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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의 시네마 크리티크] 반-정치의 이미지를 향하여
[이현재의 시네마 크리티크] 반-정치의 이미지를 향하여
  • 이현재(영화평론가)
  • 승인 2022.12.26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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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의 세르히 로즈니차 영화들에 대한 메모
세르히 로즈니차 (출처: 네이버 영화)
세르히 로즈니차 (출처: 네이버 영화)

폭력 이미지의 리트머스지가 된 우크라이나

지난 7일 타임지는 올해의 인물로 블라디미르 젠렌스키(Volodymyr Zelensky)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타임지의 편진장인 에드워드 펠센설(Edward Felsenthal)은 “우크라이나를 위한 전투가 희망으로 가득 차든, 두려움으로 가득 차든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리가 수십년 동안 보지 못한 방식으로 세계를 자극했다”고 선정의 변을 밝혔다. 펠센설의 변론은 젠렌스키에 대한 두 가지 이해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두려움으로 이겨내고 조국에 남아 부당하게 영토를 침범한 러시아에 맞선 영웅적인 지도자라는 것이다. 이는 젤렌스키에 대한 통상적인 이해이며, 상식적으로도 큰 저항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평가이기도 하다.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된 2월, 젤렌스키는 망명을 떠날 것이라는 전 세계의 예상을 깨고 전쟁이 시작된 우크라이나에 잔류했다. 이는 10개월 가까이 지속된 전쟁 속에서 러시아의 확장적 제국주의를 방어하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나아가 3차 대전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지정학적 긴장의 실질적인 완충 역할을 온몸으로 수행했다는 대체적인 평가의 계기가 되어주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리가 수십년 동안 보지 못한 방식으로 세계를 자극했다”는 평가가 있다. 이는 긍정보다는 부정에 가까운 평가로, 사실상 러시아와의 협상 여지를 삭제하는 전략을 택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에 근거한다. 다시 말해 젤렌스키의 주된 전략은 러시아가 벌인 영토 침공을 선동의 계기로 이용해 전쟁 종식의 계기를 마련하는 데 소홀했다는 것이다. 더불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의 정당성을 점유하기 위해 미디어 전쟁을 벌이는 사이, 우크라이나 역시 러시아만큼이나 불확실한 정보를 통해 판단을 호도하고 미필적으로 전쟁을 연장했다는 의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젤렌스키의 군사 고문인 올렉사이 아레스토비치(Oleksiy Arestovych)는 6월 영국의 유력지 주간지 옵저버(Observer)와의 인터뷰를 통해 “판단 대신 무기를 지원해달라”고 말한 것 역시 이러한 주장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젤렌스키로 대표되는 문제적인 현상들을 낳았으며, 이에 대한 담론들은 9.11 테러가 일어난 이후 꾸준히 제기되어왔던 이미지와 선동의 문제를 겨냥하고 있다. 물론 젤렌스키의 미디어 전략을 두고 ISIS 사태와 같은 선례를 끌고 오는 것은 과잉 반응에 가까우며, 러시아가 먼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점에서 평행비교 또한 불가능하다. 하지만 러시아가 벌인 전쟁으로 인해 “우리가 수십년 동안 보지 못한 방식으로 세계를 자극했다”는 평가에는 일리가 있다. 굳이 근거를 들지 않아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영토를 역으로 침범했을 때, 그것을 보복심에 근거한 ‘참교육’ 내지 ‘정의 구현’으로 받아드리는 과정은 우려만큼이나 자연스럽고도 흔한 광경이다. 전쟁으로 이성을 발휘하는 것 자체가 난감해진 시대의 폭력 이미지란 그 자체로 리트머스 용지이며, 나아가 폭력에 대한 정당성에 대한 고민을 강요하는 사태이기도 하다.

