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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립의 시네마 크리티크] 따뜻한 유대로 창조한 산뜻한 콜라주, <안경>
[윤필립의 시네마 크리티크] 따뜻한 유대로 창조한 산뜻한 콜라주, <안경>
  • 윤필립(영화평론가)
  • 승인 2022.10.24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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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안경>(오기가미 나오코, 2007)의 극 초반, 각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말이나 행동 양식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다소 당황스럽다. 소수의 승객들을 뱉어내는 작은 비행기, 그들이 발을 딛고 걷는 나른한 활주로, 한 사람 정도 드나들까 말까 싶은 소박한 공항, 곧이어 나타나는 시골풍경과 한적한 해변, 그리고 그 어딘가에 자리잡은 소규모 민박집. 명확한 것은 주로 파란색 그리고 녹색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공간적 배경들 뿐 그 외 등장인물에 관해서는 별로 드러나는 사실이 없다. 이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 누구인지, 왜 이 곳에 모이게 되었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들은 무슨 관계인지 등 우리가 흔히 누군가와의 첫 만남 때 궁금해 하기 마련인 그런 정보들은 마치 시 속의 상징과 비유처럼 간접적으로 풍기기만 할 뿐 직접적인 설명이 제공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의 개봉 당시 한 포털 사이트에 국내 유명 평론가는 '이 정도면 게으른 영화'라는 한 줄 평을 달기도 했었다.

그런데 사실 그게 진실이다. <안경>은 게으른 정도가 아니라 아주 게을러 터졌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정도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 영화에서는 그것이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안경>은 애당초 굳이 애써 이해하려 들 필요가 없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풍경화를 감상하듯 그저 바라보거나 지켜보기만 해도 충분한 작품이다. 편한 해변의자에 앉아 멍때리듯 바라보는, 시시때때로 변하는 바다색과 모래색 그리고 그 주변을 채우는 기분 좋은 파도 소리와 고요한 정적. 바로 거기에 '보는 이' 즉, 내가 있는 것이다. 이런 대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그것이 주는 휴식을 느끼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미덕인 것이다. 그 휴식에 한번 빠져들고 나면 이제 이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더 이상 타자가 아니라 내 이웃처럼 느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보는 이'로서의 내가 등장인물들의 삶 속에 동참할 때 비로소 이들이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 나에게만 서서히 드러나게 된다. 영화 <안경>은 바로 그러한 유대의 형성 과정과 관계의 깊이에 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이렇게 알다가도 모를 이야기는 단순히 보는 이에게만 당혹감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마다 민박의 투숙객이자 주인공인 타에코(코바야시 사토미)가 느끼는 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딘지 모르게 신비로운 사쿠라(모타이 마사코)와 하마다 민박의 주인장 유지(미츠이시 켄)가 어떤 관계냐고 묻는 타에코에게 유지의 친구 하루나(이치카와 미카코)는 이렇게 되묻는다.

 

하루나: 어떤 관계로 보이는데요?

타에코: 남매나 부부요?

하루나: 그 둘이 어디를 봐서 부부예요? 참 사람 볼 줄 모르시네.

 

타에코가 남매나 부부라고 답한 이유는 사쿠라와 유지의 관계가 그만큼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고, 그렇게 답하는 순간까지 타에코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관계는 사회 통념상 혈연으로 긴밀하게 결속된 법적 가족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런 법적 관계를 따지고 들자면 그 둘은 그저 타인 대 타인일 뿐이지만 하루나는 타에코에게 이렇게 답한다.

 

타에코: 그럼 무슨 관계인데요?

하루나: 아주 대단한 관계죠.

 

황당한 답변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전형적인 가족 관계의 틀에 머물러 있던 타에코에게 이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가족 관계의 가능성이 시사되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물론 타에코는 그저 의아해할 뿐 여전히 그 참 의미를 제대로 짚지 못한다. 하지만 감독은 하루나의 무심한 말투를 빌려 이 영화가 전달하려는 가장 중요한 미덕 즉, 혈연으로 엮이지 않았더라도 서로 다름을 포용하면서 같은 가치를 공유하고 한 곳을 바라볼 줄 안다면 누구나 가족을 뛰어넘는 '아주 대단한 관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은근슬쩍 드러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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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타에코는 사쿠라, 유지, 하루나 등 하마다 민박의 사람들을 보며 그들이 어딘지 모르게 가족처럼 격이 없다는 걸 느끼지만, 자신은 휴대전화 신호가 안 잡히는 곳을 찾아 무작정 이곳으로 흘러 들어왔을 만큼 관계에 지친 처지였기에 그들과의 관계 속에 개입되기를 거부한다. 이러한 타에코의 경계심은 영화 초반 해변의 빙숫집 앞에서 웃으며 정중히 빙수를 권하는 사쿠라에게 타에코가 단호한 말투로 거절하며 마치 인생의 모든 짐을 싸 넣어 놓은 듯한 큰 여행 가방으로 평행선을 긋고 지나가는 장면에서 잘 나타난다.

이 장면에서 사각 프레임의 상단에 놓인 사쿠라는 그렇게 타에코가 그어 놓은 선 밖에 머물면서도 타에코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그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극이 흐르는 가운데서도 변함이 없는 사쿠라의 모습은 마치 여성으로 형상화된 풍요로운 자연과 닮아있으면서도 어떤 부분에서는 모성과 부성을 동시에 지닌 '어른'의 상징과도 같다.

