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이현재의 시네마 크리티크] 블랙바의 영화들
[이현재의 시네마 크리티크] 블랙바의 영화들
  • 이현재(영화평론가)
  • 승인 2022.10.27 18: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환상과 실재의 우정을 위한 시도들에 대하여

우리가 영화관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앙드레 바쟁은 사람들이 영화가 실현되기 전부터 영화에 대한 관념을 가져왔다고 지적한다. 바꾸어 말할 수 있다면, 영화는 사람들의 기대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므로 기대가 없다면, 영화도 없을 것이다. 당연히 영화는, 영화 이전부터 품은 기대들이 충분히 반영될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그 노력은 이미지를 확장하려는 시도들로 이어졌다. 영상을 한 눈에 담을 수 없게 확장시켰고, 급기야 스크린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으며, 최근에는 아예 이미지와 시야를 동일시하게 만들었다. 이미지를 확장시키려는 시도들이 갖는 공통점은 스크린과 연관되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스크린은 카메라만큼이나 기대의 재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흥미로운 것은 이미지가 확장될 때, 영화는 꾸준히 스크린은 가리려는 노력을 해왔다는 것이다. 아이맥스가 관객에게 동체시력을 요구하는 이미지를 던지기 시작하며, 스크린은 관객에게 이미지를 고정시켜주는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3D 이미지는 스크린을 뚫었고, 최근에는 스크린이 관객의 시선에 따라 부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기술은 점점 스크린을 영화의 영역에서 몰아내고 있는 중이다.

스크린은 어째서 영화의 영역에서 밀려나고 있는가? 만약 이미지와 스크린이 함께 드러난다고 생각해보자. 스크린이 노출될 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은 ‘블랙바’(Black Bar)가 생긴다는 것이다. ‘블랙바’란 스크린이 영상보다 클 때 생기는 잉여를 지칭하는 것으로, 스크린과 영상이 온전히 조응되지 않는 순간을 조건으로 생성된다. 극장은 종종 ‘블랙바’로 인한 이미지와 스크린의 비조응 때문에 관객에게 몰입을 제공하는데 실패하기도 하는데, 극장에서 이와 같은 실패를 방지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마스킹 커튼을 통해 스크린을 축소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영상에 스크린 크기에 조응하는 화면비의 검정색 ‘매트’(Mat)를 영상의 바탕에 깔아, 레터박스(Letterbox) 혹은 필러박스(Pillarbox)을 스크린에 투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레터박스’나 ‘필러박스’ 또한 빛으로 만든 검정색이기 때문에 스크린에서 반사되는 것을 막기 어렵다. 강한 일방향성을 가진 레이저 영사기와 같은 특수한 장비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매트’로 마스킹 효과를 온전히 구현하기는 힘든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극장은 마스킹 커튼을 이용하여 이미지와 스크린을 조응시키고 있다. 만약 마스킹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극장의 과실인 것이다.

 

〈퍼스트맨〉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퍼스트맨〉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아이맥스의 블랙바, 프레임의 확장과 축소