 

〈마리우폴리스2〉 포스터
〈마리우폴리스2〉 포스터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접근법의 변화와 흐름

영화계 역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왔다. 영화계에 있어 러시아와 우크라아니의 전면전과 대규모 살상은 예견된 미래와 같았다. 그만큼 영하계, 특히 다큐멘터리스트들은 오랜기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지켜봐 왔으며, 그것이 물리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얼마나 예민한 주제를 건드는 일인지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가령 2015년 <마리우폴리스>에 이어 올해 <마리우폴리스2>를 발표한 만타스 크베다라비시우스(Mantas Kvedaravicius)는 직접 전장으로 카메라를 가지고 들어갔다. 그러나 크베다라비시우스는 본인이 카메라를 들고 전장을 통과하고 있다는 촬영의 조건 외의 어떠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때문에 관객은 시간순으로 편집된 감독의 이동 동선 외의 어떤 서사도 제공받지 못한다. 이는 촬영된 영상의 정보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유지하려는 감독의 시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쟁에 대해 가치판단을 내리지 않겠다는 감독의 항복 선언이기도 했다.

한편 돈바스 지역의 작은 마을에 잠입하여 작업한 레렝 빌몽(Lereng Wilmont)의 2017년 다큐 <멀리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는 한 소년을 적극적으로 따라간다. 감독은 폭격과 폭력에 노출된 소년이 총을 쏘게 되는 과정까지를 밀착하여 촬영하며 기록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든다. 하지만 2018년 루간스키와 도네츠크 지역에서 분리주의(친러시아파)가 본격적으로 득세하며 전황이 격화되자 경계에 서서 작업하는 것마저 위험한 상황이 된다. 지난 4월 영상 작업중 러시아의 무차별 폭격으로 사망한 크베다라비시우스의 장엄한 최후가 일러주듯, 전황이 격화되던 2018-19년에 전장에 직접 카메라를 가지고 가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 되고 있었다. 현장을 직접 촬영할 수 없다는 창작상의 제약은 작업 방식에 전면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본격적인 작업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된 것은 2018년 세르히 로즈니차(Сергій Володимирович Лозниця)의 <돈바스>에서부터 였다. 루간스키의 가상의 마을에서 분리주의와 정부군이 갈등하는 상황을 옴니버스 형식을 빌려 블랙코미디로 풀어낸 이 영화에서 로즈니차는 그동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충돌을 담기 위해 동원되었던 다큐멘터리의 방법론을 버린다. 대신 배우와 가상의 공간을 빌려 우크라이나의 분쟁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리주의와 정부군의 담합과 부패, 그리고 그로 인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국민의 고통과 고난을 극적인 서사로 재현하는 방식을 택한다. 관객은 <돈바스>에서 등장하는 사건과 사태가 얼마나 사실인지, 그리고 어느 정도 허구인지 파악할 수는 없지만, 단순한 극영화로 보기에는 사건의 전말이 지나치게 구체적이라는 점과 간간히 등장하는 루간스키의 실제 지역에서 이것이 단순한 극영화는 아니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이러한 접근법은 올해 선댄스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마리나 고르바흐(Maryna Er Gorbach)의 <클론다이크>까지 이어지는 접근법이기도 하다.

현장에 직접 걸어 들어가는 것을 포기한 대신에 재현을 통해 사태를 지목하는 방식은 필연적으로 그 사건에 은유성과 대표성을 부여할 수밖에 없다. 이는 영화에서 드러나는 사건의 명확성과 구체성을 떨어뜨리지만, 한편으로는 사건에 확장성과 상징성을 부여하여 더 과감한 시도를 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가령 타르코프스키의 후계자로 손꼽히며 <러시아 방주>와 <태양> 등을 통해 거장의 반열에 오른 알렉산더 소쿠르프(Alexander Sokurov)가 7년만에 내놓은 신작 <페어리테일>은 히틀러, 처칠, 스탈린 등 세계 2차 대전과 관련된 지도자들의 어록, 그리고 딥페이크 기술을 활용해 그들이 지옥에서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실험적 다큐멘터리다. <페어리테일>은 표면적으로는 세계 2차 대전과 그 전쟁을 지휘했던 리더들의 어록을 통해 인간의 이상과 야망, 그리고 그것이 불러온 폭력과 비극을 이야기하는 다큐멘터리다. 그러나 부산국제영화제에 보내온 인사말을 통해 밝혀온 “그동안 세계는 예기치 못한 역사적 변화를 겪었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했다”는 감독의 작품 의도처럼, 작품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대상이 어디에 있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키이우 재판〉 포스터
〈키이우 재판〉 포스터

