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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한국 자연주의 하녀 영화가 탄생시킨 근대화의 하녀: <하녀> 김기영
[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한국 자연주의 하녀 영화가 탄생시킨 근대화의 하녀: <하녀> 김기영
  • 정문영(영화평론가)
  • 승인 2022.10.11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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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기영의 <하녀>에 대한 다시 보기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는 1960년대 한국의 근대화 과정이 본격화되는 시기에 탄생한 한국의 원조 하녀 영화이다. 김기영 자신 뿐 아니라 후대 임상수 감독의 <하녀>(2010)에 이르기까지 지난 반세기 동안 일련의 리메이크를 통해 한국의 하녀 영화 장르를 탄생시킨 원작이기도 하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한동안 이 영화와 김기영의 작품 세계는 소수 전문가 집단을 제외하고 영화계와 대중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21세기에 들어와 마침내 이 영화가 디지털 영화로 복원되고 재조명을 받게 된 것도 국내보다는 제작 후 40년이 지나서 이 영화를 처음 접한 국제 영화계의 극찬과 호평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한국 영화의 잊힌 클래식이었던 이 영화와 김기영은, 봉준호 감독이 칸 국제영화제 인터뷰에서 <기생충>이 받은 “<하녀>를 만든 한국의 거장 김기영의 영향”을 언급했듯이, 최근 한국 영화가 이룬 국제적 성과에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영화와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후대 감독들이 오마주를 표하는 위대한 감독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이에 60여년이 지난 지금 국제 영화계가 <하녀>의 탁월성을 인정하는 근거가 무엇이고, 한국 영화의 국제적 위상을 입증하는 최근 영화들과 감독들의 성과에 이 영화가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를 확인해보는 <하녀>에 대한 다시 보기를 시도해본다.

국제적인 호평을 받게 된 한국의 하녀 영화의 원조로서 이 영화에 대한 다시 보기는 들뢰즈의 서구 하녀 영화에 대한 논의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서구 하녀 영화 평가에 대한 들뢰즈의 분명한 기준은 자연주의 영화로서의 성공 여부이다. 서구 하녀 영화의 원조가 되는 영화는 미르보(Octave Mirbeau)의 소설 어느 하녀의 일기(The Dairy of a Chambermaid, 1900)를 각색한 르누아르(Jean Renoir)의 동명 영화(1946)이다. 들뢰즈는 르누아르의 영화와 이 영화를 리메이크한 부뉴엘의 동명 영화(1964)를 비교하여, 르누아르는 자연주의 영화로의 진입에 실패했고, 부뉴엘은 성공했다는 평가를 한다. 따라서 부뉴엘의 하녀 자연주의 영화가 더 우수한 영화이며, 그는 스트로하임(Eric Von Stroheim), 로지(Joseph Losey)와 함께 위대한 3인의 자연주의 영화감독으로 선정될 수 있다는 것이 들뢰즈의 주장이다.

들뢰즈의 부뉴엘의 하녀 영화 평가를 부연 설명한다면, 이 영화는 근대화 과정의 서구 사회의 환부를 해부하여 그 심연에서 작동하고 있는 “충동들”의 기호들로 충만한 자연주의적 본원적 세계를 “충동-이미지”(impulse-image)로 표출한 자연주의 영화이다. 게다가 그 닫힌 자연주의적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탈주의 가능성을 그 세계 내부에서 발견하는데 성공한 자연주의 영화라는 것이며, 그래서 부뉴엘이 위대한 자연주의 영화감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들뢰즈의 부뉴엘 영화 읽기는 김기영의 <하녀>를 한국의 위대한 자연주의 하녀 영화로 읽어내는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 김기영의 영화가 부뉴엘의 영화보다 4년 앞서 제작되었다는 사실이 뒷받침하듯이, 들뢰즈의 평가 기준을 적용한 상호텍스트적 읽기는 전자가 후자보다 자연주의 하녀 영화로서 더 먼저 그리고 더 뛰어난 성과를 이루었다는 평가가 가능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다시 보기를 통해 스콜세지(Martin Scorsese) 감독을 비롯하여 국제 영화계가 뒤늦게 인정한 이 영화의 탁월성 또한 한국 자연주의 하녀 영화로서 이 영화가 성취한 성과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러한 성과는 최근 한국 영화의 국제적인 성과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주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2. 근대화 과정에서 탄생한 타자로서의 하녀

 