위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스크린이 영화의 영역에서 밀려나고 있는 이유는 스크린과 정확히 조응되지 않는 이미지는, 관객에게 몰입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스크린을 드러내는 영화들이 등장하고 있다. 스크린을 드러내는 영화들이 스크린을 드러내는 방식은 ‘블랙바’를 통해서이다. 흥미로운 점은, ‘블랙바’가 스크린을 드러내기 시작한 기원에는 영화들의 기원이 스크린을 영화로부터 몰아내고자 했던 동기가 강력히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시가 아이맥스 영화들이다. 사람이 볼 수 있는 한계치까지 영상의 영역을 확장하여 극강의 몰입을 제공하겠다는 기획이었으나, 값비싼 필름 때문에 일부분만 아이맥스로 촬영하고 나머지는 비스타 혹은 스코프 비율로 채운 가변화면비의 영화들이 ‘아이맥스 영화’라는 이름을 부여받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움직일 리 없는 스크린 때문에 가변화면비의 영화들은 레터박스를 붙여야 한다는 운명을 피할 수 없음에도, 관객들은 이에 대하여 별다른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이미 정한석 평론가가 씨네21에서 크리스톺 놀란의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의 아이맥스 화면들을 비평한 「아이맥스가 시네마를 구해낼 수 있을까?」(2012-08-09)를 통해 설명한 바와 같이, “다른 영화를 볼 때는 잘 느끼지 못하는 이상한 심리적 미의 기준이 생긴다는 걸” 관객들이 인정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것은 관객이 아이맥스로 찍힌 부분을 영화적으로 중요한 체험으로 인정하고, 다른 부분은 그보다 덜 중요한 체험으로 인지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 이후, 마찬가지로 놀란이 연출한 <덩케르크>(2017)와 데이미언 셔젤의 <퍼스트맨>은 그에 대한 응답같이 보이는 영화이다. <덩케르크>는 아이맥스 장면을 이용해 전쟁이라는 시공간의 풍경을 재현하고, 비-아이맥스 장면들과의 병치를 통해 탈출이라는 시간의 이미지텔링을 직조한다. <퍼스트맨>은 러닝타임 내내 2.39:1로 진행되던 이미지를 달착륙장면에 이르러서야 아이맥스 화면비로 확장시킨다. 닐 암스트롱(라이언 고슬링 분)의 시야로 진행되는 이 장면은, 러닝타임 내내 그가 마주해야 했던 혼란과 죽음들에 맞물린다. 그리고 그가 달에서 느꼈을 정념을 아이맥스라는 시야를 통해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이렇듯 아이맥스는 스크린에 확장과 축소라는 개념을 부여함으로서 이미지텔링을 이루는 쇼트들에 ‘질’(Quality)을 부여하고, 그 ‘질’의 상승을 통해 서사적인 스펙터클을 마련한다. 그리고 이렇게 마련된 스펙터클을 통해 영화가 지향하는 메시지의 방향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 스틸컷 (출처 : 네이버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스틸컷 (출처 : 네이버 영화)

3D의 블랙바, 프레임 안과 그 너머

이미지의 확장과 축소로 정리될 수 있는 아이맥스 가변화면비의 지향점은 흥미롭고, 더 알아봐야 할 지점들이 분명히 남아있다. 그러나 본고에서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스크린 위에 잉여로 남은 ‘블랙바’이다. 스크린과 화면이 온전히 조응되지 못해 생기는 이 잉여는, 그저 극장의 불성실에 의한 결과물 혹은 조응해 실패해 남겨진 잔여물에 불과한 것인가? 최근 개봉하고 있는 일련의 가변화면비 영화들은 비-아이맥스임에도, 필연적으로 레터박스 혹은 필러박스를 산출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상하좌우 모두에 블랙바가 생기는 윈도우박스(windowbox)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는 마치 고의로 스크린 위에 잉여를 남겨놓겠다는 감독의 의도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본고는 그 의도와 의의를 고민해보고자 한다. 우선 질문을 구체화하고, 제대로 던지기 위해 앞서 이야기하던 아이맥스 영화로 돌아가 보자. 확장과 축소에 상관없이 블랙바가 쓰인 사례가 있는가?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2013)는 1.85:1을 기본으로 하는 아이맥스 영화이지만, 이상한 가변비율이 등장한다. 보통의 아이맥스라면 아이맥스 비율과 조응을 위해 주 화면비를 한 개로 유지하는 것이 보통의 경우이다. 그러나 <라이프 오브 파이>는 간혹 2.00:1이나 2.39:1의 화면비(편의상 두 화면비를 ‘스코프 비율’로 부르겠다)로 바뀌기도 한다. 스코프 비율 장면에서 화면 안의 오브제는 프레임을 초과하는 모습을 보인다. 난파로 인해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바다를 표류하던 파이가 날치를 만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장면에서 날치는 말 그대로 프레임 안에서 밖으로 날아간다. 아이맥스 영화임과 동시에 3D 영화였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효과적인 입체감을 위해 오브제를 프레임 밖으로 초과시켰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나, 2D상영이라고 해서 날치가 프레임 안에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날아온다는 운동의 실감을 위해 가변화면비가 산출한 ‘블랙바’를 필요로 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날치신’ 외에도 돌고래가 프레임을 침범하는 표현을 통해 입체효과를 살리기도 한다. 즉, 프레임을 초과한다는 것은 영상이 스크린이라는 한계를 초과하는 효과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뤼미에르 형제가 카페 그랑에서 <기차의 도착>(1895)을 상영했을 때 벌어졌다는 유명한 일화와 연결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관객들이 기차가 자신들에게 달려오는 줄 알고 줄행랑을 쳤다는 표현에 과장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차의 도착>이 최초의 영화라고 이름 붙여진 위상을 생각해본다면, 최소한 영화의 시작은 스크린이라는 프레임을 초과하는 것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고의적으로 블랙바를 산출시키는 영화들은 프레임을 초과하는 경험을 위해 블랙바를 고의적으로 드러내거나, 반대로 영화라는 것을 분명히 지칭하기 위한 소격효과(Verfremdungseffect)를 위해 블랙바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지는 않을까?