맥락적 베리어 전략 혹은 제노사이드와 우크라이나를 이해하기 위한 조건들

세계 2차 대전이라는 제노사이드 사건을 거쳐 우크라이나 사태를 환유하는 접근을 택한 것은 선정성을 회피함과 동시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첨예한 현상을 지목하고, 그에 대한 나름의 견해와 주장을 펼칠 수 있는 효과적인 접근 방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을 시도했던 것이 소쿠르프가 처음은 아니었다. 과거의 제노사이드를 경유하여 우크라이나 사태를 지목한 첫 사례는 앞서 언급했던 세르히 로즈니차였다. 로즈니차는 <돈바스>를 발표하던 해 <재판>이라는 의미심장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내놓는다. <재판>에서 로즈니차는 1930년대 스탈린의 소비에트 연합에서 ‘산업당’이라는 반국가 조직 관련자들을 재판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피고인들의 진술과 검사의 심문, 그리고 그 결과 산업당 관계자들이 처형당하기까지의 과정을 푸티지를 통해 재구성한 이 다큐멘터리의 가장 큰 특징은 재판과 관련된 인물의 소속과 나이, 이름 등 기본 정보를 제외하면 맥락적인 정보는 거의 모두 차단된다는 점이다.

애초에 산업당 재판이 어떤 재판인지 역사적 의미를 모른다면 독해할 수 없도록 구성된 이 불친절한 영화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검사와 피고의 논리 싸움이 아닌, 피고와 다른 피고의 진술이 엇갈리는 지점이다. 그러나 피고는 한결같이 자신이 유죄이며 처형의 대상이라고 항변하는데, 그 이유는 산업당이라는 반국가 조직이 애초에 없었기 때문이다. 산업당 처형은 스탈린 시기 대숙청의 전조를 알리는 사건이다. 그러나 로즈니차는 푸티지를 반역 행위가 어떻게 조작되었는지 밝히지 않는다. 대신 푸티지를 통해 재현되고 있는 광경이 수렴되는 곳은 레닌 말기 시행되어 스탈린이 물려받은 신경제정책에서 벌어진 권력 투쟁이다. 가령, 피고들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본인의 여죄 여부가 아니라 행보 그 자체다. 즉 피고인이 검사와 싸우는 지점은 죄가 아닌 행보다. <재판>의 이러한 지점은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형사재판의 본질적인 한계와 적백 내전 이후의 소비에트 사회가 가지고 있던 갈등 등을 담고 있지만, 이러한 모습의 굳이 2018년에 공개한 이유는 같은 해 공개된 <돈바스>와 엮어 볼 때 더 분명해진다.

로즈니차는 <돈바스>에서 분리주의자와 정부군을 굳이 나누지 않으며, 권력자와 피권력자 역시 나누지 않는다. 대신 <돈바스>의 모든 인물이 몰두하고 있는 것은 생존과 파괴다. <돈바스>의 인물들은 분리주의자와 정부군을 가리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 학살을 벌이거나 학살을 통해 생존하는 방식으로 연명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이들이 가장 집중하는 것은 학살을 누가 주도했는지와 그것이 어떤 행보로 남게 되었는지다. 때로는 있지도 않은 학살을 본인이 자행했다고 주장하는 인물들이 나오기도 한다. 이러한 정보의 오염과 왜곡은 분리주의자와 정부군, 권력자와 피권력자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며, 심지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명확한 서사가 없는 이 영화에서 클라이맥스라고 부를 수 있는 지점은 분리주의자와 정부군이 본인들의 이해관계 아래서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이다. 서로 다른 진영 속에서 각자의 신념과 이해를 따라 신부와 신랑은 서로를 증오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다고 일장연설을 하는가 하면, 그 결혼식의 하객들은 본인 어떤 마을에서 어떤 학살을 벌였는지 경쟁하듯 논쟁을 벌인다. 그리고 이 대화들 속에서 인물들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내일의 생존이나 안정적인 권력이 아닌 본인의 행보 그 자체다.