근대의 전근대적 노예라 할 수 있는 하녀는 서구와 한국 사회의 근대화 과정이 파생시킨 많은 타자들 중 하나이다. 물론 서구와 한국 사회의 근대화는 시차 뿐 아니라 다른 시대적‧사회적 배경에서 진행되어 왔으며, 그 과정에서 탄생한 하녀 역시 동일한 타자로 취급될 수는 없다. 사실 서구 유럽처럼 귀족이라는 상류 계급과 아닌 부류의 계급이 분명히 구별되었던 역사를 가진 적이 없는 한국 사회에서는 하녀가 하나의 계급으로 형성된 적은 없다. 따라서 1960년대 남의 집에서 숙식하며 그 집의 부엌일을 위주로 각종 가사노동을 도맡아 ‘식모살이’를 한 젊은 여자들의 호칭은 ‘가정부’ 또는 ‘식모’가 더 적확한 표현이다. 우리에게 하녀라는 호칭은 선진화된 서구의 하녀 이미지 또는 성적 판타지의 대상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김기영이 ‘하녀’라는 서구의 계급 호칭을 제목을 선택한 이유는 이러한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효과와 함께 이 영화가 하녀의 계급과 신분상승의 욕망을 주제로 하는 드라마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하나의 계급이든 아니든 서구와 한국 하녀의 공통점은 모두 근대화가 초래한 사회적 불안과 공포를 해소하기 위한 타자로 부당한 대접을 받아 왔다는 것이다. 탈근대화 과정에 있는 포스트모던 사회가 탄생시킨 하녀 역시 크게 다르지 않는 대우를 받고 있고, 소비된 후 버려지는 상품 또는 “비체”(abjection) 취급을 당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근대화, 탈근대화, 또는 최근 글로벌화 시기든, 서구 또는 한국 사회든, 실체 또는 이미지로든, 부당한 취급을 받아온 하녀는 착취된 후 사라지기를 강요당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든 하녀는 억압을 통해 오히려 강력한 전복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즉 “억압된 것의 귀환”(the return of the repressed)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녀는 전복적인 성정치성을 초래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성적, 계급적 타자로 항상 존재해 왔다.

영화 또한 근대화 과정에서 탄생한 매체로 타자로서의 하녀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데 주력해온 대표적인 대중매체인 것은 사실이다. 하녀를 주인공 또는 제목으로 하는 하녀 영화조차도 하녀라는 계급 또는 실체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당대 사회의 집단적 광기와 폭력을 해소하기 위한 일종의 마녀사냥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지적과 비판을 대부분 받아왔다. 그러나 영화는 억압받는 타자로서의 하녀 이미지를 재생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을 통해 오히려 “억압된 것의 귀환”의 전복성을 구현할 수 있는 유력한 정치적 대중매체인 것도 사실이다.

 

3. 서구와 한국 하녀 영화

 

김기영은 1959년 경북 김천에서 한 식모가 치정 문제로 유아를 살해한 엽기적인 사건을 모티브로 <하녀>(1960)라는 당시 최고 흥행작의 영화를 만들었다. 이후 그는 적절한 간격을 두고 스스로 시대적·사회적 변화를 수용하여 <하녀> 삼부작으로 간주되는 <화녀>(1971), <화녀 '82>(1982)라는 리메이크를 만들었다. 그는 하녀 뿐 아니라, 1960, 70년대 한국사회가 파생시킨 여공, 호스티스와 같은 여성 타자들에 대해서도 일관된 관심을 보였고, <하녀> 삼부작 외에도 1967년 명보극장 사장 살인사건을 다룬 호스티스와 첩을 주인공으로 한 <충녀>(1972), 그리고 이를 리메이크한 <육식 동물>(1984)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작품들로 구성된 그의 작품 세계는 바로 자연주의 영화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서구와 한국 하녀 영화 모두 일상에서 일어난 그러나 엽기적인 사건으로 당시 스캔들이 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해서 그 장르가 만들어졌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사실 근대화를 추진시키는 거대서사의 주역들이 결코 아닌 “작은 사람”인 하녀가 사회적 주목과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가십 거리와 사회적 이슈가 된 큰 스캔들의 주인공이 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하녀 영화 장르까지 만들 정도로 주목을 끈 대표적인 스캔들로는 이 영화가 모티브로 한 김천 하녀 살인 사건, 그리고 서구 하녀 영화는 히틀러가 독일에서 집권을 한 1933년 프랑스 소도시 르망(Le Mans)에서 일어난 자매인 두 하녀가 마님과 딸을 엽기적으로 살해한 파팽(Papin) 자매 사건을 들 수 있다. 파팽 자매 사건과 김천 하녀 살인 사건은 모두 부르주아 가정에서 일상의 노동을 대신해주는 하녀들의 범죄 사건들이다. 사실 당대의 사회적 관심은 가사 노동을 대신하는 근대적 노예로서 하녀의 실체와 실상이 아니라 “불온한” 그리고 “비정상적인” 섹슈얼리티가 표출된 스캔들의 장본인으로서의 하녀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스캔들은 당대 사회에 마녀사냥의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지만, 반면에 사회 체제의 은밀하고 추악한 것들을 폭로시킬 수 있는 무기로 사용되기도 했다.

