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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립의 시네마 크리티크] 불세출의 여성서사 , 정서경의 <작은 아씨들>
[윤필립의 시네마 크리티크] 불세출의 여성서사 , 정서경의 <작은 아씨들>
  • 윤필립(영화평론가)
  • 승인 2022.10.17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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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스럽게 현실적인 대사, 표독스럽게 일관적인 묘사, 독살스럽게 진보적인 서사, 도드라지는 촌철살인의 여성서사

리미티드 시리즈(limited series)의 경우 오티티(OTT)의 등장으로 북미에서는 이미 드라마와 영화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한국의 콘텐츠 시장도 여러 오티티 플랫폼의 등장으로 이미 다변화가 이뤄졌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콘텐츠가 이윤으로 이어지는 만큼 양질의 오리지널 콘텐츠를 다량 확보하려는 노력이 눈물겹다. 덕분에 케이(K)-콘텐츠의 홍수. 문자 그대로 ‘영화 같은 드라마' 혹은 ‘드라마 같은 영화’가 넘쳐난다. 전자와 후자 중 무엇이 호평이고 무엇이 혹평이냐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모든 콘텐츠가 양질로 평가받을 수 없음은 명백하다. 보는 이 즉, 콘텐츠 소비자들(시청자 내지는 관객)의 개별 취향은 확실하고, 선택은 냉정하며, 평가는 가차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최근 막을 내린 tvN의 <작은 아씨들>(2022)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영화 같은 드라마’로 회자된다. <헤어질 결심>(2022)에서 박찬욱 감독식 표현주의적 화면구성에 시너지를 심어줬던 류성희 미술감독이 세트를 책임졌고, 그 덕에 기존 TV드라마에서는 주로 단순 배경에 지나지 않았던 세트가 <작은 아씨들>에서는 적극적인 서사 장치로 기능한다. 그렇게 류성희 감독의 세트는 극 속에서 하나의 서브텍스트로 작용하여 배우들의 연기에 활기를 불어넣고, 그것은 정서경만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 구축에 힘을 실어 준다. 뿐만 아니라 싱가포르 로케이션에서 방대한 스케일로 연출된 오인주(김고은)와 최도일(위하준)의 현금 인출 과정과 차량 추격신은 적지적소에 활용된 OST와 연동되어 케이퍼 무비를 방불케 한다.  

 

<작은 아씨들> 대표 이미지(티빙 제공)
<헤어질 결심>의 한 장면(네이버 영화 제공)

덕분에 드라마 <작은 아씨들>은 근래 오티티 플랫폼으로 선보인 한국 리미티드 시리즈 가운데서도 단연코 눈에 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찬사는 드라마 <작은 아씨들>만의 전무후무한 압도적 여성서사에 방점이 찍힐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의 TV 드라마에서 주로 보아 왔던 여성들은 대부분 남성들의 주도성 없이는 제대로 정의될 수 없을 때가 많았고, 그 결과 여성들이 주역인 극에서조차 여성서사가 실종되는 웃지 못할 일들이 반복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여성들의 이야기는 존재하지만 여성 주도 서사는 갈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남녀의 달콤한 로맨스, 예쁘고 멋있는 남녀 주인공 등을 드라마의 성공 법칙이라 여기는 콘텐츠 제작자들의 인식 문제가 내재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우리 시대의 극이란 활자로 찍어 낸 텍스트 즉, 대본을 전제로 하며, 대본은 그것을 집필하는 작가를 전제한다. 따라서 대본에 표현되는 모든 내용은 작가의 상상력 안에서 의도와 목적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묘사된 실체는,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작가의 의식 혹은 무의식이 반영된 일종의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드라마 속 캐릭터들은 작가 스스로가 구축한 세계관 안에서 작가의 철학대로 의미가 부여된 상징들이라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향후 한국 드라마 속 여성서사는 정서경 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것이라 본다. 여기서, 그동안 한국 드라마에서 여성서사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근본 원인을 콘텐츠 소비자에게서 찾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다는 항변. 그러나 <작은 아씨들>의 성공 앞에서 그것은 무력한 변명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드라마 <작은 아씨들>(2022)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루이자 메이 올컷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 소설은 가난한 마치(March) 가문의 자매들이 백인 남성중심의 보수적 사회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성장해 가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은 19세기부터 1950년대까지 여성들의 참정권, 아프리카계 영국/미국인들의 권리 신장 등을 주도한 1세대 페미니즘의 성격을 띤다. 즉, 자유주의적 여성주의를 표방한 것이다. 이후 페미니즘은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는 노동 문제에 입각하여 급진적 성격으로 전개되고, 1990년대 이후부터는 좀 더 다양한 계층과 영역으로 확장되면서 성소수자 권리 운동과도 결탁하여 포스트모던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이것이 흔히 문화비평이론에서 정리하는 페미니즘의 사적 전개 과정이다. 

 

<작은 아씨들> 원조 북커버(아마존닷컴 제공)

이와 같은 페미니즘 이론은 대중문화 속에서 '타자화' 된 여성들에게 주목한다. 즉, 남성이 주체화된 문화 속에서 여성들이 (부당하지만) 자연스럽게 객체화되는 고정성과 보편성을 비판하며, 배경으로 밀린 여성들을 중심부로 소환해 목소리를 돌려주고 그들을 전경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흔히 대중문화 속에 재현된 여성의 이미지가 긍정적이냐 혹은 부정적이냐 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 또한 여성성을 또 다른 방식으로 특정 관념 속에 가두게 된다는 점에서 큰 한계가 있었고, 이에 최근에는 젠더적 정체성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모한다는 점에 더 큰 주목을 하고 있다. 