 

〈탐엣더팜〉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탐엣더팜〉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자비에 돌란의 블랙바, 프레임이라는 환상과 스크린이라는 실재

전자의 경우에는 프레임의 확장을 드러내놓고 전시하여, 정한석 평론가가 지적한 ‘아이맥스 효과’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미지가 기능할 수 있도록 섬세한 이미지텔링을 설계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시가 자비에 돌란의 가장 유명한 영화 <마미>(2014)일 것이다. 영화는 인스타그램의 1:1 비율을 통해 러닝타임 내내 양옆에 거대한 필러박스를 세워둔다. 영화의 중반부에 들어서며 oasis의 “Wonderwall”이 흘러나오자, 롱보드를 타고 거리를 내려오던 스티브(안토니 올리버 피론)는 팔짓과 함께 프레임을 1.85:1 비율로 확장시킨다. 그리고 필러박스의 어둠은 화면 아래로 물리친다. 이 장면이 주는 감흥은 분명하다. 영화가 ‘과잉행동증후군’이라는 장애로 지칭되던 스티브의 정체성을, 스티브 스스로 그의 정체성을 그 자신의 것으로 해방하는 것이다. ‘Wonderwall신’의 분명한 감흥과 해방감은 영상이 그간 우리가 보던 프레임을 초과하여 확장된다는 데에 있다.