 

4. 한국 자연주의 하녀 영화

 

김기영의 <하녀>는 한국의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50, 60년대의 중산층 사회의 실제 환경을 구성하는 김동식(김진규)의 집과 그 심연에 작동하고 있는 자연주의적인 본원적 세계에 거주하는 충동적인 등장인물들, 그리고 기괴한 영화적 이미지들로 충만한 영화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당대 한국사회의 환부를 그 심연에서 작동하고 있는 충동들의 충동-이미지로 표출한 자연주의 영화이다. 이 영화의 중산층 이층집이 점차 밀실공포증을 불러일으키는 폭력적 공간으로 전환하는 것은 그 집의 심연에 내재한 자연주의적 세계가 수위로 떠오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연주의 소설의 대가 졸라(Émile Zola)가 당대의 실제 환경을 재현하지만 또한 그것을 퇴락 소진시켜 본원적인 자연주의적 세계로 복귀시키듯이, 이 영화 역시 중산층으로 진입하는 것이 목표인 동식과 그의 아내(주증녀)가 새로 마련한 현대식 이층집으로 구체화된 실제 환경은 점차 소진되어 자연주의적 세계로 돌아간다. 이 영화의 계단이 상징하듯이, “가장 비탈진 경사면의 법칙”, 현실적 세계와 연결된 다른 세계로 미끄러지는 저항할 수 없는 경사면의 법칙에 따라 자연주의적 세계로 마침내 진입한다.

이 영화의 하녀(이은심)는 식모에게 타자성을 분출할 수 있는 괴물, 팜므 파탈로 돌변할 수도 있는 서구의 하녀 이미지를 투사하여 리메이크한 하녀로, 그로테스크한 인물로 등장한다. 김기영이 이렇게 리메이크한 하녀를 등장시킨 것은 그가 타자로서의 하녀 자체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다. 부뉴엘의 하녀 셀레스틴(Célestine, Jeanne Moreau))과는 달리 김기영의 하녀는 이름도 없이 대상화된 타자로만 보일 수 있다. 사실 이름이 없는 것은 동식의 아내, 마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예술을 하는 무능한 가장 대신 아내가 재봉틀질을 하며 중산층으로의 진입에 주역을 그리고 하녀의 신분상승 욕망에 영화의 서사가 전개되지만 한국의 마담과 하녀에게는 이름도 부여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강화된 타자화는 그녀의 도착적이고 잔인한 충동을 부각시키고 자연주의적 인간 동물로의 전락을 더욱 부각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희생시킨 타자들의 귀환에 대한 지배계급의 불안과 공포를 해소하기 위한 마녀사냥 영화라는 지적을 받을 여지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이 영화와 임상수의 리메이크 <하녀>까지 한국의 하녀 영화의 하녀는 주인공라기보다, 중산층 계급의 마녀사냥놀이 나아가 최상류층의 포스트모던 귀족놀이를 위한 욕망의 대상으로 등장해왔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영화는 오히려 1960년대 국가 주도형의 근대화를 이루면서 급격히 서구 자본주의화를 겪게 되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근대화가 가져온 다양한 욕망 사이에서 방황하는 중산층 가정의 가장 동식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있다고 하겠다. 하녀는 이러한 가장을 무력하게 만들고 몰락시키는 팜므 파탈, 괴물 여자, 악녀의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가장과 중산층 가정을 전락시킨 인간 동물과 같은 김기영의 하녀는 셀레스틴보다 더 강력한 성정치적 전복성을, 이로써 자연주의적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정치적 전복성을 구현할 수 있는 타자가 될 가능성이 더 높은 것 또한 사실이다.

