ 서사로 자기 성찰을 가시화하되, 동시대의 가볍고도 파편적인 일상 감각을 경쾌하게 기입해 익숙하고도 새로운 리듬을 구축한다.


영화는 태오의 일과를 인스타데일리 형식으로 해시태그하며 시작한다. 자고, 먹고, 운동하고, 대본 읽고, 요리하는 그의 고립된 하루 일상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은 오늘날 익숙한 소셜미디어 감각이자 활동이다. 개인의 일상 속 경험을 세상과 접속하는 것이다. 인스타의 리듬으로 <로그 인 벨지움>은 내가 나를 보고, 내가 나를 연출하고, 내가 나를 촬영하는 주어와 목적어가 같은 폐쇄 회로 작업 속에서 나르시즘을 심리적 기제로 활용해 자기 내면과 마주하고 외면을 드러내는 자전적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영화는 태오와 또 다른 태오의 대화 장면을 통해 태오의 다양한 면을 보여준다. 고립이 가져온 자기 성찰의 소중한 시간이자 배우 태오의 다양한 면을 전시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영화는 격리 기간 오디션의 방법으로 셀프-테이프를 진행하던 중 또 다른 태오가 등장한다. 태오 앞에 나타난 또 다른 태오는 태오의 겨울처럼 태오 맞은 편에 앉아 태오의 과거이자 숨은 자아로 등장하지만 동시에 태오의 상대역으로 태오를 인터뷰한다. 그는 태오에게 “꿈”을 묻는다. 그러나 태오는 더 이상 자신의 꿈을 꾸지 않고 배우로서 꿈을 꾼다면서도, 연기가 가짜 같다고 진짜 나를 느끼고 싶다고 대답을 한다. 태오와 또 다른 태오는 질문하고 답하고 혹은 밀쳐둔 자신 존재의 물음을 들추면서 동시에 태오가 가진 매력을 발산한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고 요리를 하고 춤을 추는 태오는 태오 자신과의 대면인 동시에 배우 태오를 드러내는 시간이기도 하다. 멈추어진 고립의 시간을 가장 태오-답게 활용하는 역설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태오의 카메라는 세상을 향한 창이자 반영하는 거울인 동시에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이고 자신을 전시하는 셀프 테이프 즉 포토폴리오이기도 한 것이다.


영화는 영화에 대한 오마쥬가 가득하다. 차이밍량 감독의 문구 “사람이 외로울 때 그 사람은 진짜가 된다. 진짜 자기 자신” 에서 시작한 영화는 문구의 내용만큼이나 출처인 차이밍량 감독의 이름이 두드러진다. 이어 영화는 고전 영화에서부터 익숙한 도플갱어 서사에서 <베를린 천사의 시>, <중경삼림>, <접속> 등을 참조하고 언급하면서 영화에 대한 영화로 자리매김한다. 필름영화에 대한 향수와 한국영화에 대한 감성, 그리고 디지털 시대 영화의 존립에 대한 동시대 영화의 담론까지 유연하게 건드리는 영화는 시네필로서 태오의 취향을 읽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로그 인 벨지움>의 태오는 다큐멘터리 속 대상만이 아니라 다큐멘터리 자체와 동급이 된다. 고립 속 성찰을 담은 태오의 자전적 영화는, 마치 연기 잘하는 배우가 연기를 인지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러운 듯, 자기 연출과 연기가 자연스러운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COVID19 시기의 격리를 태오-다움과 태오-드러내기를 넘나들며 풀어낸 것이다.



사실 영화는 아무리 자전적 영화라도 혼자 찍을 수는 없다. 혼자처럼 보이지만 주변의 도움과 협력으로 제작되고 완성되고 배급되는 게 영화이다. 우리네 삶과 비슷하다. 각자의 고립과 성찰은 지극히 사적일 지라도 전 세계적인 고립의 현상은 공동의 감각을 형성해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영화 또한 영화의 자리에 대해 치열한 고민과 성찰이 있었다. 이 시간들을 잊지 말고 시상식 뒤에 “또 다른 영화”와 마주해 서로 손을 잡아야 할 시간이기도 하다.
사진출처: 네이버
글·이승민
영화 연구자, 평론가, 기획자, 강연자로 활동 중이다.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영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다큐멘터리의 오늘>(공저), <아시아 다큐멘터리의 오늘>(공저), <영화와 공간> 등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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