<마미>는 ‘Wonderwall신’을 영화의 중앙에 둠으로써, 관객에게 스티브를 그 전과 후로 나누어 비교해볼 것을 권유한다. 다만 ‘Wonderwall신’ 감흥이, 영사되는 영상과 그 영상을 반사하는 스크린의 일치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Wonderwall신’ 전까지 <마미>를 통해 경험하던 프레임은 스크린 양옆에 필러박스가 서있는 프레임이었다. ‘Wonderwall신’은 이 필러박스를 치움으로서, 우리가 원래 알고 있던 비스타 스크린의 프레임을 회복시킨다. ‘Wonderwall신’은 ‘인스타 비율’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에서 ‘비스타 비율’의 전통적인 프레임으로 영화를 귀환시키는 장면인 것이다. 전통을 대체하던 새로움이, 전통적인 것에게 다시 자리를 내어준다는 점에서 <마미>의 가변화면비는 복고이자, 나아가 <마미>가 이전에 본 적 없던 전통을 복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미>의 ‘Wonderwall신’은, 처음에 스티브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것을,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 것들로 웅변한다. 필러박스의 퇴보를 통해 스크린을 회복시키고, 나아가 캐릭터가 가진 내면적 서사와 이미지를 일렬로 정렬시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자비에 돌란이 <마미>를 만들기 직전에 연출했던 <탐엣더팜>(2013)은 프레임이 영상을 침입하여 유지해오던 화면비를 깨뜨리는 영화다. 영화는 중간중간 총 4차례에 걸쳐서 레터박스를 확장시키고, 그를 통해 영상의 화면비를 축소한다. 본래는 비스타 화면이지만, 중간중간 영화가 스코프 비율로 축소되는 것이다. 아이맥스의 전신(前信)이 된 기술에서 그 이전의 비율로 움직인다는 점에서, <탐엣더팜>에서 나오는 4번의 장면들 또한 새로움에서 전통으로 귀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작 <탐엣더팜>의 그 장면들이 구축하는 질들은 정확히 <마미>와 반대되는 지점의 것들이다. <마미>가 확장을 통해 해방과 발산을 표현하기 위해 가변화면비를 사용했다면, <탐엣더팜>의 가변화면비는 폐쇄와 침잠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다. 탐(자비에 돌란 분)은 자신의 연인이자 친구인 기욤을 잃고, 고향 퀘백의 어느 시골로 돌아가지만, 어쩐 일인지 기욤의 가족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탐은 퀘백의 기욤의 가족이 운영하는 농장을 미로 삼아 빙빙 궤적을 돌며, 퀘백의 시골 풍경 이곳저곳에 자신을 침잠시킨다.

<탐엣더팜>은 자비에 돌란이 알 수 없는 힘을 가진 마을에 의해 자신을 침잠시킬 때마다, 상하에서 레터박스를 확장시키며 화면비를 축소한다. 블랙바의 어둠이 화면 위아래로 확장되는 것이다. <탐앳더팜>의 레터박스를 이용한 연출은 탐이 처한 상황과 탐을 둘러싼 마을의 미스터리를 효과적으로 시각화한다. 화면에 점차 드리우는 레터박스의 어둠은, 탐의 내면에서 그를 침잠시키고 있을 미지의 죄책감과 괴로움에 둘러쌓인 그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정보가 점점 그의 얼굴에 맞춰지게 된다는 점에서 클로즈업이 가진 미학과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대상에게 다가가는 방식을 통해 정보가 선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클로즈업은 원근법을 지워가며 카메라가 선택한 대상을 선별한다는 점에서 심도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는다. 그러나 프레임의 확장을 통해 선별된 대상은 카메라의 움직임과 상관없이 선별되는 것이다. 거기서에 스크린은 영상의 바탕이라는 지위를 잃는 것처럼 보인다. 투영된 영상이 스크린을 대체하는 ‘바탕’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또한 ‘바탕’의 일부가 선별될 수 있는 사태는, 투영된 대상이 여지없는 전시의 대상으로 노출되는 상태와 다르지 않다. 이 때문에 <탐엣더팜>의 레터박스 효과는 클로즈업의 효과보다 더욱 불가해하며, 폭력적이다. <탐엣더팜>의 레터박스 연출은 혹 포르노그래피가 주는 매혹과 혹 비슷하거나 유사하진 않은가 물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역설적으로, <탐엣더팜>의 윤리를 구원하는 것은 바로 스크린이라는 존재이다. <탐엣더팜>의 레터박스 연출의 특이성은 그 뒤에 반드시 점프컷이 붙는다는 것이다. 이 점프컷은 스코프 비율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비스타 비율로 귀환한다. 어쩌면 비스타 비율에서 스코프 비율로 퇴보했던 영화가, 다시 비스타 비율로 회귀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탐엣더팜>의 레터박스의 어둠은 마을의 미스터리한 힘에 이끌려 침잠하고 있는 탐에게, 영화가 보내는 일종의 경고일 수 있다. 이것이 경고로 남을 수 있는 것은, 그 뒤에 이어지는 점프컷이 레터박스의 지속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뒤에는 스크린이라는 미지의 공간이 있다. <탐엣더팜>의 레터박스 연출이 흥미로운 것은, 그 뒤에 이어지는 점프컷으로 인해 위협과 구원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탐엣더팜>에서 연출되는 레터박스의 확장은 이미지의 축소를 통해 캐릭터를 전시의 대상으로 밀어넣는다. 그와 동시에 스크린의 존재를 확장하는 연출로서, 이것이 실재가 아닌 극장에서 이루어지는 환상임을 관객에게 공지하여 캐릭터가 존재할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자객 섭은낭〉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자객 섭은낭〉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자객 섭은낭>의 블랙바, 프레임 안의 정념과 스크린 안의 정념