또 다른 위대한 자연주의 감독 로지의 영화 <하인>(The Servant, 1963)에서처럼 이 영화에서도 이층 계단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장소로 가파른 경사면의 선을 따라 전락을 표출하는 도착과 타락의 폭력이 일어나는 곳이다. 김기영의 <하녀>의 영향을 받은 봉준호의 더욱 양극화된 자본주의 사회의 “계단 영화” <기생충>에서는 2층 계단이 아니라 지하로 내려가는 숨겨진 계단이 추락과 타락의 폭력이 행사하는 공간이 된다. <하녀>에서는 지하가 아니라 지상 위를 오르내리는 2층 계단은 중산층 진입 성공의 상징이자 동시에 폭력적인 하강 벡터를 발생시키는 사건들이 일어나는 영화의 핵심적인 장소가 된다. 동식 부인이 하녀를 설득해 낙태를 시키는 곳, 하녀가 주인집 아들 창순(안성기)을 떨어져 숨지게 하는 곳, 쥐약을 먹고 함께 자살하기로 한 동식이 죽어가는 하녀를 뿌리쳐 떨어뜨리는 곳도 이 계단이다. 이러한 일련의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사건들이 <하녀>의 실제 공간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자연주의 영화의 본원적인 세계라는 다른 세계로 미끄러뜨려 진입시키는 벡터를 생성하게 된다. 하녀 또한 무자비한, 폭력적인 충동이 작동하는 본원적 세계 속에서 잔인한 본능에 의해 추동되는 인간 동물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한국의 자연주의 영화가 탐구하는 자연주의적 본원적 세계에는 부뉴엘의 그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점이 발견된다. 그는 소설 원작과 르누아르의 시대적 배경을 파시즘과 부패로 프랑스가 파탄의 길로 접어드는 1930년대로 옮겨와 부르주아 사회의 치부를 다루기 위해 부르주아 계급의 보수적 정치성, 즉 군국주의적, 반유대주의적, 파시즘적인 정치적 신념을 투사할 수 있는 신분상승 욕구를 가진 하인, 죠셉(Joseph, Georges Géret)이라는 계급적 타자를 등장시킨다. 그리고 계급적 타자인 동시에 성적 타자인 하녀 셀레스틴을 하인과 대립적 관계에 있는 적대적인 관찰자로 등장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지배계급사회의 부당하고 반동적인 정치성을 공격하기 위해 파시즘의 정치적 폭력과 성적 도착을 동격화하는 반동적 성정치성의 의식을 계급적 타자인 죠셉에게 투사하고, 그에게 저항하는 성적, 계급적 타자인 셀레스틴의 급진적 성정치성의 전복성을 전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부뉴엘은 하인 죠셉을 본원적, 자연주의적 인물로, 하녀 셀레스틴은 자연주의적 세계 밖에 그 자연주의적 세계를 관찰하는 “보는 자”(seer)로 등장시킨다. 반면에 김기영의 하녀는 부뉴엘의 하인 죠셉처럼 본원적 세계 속에서 약탈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죠셉이 잔인한 성적 도착의 악한이듯이, 김기영의 하녀 역시 도착적인 성적 욕망을 가진 팜므 파탈의 악녀로 간주된다. 자연주의적 타락은 바로 “자신을 향한 전복”을 통해 전개된다. 다시 말해, 자기 속에 내재하여 항상 “작동 중”에 있는 충동이 그 자신을 폭력의 먹이로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충동은 그 자신을 타락과 죽음이자 비체-되기 속으로 몰아넣을 수밖에 없다.

 

쥐를 무서워하지 않는 그로테스크한 하녀는 결국 쥐처럼 쥐약을 먹고 자살하여 스스로를 “비체”(abjection)로, 그리고 동반자살을 통해 동식을 비체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비체가 되게 하는 것은 바로 “정체성, 시스템,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 즉 “경계선, 지위, 규칙을 존중하지 않는 것”인데, 자신의 몸을 시체로 만드는 것은 “가장 극도의 비체”가 되는 것이라고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는 말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한국 하녀 영화에 있어서 하녀는 자살을 하며, 이러한 비체-되기의 수행성을 통해 매우 강력한 성정치적 전복성을 구현한다는 것 또한 서구 영화의 하녀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페미니스트 식수스(Hélène Cixous)와 클레망(Catherine Clément)의 용어를 빌면, 김기영의 하녀는 중산층 가정의 “구멍”, “유혹녀”로 마님, 즉 동식의 처에 의하여 쫓겨날 위기에 처하지만, “주인마님의 억압된 것”, “환상적 대상”, “동물”로 그 집에 남아서, 그녀의 존재, 몸 자체의 수행성으로 동식을 무능하게 만들 수 있으며, 그의 타락을 가속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하녀의 몸의 수행성을 통해 성정치적 전복성이 가속화시키는 타락은 바로 자연주의적 타락이다. 그리고 셀레스틴과는 달리 김기영의 하녀는 전락과 타락을 가속화하여 그 자연주의적 세계의 “내부로부터” 탈주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본원적 여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은 타락과 죽음이라는 난국으로 자신을 몰고 갈 수밖에 없는 그녀의 선택이다. 이러한 하녀의 파괴적 선택은 바로 “정치적 선택”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논의를 중심으로 볼 때, 김기영의 <하녀>는 “폭력의 정치성”을 구현하는 우수한 자연주의 영화들 중 하나로 평가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들뢰즈가 우수한 자연주의 영화라고 평가한 부뉴엘의 하녀 영화보다도 한국 김기영의 자연주의 하녀 영화가 전복적인 성정치성을 전용하는 대신 그 자체로 더 강력한 정치적 전복성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5. <하녀>의 해피엔딩