전술한 관점에서 드라마 <작은 아씨들>은 단순히 여성 해방이나 노동, 타자와의 연대를 이야기하는 데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보다 매 순간 변화하고 진전하는 여성 캐릭터들 그리고 그들의 연대와 연대의 가치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돈, 섹스, 권력이라는 전인류를 유혹하는 원죄적 속성과 맞물리면서 결과적으로는 단순히 여성의 이야기로 젠더화/특수화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구원에 대한 문제로 보편화된다. 바로 이 점에서 드라마 <작은 아씨들>에 재현된 여성들은 기존의 페미니즘에서 펼쳤던 주요 논제를 이미 극복하고 넘어선 상태로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이들은 이미 섹시즘(sexism) 따위는 갈아마셔 버린 상태인 것. 따라서 앞으로 전진만 있을 뿐이다. 덕분에 드라마 <작은 아씨들>은 원작 소설과 차별화되면서 그야말로 '정서경의 <작은 아씨들>'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정서경 작가(네이버 제공)

물론 정서경의 <작은 아씨들>이 서사적으로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다. 개연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빈번히 등장시킨 우연성은 보는 이들에게 피로감을 주기도 했고, 악당들이 모두 죽어야만 끝이 나는 전개는 막장드라마의 진부한 서사를 상기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는 모든 드라마 혹은 작가들이 숙제처럼 안고 가야 할 난제일 뿐, 문제는 그 과정을 얼마나 그럴듯하고 있음직하게 납득시키냐 하는 핍진성이다. 정서경의 <작은 아씨들>은 문제의 이 핍진성을 활자 외 요소 즉, 공간 설정과 소품 활용 그리고 그것으로 풍기는 상징과 환유 등으로 영악하게 풀어내며 위기를 모면한다.

일례로, 정서경의 <작은 아씨들>은 이야기 전개상 싱가포르라는 나라가 큰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지구상에 많고 많은 나라들 가운데 왜 굳이 싱가포르여야만 했을까? 싱가포르는 각종 지표들이 말해주는 자타공인 부유한 도시국가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3년을 싱가포르에서 살았던 사람으로서 알게 된 바로는, 부유한 도시국가 이미지 이면에는 척박한 도시국가를 유지해야만 했던 실질적 일당 독재 체제가 있다. 이 체제 속에서 국민들은 집회의 자유조차 박탈당하고, 좁은 땅덩어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극심한 경쟁을 해야 한다. 그 경쟁의 야생성과 비인격성은 싱가포르의 또 다른 이면이기도 하다.

싱가포르의 강력한 사회보장제도는 국민들에게 세금이 공평히 분배된다는 인상을 줄 뿐만 아니라 국민들 스스로도 부유한 국가에 사는 중산층 이상의 시민이라는 인식과 만족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 그들은 특정 정치 가문이 정부와 기업을 독식하며 나라 전체를 조종하는, 그런 불공정한 곳에서 나고 자란 것이다. 그러나 날 때부터 사회 시스템이 그러했기에 누군가 짚어주기 전에는 감지하기 어려운 그런 불공정이다.

한국도 지난 역사에서 독재 정권을 통해 경험했듯이, 보통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더 수월하게 국민을 조종할 수 있으며, 그러한 생리를 학습한 일부 교활한 무리들은 그 수법을 자신들의 부와 명예를 쌓고 그것을 유지하는 데에 고스란히 이용한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선한 모습으로 다가오지만 그 속에는 칼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 높이, 더 높이 올라가야 하기에. 이렇게 <작은 아씨들>에서 활용한 부유한 도시국가의 양면성은 원령재단과 박재상 일당의 이미지는 물론이고 각자 나름의 욕망에 빠져 있는 선량한 세 자매의 이미지와도 겹친다.

우연일지는 몰라도 이러한 작은 디테일들이 이 드라마의 서사적 구멍을 충분히 메꿔 주고 있으며, 지독스럽게 현실적인 대사는 그 핍진성의 농도를 높여준다. 또한, 아무런 반성도 사과도 없이 자멸해 버리는 원령가에 대한 절대악으로서의 묘사는 표독스럽도록 일관적이며, 그들에게 각자의 방식대로 대항하며 승리하는 세 자매의 주체적이고도 주도적인 서사는 독살스럽도록 진보적이다. 이를 통해 정서경만의 촌철살인적 여성 주도 서사가 빛을 발하며, 그렇게 정서경의 <작은 아씨들>은 방황하던 한국 드라마 속 여성서사의 신기원을 이뤄낸다. 그야말로 불세출의 여성서사라 할 만하다.  

 

 

글·윤필립
영화평론가. 대학에서 강의하며 공연기획 '최영주의 in클래식' 전속 스토리 작가,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담화분석 및 스토리 문법과 문학/서사치료 연구, 한국문화교육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 비평 대상,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 당선으로 등단했으며, 만화평론상, 대종상 등의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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