결국 <탐엣더팜>의 레터박스 확장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은, 스크린이라는 공간과 그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프레임이라는 환상 대한 고찰이다. 어떻게 하면 환상과 실재가 스크린이라는 공간 안에서 첨예한 균형을 이루며 공존할 것인가. 자못 진지하고 급박해 보이는 이 질문에 대해 <자객 섭은낭>은 여유롭고 넉넉한 대답을 던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프레임과 스크린을 굳이 양분하지 않는 것이다. <자객 섭은낭>은 허우 샤오시엔의 첫 번째 디지털 영화이자, 첫 번째 무협영화이다. 개봉 당시, 허우 샤오시엔이라는 거대한 이름과 중화권에서 무협영화가 갖는 위상 탓에 허우 샤오시엔의 첫 번째 디지털 영화라는 기념비는 주목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디지털이라는 명사는 <자객 섭은낭>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이다. 디지털이라는 배경 없이는 영화가 꾸준히 소환하고 있는 두 개의 거대한 필러박스를 소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객 섭은낭>의 필러박스는, <탐엣더팜>의 레터박스처럼 필연적이다. 어쩌면 영상과 동기화된 마스킹 커튼을 통해 <마미>의 확장되는 프레임과 달리, <자객 섭은낭>의 화면비 간 편집구성이 점프컷의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1.85:1로 구성된 장면은 섭은낭의 스승인 가성공주가 칠현금를 켜며 청난무경을 읊는 장면, 그 뒤에 이어지는 가성공주가 아무 말없이 칠현금을 켜는 장면을 제외하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장면의 의미는, 돌출적인 구성에 반해 이상하리만치 쉬이 잡히지 않는다. 실제로 이 장면에서 주어지는 정보는 ‘동족을 만나지 않으면 울지 않는 난조가 거울을 보고 슬피 울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청난무경이 전부이다. 아마 황실의 대의를 위해 먼 타지인 위박으로 정략결혼을 떠나온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이자,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음에도 이해를 해주지 않는 섭은낭에 대한 감정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장면은 페이드 아웃으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이는 영화의 마지막 페이드 아웃이다.

<자객 섭은낭>의 유일한 비스타 비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장면이 페이드 아웃으로 마무리되었음에 유의해야 한다. <자객 섭은낭>에는 단 세 번의 페이드 아웃이 등장한다. 한 번은 영화가 시작되며 섭은낭이 가성공주에게 ‘변진의 절도사들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았을 때이다. 섭은낭은 처음에는 한 명의 절도사를 암살한다. 영화는 여기서 한 번 페이드 아웃이 된다. 또 다른 페이드 아웃은 자신의 자녀와 함께 있는 절도사를 보고 암살을 포기한 섭은낭에게 서강공주가 ‘전계안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린 후이다. 이 두 장면과 비스타 비율의 장면이 다른 점은 화면비율과 컬러의 유무이다. 앞선 두 장면은 흑백으로 찍혔으나, 후자는 컬러로 찍혔다. 영상의 맥락상 흑백과 컬러의 차이는 과거냐, 혹은 회상이냐이다. 흑백의 경우는 영상의 전후로 섭은낭의 얼굴을 응시하는 쇼트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관객이 절대 알아볼 수 없는 장면이, 컬러로 된 비스타 비율 장면 앞에 붙어있다.