이 두 영화를 겹쳐본다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전면전에 이끈 돈바스 전쟁의 풍경이 로즈니차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졌는지 유추할 수 있다. 돈바스는 권력의 유무, 신념의 방향, 더 나아가 성별과 같은 인간의 생체적인 기본적인 분류까지 모조리 전쟁이라는 사태 안에 몰아넣는 일종의 블랙홀과 같았다. 그 블랙홀 안에서 우리가 가장 손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지만, 그조차 큰 의미가 없으며 남아있게 된 가치는 오직 본인이 어떤 행보를 보였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믿음뿐이다. 다만, 로즈니차의 이 풍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고맥락의 정보들을 관객이 스스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렇듯 로즈니차가 역사적 맥락을 통해 마련해놓은 베리어는, 역설적이게도 전쟁이라는 대규모의 폭력 사태를 담은 이미지를 수용하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이는 로즈니차의 영화에 있어 엘리트주의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러한 비판의 요지는 대중적 매체로서 기능하는 영화의 존재 양식을 해치고, 관객에게 지나친 위악을 전시한다는 비판을 받았던 <젠틀 크리쳐>와도 이어지는 부분이 있다.

로즈니차 역시 이러한 비판을 무시로 일관한 것은 아닌 듯하다. 로즈니차는 여전히 고맥락을 이용하여 관객이 스스로 뛰어넘어야 하는 베리어를 구현하고 있으며, 두 세 개의 영화를 겹쳐보지 않는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고맥락의 전술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서사를 뭉개다시피 난해하게 구성해 가치판단을 적극적으로 유보했던 2018년과 달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갈등이 전면전으로 치달은 2021년 이후에는 전작들보다 적극적으로 가치판단을 내리고 있으며, 서사 역시 비교적 선형적으로 변했다. 다만 여전히 가치판단의 대상은 특정한 대신 환유의 대상이 2차 세계대전으로 집중되었으며, <재판>과 <돈바스>의 관계처럼 구조적인 유사점을 통해 메시지를 유기적으로 확장해 나가는 것이 아닌, 내용적인 유사성을 통해 구조를 유기적으로 확장해 나가는 전략을 구사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파괴의 자연사〉 포스터
〈파괴의 자연사〉 포스터

조작 가능한 기계-재현의 천박함

로즈니차의 고맥락 전략이 변화를 보인 것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면전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2020년 이후이다. 로즈니차는 2021년과 2022년까지 <바비야르 협곡> <키이우 재판> <파괴의 자연사> <미스터 란즈베르기스>까지 총 4편의 영화를 발표했다. 여기서 리투아니아의 탈소련 운동을 지휘한 정치가인 비타우타스 란즈베르기스(Vytautas Landsbergis)의 정치적 행적을 따라간 <미스터 란즈베르기스>를 제외하면 모두 세계 2차 대전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미스터 란즈베르기스> 역시 4시간이 넘는 장대한 상영시간의 상당 부분을 냉전시대와 CIS 지역의 탈소련 운동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 2차 대전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시간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다만, <미스터 란즈베르기스>의 경우 로즈니차의 필모그래피 안에서도 상당히 이질적인 작품이다. 방법론적으로는 자신의 작가성을 드러내 온 전적인 아카이브 다큐멘터리의 방법론을 포기하고 인터뷰를 병치하는 시도를 했으며, 이를 통해 한 명의 주인공이 전달하는 서사를 온전히 따라가는 영화로써 제작되었다, 이는 2020년 직후의 로즈니차 작업에 있어 일종의 각주로 이해하는 것이 적합해 보인다.

반면 <바비야르 협곡> <키이우 재판> <파괴의 자연사> 모두 전적인 아카이브 다큐멘터리의 방법론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특징이 있다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현재의 우크라이나 내에서 벌어진 일렬의 국가간 전면전을 환유하기 위해 2차 대전이라는 특정한 시기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히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안겨준 전쟁사적 사건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로즈니차가 2차 대전이라는 특정한 시간대를 선택한 이유를 유추하기 위해선 2차 대전에 대한 기존의 비평적 담론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2차 대전은 영화비평에 있어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일렬의 대규모 폭력 사태가 생산해낸 이미지와 비슷한 지위의 형상들을 제시했다. 이는 앙드레 바쟁과 세르쥬 다네를 비롯해 영화의 윤리적 가치에 천착해온 비평가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특히 세르쥬 다네의 주장들은 대규모 폭력에 대한 이미지가 일종의 리트머스 용지로 사용되는 현시점에서 되돌아볼 만하다.