사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타에코에게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은 사쿠라뿐만 아니라 하마다 민박의 주인장 유지와 동네 중학교 교사 하루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타에코를 향한 열린 태도뿐만 아니라 몇 가지 더 독특한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매일 '메르시 체조'로 함께 아침을 열고, 서로 음식을 나누며 거의 모든 식사를 함께할 뿐만 아니라 빙수를 먹으면서 바다를 바라보며 그야말로 '멍때리는 일'(영화 속에서는 사색으로 표현됨)에도 기꺼이 동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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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타에코에게 그런 일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들로만 느껴질 뿐이기에 매번 "아니요. 저는 사양하겠습니다."라고 하며 관계성 맺기를 거부한다. 그 이질성은 마치 어디서 떨어져 나온 지도 모른 채 맑고 투명한 청록색의 바다 표면에 부유하는 썩은 나무판자 같다. 실제로 영화 전반부 내내 타에코는 검정이 두드러지는 의상을 입고 등장하면서 자신의 이질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또한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은 전체적으로 아이레벨의 원거리 쇼트로 스크린을 채움으로써, 이 작품에 극적인 효과를 덧입히기보다는 일상성과 사실성을 표현하는 데 주력한다. 하지만 타에코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근거리 쇼트를 비교적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캐릭터의 주관적인 심리와 그 변화를 부각시킨다. 덕분에 조용한 일상 가운데서도 잠잠히 변화하는 캐릭터의 모습이 비교적 쉽게 포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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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에코는 하마다 민박의 사람들 중 가장 이질적인 존재지만 타에코에게는 오히려 그들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매일 정중한 인사말로 자고 있는 자신을 깨우는 사쿠라의 문안 인사는 배려나 친절이 아니라 무례함의 극치로 다가온 데다 아침마다 해변에 모여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공동의 의식이라도 올리는 것처럼 다 함께 체조를 하는 모습은 마치 사이비 종교의 교주와 그 추종자들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하마다 민박에서의 생활이 어느 순간 지리멸렬해졌을 때 결국 타에코는 현재의 위치에서 정반대 편에 있는 마린 팔라스라는 곳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한다.

그러나 그렇게 찾아간 마린 팔라스에도 자신이 원하는 온전한 휴식은 없었고, 일을 해야만 밥을 먹을 수 있는 노동이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안경>에서는 이 장면에서 유일하게 익스트림 롱 숏으로 그 배경이 설정되고, 그 프레임 속에 갇혀 분주히 삽질하며 노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 영화에서 가장 희극적으로 느껴진다. 노동으로 바쁜 일상을 벗어나 여유와 쉼을 찾아 떠나온 휴양지에서 삶의 보람을 느끼기 위해 또다시 중노동을 자진해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편히 몸을 뉘어 온전히 쉴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타에코는 그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진짜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된다.

그러한 깨달음의 순간 사쿠라의 도움으로 다시 하마다 민박으로 돌아오는 타에코는 그동안 인생의 무게를 지고 다니는 듯 끌고 다녔던 큰 여행 가방도 과감히 버린 채 오롯이 스스로에게만 집중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타에코가 버린 것은 여행 가방뿐만이 아니다. 그동안 선을 긋고 지냈던 사쿠라에게 다가간 것은 사쿠라에 대한 경계를 풀었다는 것이며, 결론적으로 그것은 하마다 민박의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 또한 버렸음을 의미한다. 즉, 타에코가 사쿠라의 자전거에 올라타는 순간은 마침내 스스로 "모두가 안경을 쓰고 있는" 하마다 민박의 사람들과 가족이 되기로 결심하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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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에서 가족은 소재 그 자체만으로 지리멸렬하고 그로 인한 피로감이 크기만 하던 때가 있었다. 한국 영화만 놓고 본다면, 그러한 원인의 중심에는 늘 여성들을 구시대적 가부장제의 굴레에 가둬 둔 채 대를 잇는 도구로만 여기며 물레나 돌리게 했던 남성들이 있었다. 80년대 들어 이러한 영화 속 남성들은 점차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고, 90년대에는 그러한 남성들이 괴로움을 토로하다 마침내 가장으로서의 아버지는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채 쓸쓸한 등을 보이며 은막에서 퇴장했다. 한국 가족 이야기의 화두인 동시에 갈등의 불씨였던 가부장적 인습이 사라지자 그간 가족을 다루는 영화의 미덕이라도 한 듯 반복되던 눅눅한 눈물바람도 설 자리를 잃었다. 덕분에 한국 영화 속 가족들은 습한 클리셰에서 자유로워졌지만 현실 속 가족의 붕괴는 더욱 가속화되었고, 그러한 현실을 외면한 영화 속 가족의 모습은 이내 그 자체로 구태의연함의 산물이 되었다. 이에 한국 영화를 비롯하여 전 세계의 가족에 관한 영화는 이제 그 초점이 낯선 이들의 유대 혹은 연대를 향하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안경>으로 드러나는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선구적인 통찰력은 놀랍다. 가족의 해체와 붕괴가 무색해지는 신개념의 가족 내지는 대안적 가족 공동체를 은은하고도 은근한 시선으로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오래 전에 이미 익숙한 듯이. 오기가미 나오코의 타에코는, 그렇게 서로 다르지만 안경을 쓴 동질성의 이방인들과 유대를 맺고, 그 곳을 떠날 때는 더는 안경 없이도 명확하고도 산뜻한 시선으로 다시 세상과 눈맞춤을 할 용기를 얻는다. 그렇게 감독은 이 영화를 보는 수많은 타에코들에게 이 전에 맛본 적 없는 빙수 같은 달콤한 위로를 전한다.

 

 

글·윤필립
영화평론가. 대학에서 강의하며 공연기획 '최영주의 in클래식' 전속 스토리 작가,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담화분석 및 스토리 문법과 문학/서사치료 연구, 한국문화교육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 비평 대상,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 당선으로 등단했으며, 만화평론상, 대종상 등의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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