관객이 절대 알아볼 수 없는 장면이란, 섭은낭이 전계안과 함께 한때 말을 타며 놀던 것을 회상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관객이 정보를 알 수 없도록 찍혔다. 아닌 게 아니라, 전계안과 섭은낭은 풍경과 똑같이 말을 탄 무리에 묻혀서 망원으로 등장한다. (나는 이 장면이 섭은낭의 회상이었다는 것을, 허우 샤오시엔이 내한했을 때 설명을 통해서 알았다) 이는 감독이 의도적으로 정보를 해독할 수 없도록 찍은 장면으로 보인다. 세상 어디에도 픽셀로 된 망원을 통해서 배우의 얼굴을 알아볼 관객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허우 샤오시엔은 어째서 돌출적인 장면을 해독할 수 있는 중요한 맥락을 해독할 수 없게 만든 것일까? 나는 허우 샤오시엔의 이 선택이 온전히, 2시간 내내 스크린의 양옆에 서 있을 필러박스를 위해 바쳐졌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 스크린에 드러난 블랙바의 기능 중 하나는 영상이 가진 프레임과 스크린을 동시에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2시간 내내 우리는 섭은낭이 “사람을 살리는 자객”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본다.

“사람을 살리는 자객”은 섭은낭의 소망은 불가능한 환상이지만, 동시에 남몰래 품은 정념이다. 허우 샤오시엔의 인물들이 품은 소망은 늘 프레임을 초과하는 것이었다. 도시(<펑쿠이에서 온 소년>), 가족(<비정성시>), 사랑(<연인풍진>), 청춘(<밀레니엄 맘보>), 나아가 타자(<빨간풍선>)까지, 허우 샤오시엔의 인물들이 자신의 정념을 남몰래 숨겼던 상관물들은 늘 영상의 프레임을 초과했다. 담을 수 없지만, 실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길은 극장에서 투사되고 있는 상영이라는 사태 이외에는 찾을 길이 없는 것이다. <자객 섭은낭>의 필러박스는 불가능한 소망을 품은 정념을 증언할 유일한 개체이다.

 

〈레토〉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레토〉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레토>의 블랙바, 망상(妄想)을 넘어선 망상(網想)의 조건

<자객 섭은낭>의 블랙바가 드러내는 것처럼, 스크린이라는 공간은 환상을 형성하는 조건이자 환상의 실재를 증언할 공간이다. 논리적으로 따지고 보면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환상이란, 결국 개인이 형성한 가상 안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원리적으로 공유할 수 없는 이미지이다. 그것을 증언한다는 것은 마치 손으로 연기를 잡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환상이 실재한다는 것을 증언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어떤 도약을 요청한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러시아의 중견감독 키릴 세네브렌니코프의 <레토>(2018)에는 이 도약의 시도가 아름답게 형상되어 있다. <레토>의 내러티브 구성은 대단히 독특하다. 영화의 절반 정도는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진행 시키는데 할애된다. 묘사가 아닌 진행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는, <레토>의 뮤지션들이 공유했을 법한 환상, 달리 말해 망상(妄想)이 영화에 틈입하는 방식으로 리듬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레토>에는 마치 뮤직비디오처럼, 영상 위로 애니메이션들이 지나가는 장면들이 자주 등장한다.