 

김기영의 <하녀>의 엔딩은 자연주의적 타락과 죽음에서 생성과 출구를 발견하도록 유도하는 대신 극적인 반전을 시도한다. 지금까지 본 영화의 장면들이 모두 환상이라고 밝히는 반전으로 간극을 드러내 보이는 엔딩으로 이 영화는 끝난다. 일종의 영화 속의 영화 기법을 사용하여, 신문 기사를 읽고 있던 동식 부부가 등장하는 영화의 첫 장면으로 다시 돌아와 지금까지 본 긴박한 영화의 내용이 모두 신문에 난 기사에 대한 동식의 스토리텔링으로 만들어 버리는 허망한 결말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파멸로 치달은 영화 속 영화의 자연주의적 결말 뒤에 모든 것은 동식의 환상의 산물이었다는 안도감을 주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피엔딩은 가장을 유혹해 신분상승을 꽤한 성적 욕망을 표출한 하녀의 추락을 통한 마녀사냥으로 이 영화를 보도록 유도한다. 가장의 외도로 인한 가정의 파괴를 하녀의 마녀사냥으로 해결한 해피엔딩은 중산층 가부장 헤게모니의 위기 극복과 구축 강화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영화는 근대화의 시작을 맞아 새롭게 구축되어야 할 가부장 헤게모니를 드러내놓고 강조하는 명백한 가부장적 영화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영화 속의 영화의 자연주의적 타락의 결말이 동식의 환상의 산물로 명백하게 처리되고 있듯이, 이 영화는 당대 근대화가 초래한 시대적 불안감에 대처한 명백한 김기영의 남성적 환상의 산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그 해피엔딩은 자연주의 영화의 결말로서 하녀의 비체-되기의 수행성이 발휘하는 성정치적 전복성의 강도가 그것을 무화시키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환상으로 처리하는 방법밖에는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을 역설하는 장치로 볼 수 있다.

 

6. 한국 자연주의 하녀 영화의 성정치적 전복성

 

들뢰즈의 자연주의 영화 읽기에 따르면, 부뉴엘의 하녀 영화에서 본원적 세계 밖에 존재하는 하녀는 김기영의 하녀처럼 폭력적인 힘을 행사하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힘의 부재와 본원적 세계로부터의 배제되었기 때문에 그녀에게서 남자들을 감금하고 있는 본원적 세계로부터 탈주할 수 있는 구원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기영은 하녀를 셀레스틴보다는 죠셉처럼 본원적 세계 내부에 본원적 여자로 남게 함으로써 그녀와 동식을 자연주의적 동반 타락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그녀의 이러한 타락과 죽음은 자연주의적 타락으로 본원적 세계로부터의 탈주를 유도하는 폭력의 정치성을 시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들뢰즈가 부뉴엘의 자연주의 영화의 성과를 본원적 세계 내부로부터 탈주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에서 높이 평가했지만, 사실 그의 하녀 영화는 본원적 세계 밖에 있는 성적, 계급적 타자인 하녀의 성정치적 전복성을 전용하여 탈주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뉴엘보다 먼저 만들어진 한국의 자연주의 하녀 영화가 정치성을 위해 하녀의 성정치적 전복성을 전용하는 대신에 그것 자체를 본원적 세계 내부로부터의 열림의 전복성으로 구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뒤늦게 국제 영화계의 찬탄을 받는 이유 그리고 최근 한국 영화가 이룬 국제적 성과에 끼친 영향력이 어떤 것인지를 가능해볼 수 있다.

 

 

출처: 『비교문학』(58)에 실린 「루이스 부뉴엘과 김기영의 하녀 영화의 정치적 · 성정치적 전복성」 (399-424)에서 논의된 김기영의 <하녀>를 중심으로 한국 하녀 자연주의영화의 성과를 주목하여 전체적으로 다시 쓰기를 한 글이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정문영
영화평론가.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다양한 매체와 장르의 텍스트들을 상호텍스트(intertext)와 팔림세스트(palimpsest)로 읽는 각색연구가 주요 관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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