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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립의 시네마 크리티크] 습한 클리셰 벗고 새로운 관습으로 창조한 메마른 도시남녀 연애담, <접속>
[윤필립의 시네마 크리티크] 습한 클리셰 벗고 새로운 관습으로 창조한 메마른 도시남녀 연애담, <접속>
  • 윤필립(영화평론가)
  • 승인 2022.10.04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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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와 라디오를 켜면 눈물 젖은 사연이 넘쳐나고 극장에서는 남녀의 습한 러브스토리가 정화 작용 즉, 카타르시스의 대명사를 자부하던 감정 과잉 시대가 있었다. 이 시기 혜영(미워도 다시 한번, 1968~1970)과 경아(별들의 고향, 1974) 그리고 영자(영자의 전성시대 1975)와 이화(겨울여자, 1977) 등으로 대표되는 한국영화 속 여성들은 남성 중심의 한국 사회가 규정해 놓은 성역할 안에서 눈물 마를 날 없었다.

멜로드라마는 이렇게 가족 혹은 사랑하는 남녀라는 친근한 관계 안에서 억압과 금기를 재현한다. 그리고 이때 과잉된 에너지가 동원되기 마련이다. 한국영화의 멜로드라마에서 그러한 친근한 관계는 주로 가부장제 안에 있었고 그들이 동원한 과잉은 대부분 눈물이었다.

이러한 한국 영화의 습한 클리셰는 한국 사회가 급변하던 80년대는 물론이거니와 이른바 X세대라는 신세대가 등장하고, 문화 대통령이라 칭송되던 서태지의 출현 이후까지도 마치 한국 멜로드라마의 영화적 전통인양 지속되는 듯했다. 그래서 한국 멜로의 주인공들은 90년대 중후반까지도 ‘가족’과 ‘눈물’의 굴레를 벗어나기가 어려워 보였다. 그렇게 한국 관객들은 오로지 여성들만이 사회적 위계질서에 희생당하거나 자신의 욕망으로 자멸과 파멸을 오가는, 눅눅한 장르적 관습에 갇힌 한국형 멜로드라마에 서서히 지리멸렬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관객들이 외면하면 철옹성 같던 관습도 무너질 수밖에 없는 법. 이 시기 즉, 90년대 중반을 변곡점으로 한국 멜로 영화의 서사는 변화를 꿰하기 시작한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여성이 아닌 남성들이 불치병으로 죽어 나가기 시작했고, 전문직 여성의 출현으로 아쉽게나마 젠더적 평등을 이루고자 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하지 않는 현실을 뛰어넘어 아예 멜로의 현장을 판타지 속에 펼쳐 놓기도 했다.

 

덕분에 한국 멜로 영화에서도 이전과 다른 느낌과 에너지가 생성될 수 있었으나 한국영화에서 눈물은 멜로드라마의 미덕이기라도 한 것인지 그 서사는 여전히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장윤현 감독의 1997년 작품 <접속>은 이렇게 관객들조차 한국 멜로의 그 지리멸렬함에 서서히 자포자기할 때쯤 등장한다.

홈쇼핑 텔레마케터 수현(전도연)은 친구의 애인을 사랑하지만 감정을 숨기며 살다 눈물마저 말라붙었다. 방송국에서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 PD로 일하는 동현(한석규)은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한 후 감정의 무덤 속에 갇혀 지낸다. 그러다 둘은 우연히 PC통신 유니텔을 통해 서로를 알게 되고, 지속적인 채팅으로 친분을 쌓아가지만 둘의 실제 모습은 인터넷 통신이라는 익명성 속에 가려져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수현은 용기를 내 동현에게 먼저 손을 내밀지만 동현은 그런 수현을 먼발치에서 지켜보기만 할뿐 쉽게 마음을 결정하지 못한다. 한동안 망설이던 동현은 수현이 남긴 전화 메시지를 듣고 마침내 좀 더 다가가기로 결심한다.

 

영화 <접속>에는 여느 멜로드라마처럼 익숙한 남녀의 사랑이야기가 등장한다. 때문에 수현과 동현으로 대표되는 두 도시남녀의 만남은 자칫 구태의연하게 흐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만남은 1990년대에만 해도 신문물이었던 PC통신이라는 신선한 공간에 접속하여 ‘가족’과 ‘애틋한 남녀 관계’라는 관습적 틀을 자연스럽게 극복한다. 이렇게 가상공간으로 넘어간 남녀의 연애담은 여전히 구시대적 관습에 익숙했던 한국 멜로의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며 이른바 ‘새로운 감수성의 러브스토리’를 구현해낸다.

특징적인 것은, <접속>에서 이렇게 한국 멜로의 장르적, 관습적 강박에서 벗어나 철저히 개인화된 인물들은 모두 감정 순환의 문제를 겪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면에는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 가운데 한 개인을 거대 시스템 속 부품으로 여기며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살아갈 것을 강요하는 비정한 사회가 존재한다. 그러한 점에서 수현과 동현은 사회 시스템의 온갖 강요 속에 무의식적으로 내면이 황폐해지고 황량해져가는 도시인의 모습을 환유하기에 충분했다. 거기에 도심의 가로등과 네온사인의 불빛을 무심히 늘여놓는 몽타주들은 오색영롱한 듯 권태롭고 절제된 두 인물의 내면과 조화를 이뤘다.

 

장윤현 감독은 <접속> 개봉 당시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만나고자 하는 ‘의지’에 관한 이야기라고 밝힌 바 있다. 즉, 누군가를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 없고, 다가가고 싶지만 다가갈 수가 없기에 서러워 눈물 흘리며 고통의 나날을 보내는, 그런 사랑의 시련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덕분에 <접속>은 한국 멜로영화가 이전에 답습하던 사랑의 아픔이나 실패로 인한 고통과 분노 그리고 눈물이라는 눅눅한 관습에서 멀어질 수 있었다.

 

이렇게 <접속>은 한국 멜로의 지독스럽도록 습한 기운을 말끔히 닦아낸 뒤 그 빈자리를 오히려 안구 건조증과 무미건조함으로 채운다. 그리고 그것은 멜로 자체에 묻어 있는 눅눅함마저 산뜻하게 말림으로써 장르적 클리셰를 넘어 새로운 관습을 창조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접속> 이전에는 쉽게 볼 수 없었던 것이기에 하나의 명백한 사건이었고, 그 이후에도 이 영화를 뛰어넘는 멜로적 서사는 쉽게 볼 수 없었다는 점에서 뚜렷한 지표이자 준거라 할 만하겠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접속>(1997.9.13.개봉)

 

 

글·윤필립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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