마이크와 나탈리아, 그리고 빅토르 최는 공연을 하며 망상을 꿈꾸기도 하고, 기차 안에서 세상에 불화하는 망상을 꿈꾸기도 한다. 그 망상은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영상의 프레임을 초과하는 이미지가 늘 등장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단 한 장면을 제외하면 <레토>는 늘 블랙바를 끼고 상영된다. 영화 안에서 볼 때, 블랙바가 향하고 있는 대상은 명확하다. 그것은 새로운 음악에 대한 철의 장막의 억압이다. KGB가 콘서트를 감시하고 음악을 즐기려는 관객들의 조그마한 시도까지 제지하는 현실은, <레토>의 주인공들이 갇힌 프레임이다. 그들은 그 프레임을 넘기 위해 음악을 하고 있으며, 그 음악은 그들의 망상(妄想)을 망상(網想)으로 만드는 조건이 되어주고 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망상을 통해 프레임의 존재를 인식한다. 그리고 그들이 꿈꾸는 것은, 술에 취해 잠든 뒤 홀로 깨어난 펑크가 영사 중인 스크린 속으로 뛰어드는 장면에서 드러나는, 프레임이 없는 온전히 스크린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환상이 넘실대는 <레토>에서 블랙바는 영화관이라는 공간을 드러내는 유일한 장치이다. 그것은 영화라는 환상이 어떤 양식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영화라는 환상을 유지시키는 것은 스크린이라는 공백의 공간이며, 그것이 위치하는 ‘영화관’이라는 닫힌 공간이다. 블랙바에 의해 열려있는 공간으로 인해 선명해야 할 환상이 끊임없이 현실과 반목하듯이, 영화는 현실을 환상으로 밀어내려는 시도를 계속한다. 이는 마이크와 나탈리아, 그리고 빅토르 최가 러시아의 삼엄한 경비 속에서 현실을 밀어내려는 시도를 계속하려는 그 운동과 정확히 동치 된다. 하지만 그들이 꿈꾸는 환상이 결코 대안적인 현실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레토>에는 수많은 환상이 오고가지만, 거기서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환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명료한 예시가 스크린 안으로 뛰어드는 펑크의 환상이다. 홀로 깨어난 펑크가 영사 중인 스크린 속으로 뛰어드는 장면은 다른 망상들과 마찬가지로, 영화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오히려 스크린 안에 펑크를 가둠으로서, 영화 내내 설명되지 않던 펑크의 지위를 규정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펑크를 환상적 존재로 규명하여, 전기를 다루는 이야기에서 그의 존재를 실재와 엮이지 않는 존재로 유폐시킨다. 영화는 펑크가 스크린으로 뛰어드는 장면처럼, 유폐된 환상에서 이야기를 정지시키지 않는다.

펑크가 스크린 안으로 뛰어든 후, 영화는 마이크와 나탈리아, 그리고 빅토르 최를 한 번씩 비춘다. 거기에는 그들이 살다가 시간이 적혀있다. 이때 영상 위로 드러나는 이 정보는 프레임을 벗어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은 그 정보를 통해 그들이 망상을 품고 프레임에 갇힌 시간을 거쳐 스크린에 도착한 인물이라는 것을 공지 받게 된다. 이는 프레임 안의 환상을 실재와 연결하는 일이다. 그들은 결코 스크린 밖으로 나오지 않을 테지만, 상영되는 그 순간에는 실재하는(했던) 어떤 것과 연결되어 우정을 도모할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것들의 최종 종착지는 결국 관객이 될 것이다. 이 점에 있어, <레토>의 블랙바는 프레임의 안의 것과 프레임 밖의 것을 연결할 수 있는 매게이다. 그리고 그 영화를 보았다는 관객의 진술을 통해 마이크와 나탈리아, 그리고 빅토르 최는 실존했던 인물의 지위로 복귀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야기를 벗어난 펑크의 투신이 영화에서 어떤 진실도 묘사하지 않았다면, 스크린이 가득 차는 바다 앞에서 관객도 감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담배연기와 알콜 냄새가 가득한 방에서 바다가 펼쳐진 스크린 안으로 투신한 펑크의 운동이 감동적이라면, 그것이 환상으로 현실을 밀어내고자 했던 마이크와 나탈리아의 저항임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존했던 인물로 돌아와 자신 앞에 닥친 현실을 수용하는 태도와의 대조 때문일 것이다. 어둠 속에서 빛은 그토록 달콤한 것이지만, 어둠 안에서만 빛이 밝을 수 있듯이 그들이 꿈꾸었던 환상 역시 러시아의 삼엄한 폭압 앞에서 찬란했기 때문이다. 영화 내내 나탈리아는 빅토르 최와 마이크를 사이에서 오고간다. 그러나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나탈리아는 자신이 꿈꿔왔던 환상을 실현하는 빅토르 최 대신 마이크를 선택해왔고,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생을 수용해왔다는 것을 밝힌다.

