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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 <브로커>:혈연을 넘어 신뢰로 이룬 계약 가족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 <브로커>:혈연을 넘어 신뢰로 이룬 계약 가족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22.10.27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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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아기를 거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비난 받아 마땅한 일이다. 아니 그 자체로 범죄다. 실제로 저 말에는 두 가지 범죄가 적시되어 있다. 하나는 아이를 버린 범죄고 다른 하나는 아이를 거래한 범죄다. 하지만 적어도 영화의 서사는 이렇게 범죄로 규정된 항목의 견고함을 붕괴시킬 수 있는 정교한 발파장치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이를 테면 왜 아이를 버릴 수밖에 없는 지를 정교하게 따라가 보아야 하고 왜 아이를 거래하려 하는지를 이해해 보려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도덕적 단죄를 거침없이 행하듯 그런 행위는 볼 것도 없이 모조리 범죄라고 규정해버리면 변명의 여지없이 상현(송강호)과 아이를 버린 소영(이지은)은 몰염치한 범죄자로만 남게 될 것이다. 그때 영화가 해야 할 일은 훈육적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사회적 규정을 넘어선 보이지 않는 메시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영화 <브로커>는 일단 보편적인 시선을 가진 인물 즉 상현과 그 일당을 현행범으로 규정하고 체포하기 위해 그 뒤를 바짝 붙어서 쫓고 있는 경찰관을 관찰자처럼 배치해둔다. 하지만 등장인물 모두는, ‘아기 우성’으로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차라리 이 영화는 ‘그렇게 가족이 되는가?’를 되묻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가 있다면 하필 소영은 원치 않은 임신으로 아이를 낳았다는 것과 그들 모두는 고아 출신이라는 것이다. 이 만남에서 누가 더 불행한가를 묻는다면 소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영화는 상현을 자발적인 희생자로 그린다는 점에서 상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그들의 모습은 전혀 불행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보니 이 영화에서는 불행과 행복의 관점이 불안정하게 뒤엉켜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이를 버리려다 만나게 된 사람이 범죄자여서 불행에 불행이 겹쳤다고 말할 수 있다면, 결국 아이를 버리려던 범죄를 통해 가족과도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 아니냐는 반문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영화는 그런 방식으로 가족이란 우리가 알지 못한 방식으로도 완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제목을 ‘브로커’로 한 이유는 브로커라는 말이 담고 있는 부정적인 뉘앙스에 숨어 있는 또 다른 효과가 있는데 바로 거기에는 도덕적 단죄를 감행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 효과란 신뢰의 관계다. 그러면 ‘가족’이라는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생긴다. 가족은 신뢰관계가 먼저인가? 선천적인 혈연관계가 먼저인가? 라고 말이다. 우리는 대체로 ‘가족처럼’이란 말을 신뢰관계의 상징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합의를 신뢰한다는 의미의 ‘카르텔’이라는 말 보다 가족 같다는 말이 훨씬 더 유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가족이라는 의미는 상현과 소영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그들은 아이를 거래하는 과정까지만 동참하기로 굳은 신뢰의 합의를 보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거래를 성사시켰다면 그것은 상대적인 관계를 성립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상현과 소영이 아기 우성을 사이에 두고 어떤 거래를 성사시켰다면 그들은 이미 같은 영역에 놓인 가족관계의 첫 걸음을 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신뢰관계 속에서 이미 서로의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관객들이 <브로커>를 보면 소영과 동수(강동원)가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관계를 통해서 가족이 되어 감을 느끼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사실은 소영과 아기 우성의 관계가 실질적인 모자(母子) 관계로 발전해 간 덕분이 크다. 아기 우성을 버리려 했다고 해서 엄마가 아닌 것은 아니니까. 그래서 소영은 경찰인 수진(배두나)과 최종적인 거래를 한다. 하지만 그 거래는 다른 사람들을 밀고한 것이 아니라 가족의 시작인 신뢰관계의 첫걸음을 뗀 것이다.

 

사실 상현은 소영과 마찬가지로 혈연관계를 넘어서는 신뢰관계가 가족의 시작임을 몸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기 우성이 존재하는 한, 상현이 보기에, 동수와 소영 사이에서 자신은 걸림돌이다. 이런 자각은 가족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하게 작동한다. 왜냐하면 이 자각을 통해 상현은 결국 동수와 소영이 꿈꿀 수 있는 가족 관계를 이른바 철저하게 파괴할 수도 있는 태호(류경수)를 자처하여 없애 버림으로써 가족을 완성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태호는 동수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인물이다.)

상현의 이런 희생으로 인해 이 영화는 가족이란 혈연관계보다 신뢰관계가 선행할 때 가능해 질 수 있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할 수 있게 된다. <브로커>는 어쩌면 가족의 사회적 정의를 똑바로 직시할 수 없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가족관계의 실체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일지 모른다. 실제로 그들은 가족을 원했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신뢰를 찾길 원했다. 그렇게 이 영화는 가족관계에 대한 기준을 도덕적 판단을 넘어선 신뢰의 관계에서 찾고자 한다. 그리고 그 새로운 화두는 결국 경찰관인 수진에게로 옮아간다. 그렇게 마지막 바다에서의 수진과 우성의 모습은 결국 체포에 성공한 방식으로 가족 관계의 신뢰를 보호하고 완성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장면이 된다.

 

 

 

글·지승학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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