여기서 우리는 마이크와 나탈리아, 그리고 그들과 함께 했던 밴드가 꿈꾼 환상이 늘 블랙바를 오고가는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만약 환상이 그들의 연주라면, 환상과 반목하는 블랙바야말로 그들의 무대인 것이다. <레토>가 이전에 언급했던 영화들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블랙바라는 일종의 미학적 장치를 단순한 양식의 일부로 두지 않고 실재까지 영역에 끌어왔다는 데에 있다. 앞에서 제시한 엔딩장면처럼 <레토>는 결국 블랙바와 함께 끝난다. 그 불완전한 환상을 긍정하고, 마찬가지로 불완전한 삶을 긍정하는 일이란 그 공백을 의미의 구조에 맞추어 재배치하는 일일 것이다. 만약 <레토>의 엔딩에서 블랙바를 찾아볼 수 없었더라면, 우리는 <레토>를 실존인물의 생애를 다룬 전기영화로 기록하지 못했을 것이다. 펑크의 시간은 영화 안에서 끝나있다. 그러나 마이크와 나탈리아, 그리고 빅토르 최는 역설적이게도 프레임 안에서 프레임 밖의 시간까지 확장된다. 그 중심에는 의미 없는 빈 매트의 공간인 블랙바가 있다. 이 공백이 망상(妄想)을 현실과 환상이 엮인 망상(網狀)으로 묶고 있다.

글을 열며 언급했던 “영화 이전의 기대”에 대해 앙드레 바쟁은 ‘완전영화의 신화’라는 지적을 한다. 그러나 바쟁이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는 “스크린에는 날개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블랙바’는 바로 이 사실을 상기시킨다. 어쩌면 블랙바는, 블랙바 때문에 몰입에 실패했다는 영화관 관객들의 불만들처럼, 환상의 빛을 어둡게 만드는 죽음일수도 있다. 그러나 그 죽음 안에서 영화는 <탐 앳 더 팜>이 그러했듯이 윤리를 회복하고, <레토>의 그들처럼 부활을 꿈꿀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드러난 ‘블랙바’는 우연의 가능성이 배제된 ‘완전영화의 신화’라는 유폐적 환상을 극복하고, 우연히 들어난 스크린을 통해 다양한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게 만든다. 만약 억지로라도 영화가 블랙바를 소환한다면, 그것은 영화를 환상 안에 가두어두지 않겠다는 작가의 단호한 선언일지 모른다. 환상에서 시작했지만, 현상을 통해 실재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가능성을 꿈꾸며 선언에 가깝게 진술한 “영화는 부재하는 것의 광채”라는 하스미의 지적처럼 말이다. 영화가 부재할 때, 영화는 비로소 유폐를 벗어나 실재를 꿈꿀 것이다.

 

 

글·이현재
평론가. 202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2021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 평론 신인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이현재의 시네마크리티크」에서 글을 쓰고, STRABASE에서 일하며, 경희대학교 K컬쳐・스토리콘텐츠연구소에서 활동하고 있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

이현재(영화평론가)
이현재(영화평론가) blueparanchung@gmail.com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