세르주 다네는 자크 리베트의 유명한 비평문 「천박함에 대하여」에서 질로 콘테코르보(Gillo Pontecorvo)의 <카포>(1960)에서 홀로코스트의 죽음을 트래블링을 통해 재현한 장면을 두고 “가장 경멸받아 마땅한 자”라고 비판한 것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고다르가 트래블링 쇼트를 “트래블링은 도덕의 문제”라는 문구를 인용한다. 세르주 다네는 고다르의 경구를 인용하며 단순히 기계를 통한 재현의 윤리적인 문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닌, 재현이 이데올로기에 복속되어 프로파간다를 수행하게 되는 경위에 대한 해석으로 확장한다. 세르주 다네는 이 과정에서 현실의 이미지와 영화의 이미지를 구분한다. 세르주 다네는 현실의 이미지가 조작될 수 없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착취적으로 접근하더라도 기껏해야 퇴보적인 회고에 머무르나, 영화의 이미지는 기계를 통한 조작이 가능하기에 관음적인 시선과 사태를 규정하는 악의적인 권력이 형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을 형성한 것이 2차 대전의 홀로코스트 사태가 만들어낸 이미지들이라고 주장한다.

이 점에 있어 2차 대전은 카메라 혹은 기계를 활용한 이미지가 프로파간다를 수행한, 혹은 수행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로즈니차는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규모 폭력 사태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이미지가 어떤 방식으로든 프로파간다를 수행하고 있으며, 이는 곧 폭력을 연장하는 과정이라고 믿는 쪽에 가깝다. 이러한 로즈니차의 믿음은 <바비야르 협곡>과 <키이우 재판>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특히 두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교수형 장면에 이르면, 그것 자료화면이 독일군을 처형하는 스펙터클을 통해 스탈린 체제하의 소비에트를 하나로 묶으려는 의도로 기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로즈니차는 2차 대전에 벌어졌던 일을 기록한 이미지들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사용되었는지 이야기하며, 오늘날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폭력 사태들의 카메라 기록들이 무슨 의도로 유통되고 있는지 고민해보라고 강요한다.

이는 특히 <바비야르 협곡>과 <파괴의 자연사>에서 수행되는 감독의 요구로써, <바비야르 협곡>에서는 그 요구가 보다 직접적으로 일어난다. <바비야르 협곡>에서 독일 전범을 처형한 뒤 이어지는 이야기는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의 홀모도모르를 일으키고, 그로 인해 시체를 나치 전범이 처형되었던 그 바비야르 협곡에 매장하기까지의 과정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에필로그를 통해 현재 바비야르 협곡이 버려진 땅이 되었음을 지적하며, 특정한 기능을 위해 생산되었던 폭력의 이미지와 스펙터클이 이제는 프로파간다로써 쓸모를 잃어버리고 인간의 비이성적인 폭력성을 증언하는 기록으로 남게 되었음을 지적한다. 이는 시간을 지나 인간에게 다른 방식으로 되돌아온 기록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스펙터클을 기어이 기록하고 희열을 느끼며 즐겼던 인간의 천박한 군상에 대한 비평이기도 하다.

로즈니차는 <파괴의 자연사>에서 이러한 비평적 관점을 보다 큰 규모로 확장한다. 공간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머물렀던 <키이우 재판>과 <바비야르 협곡>과 달리, <파괴의 자연사>는 독일에서 농사를 지으며 수확물을 추수하는 목가적인 이미지의 나치 선전물을 제시한 도입부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부분을 폭격과 그로 인한 파괴와 학살에 대한 기록으로 채워놓은 아카이브 다큐멘터리이다. 다만 영화의 도입부에 사용되었던 영상이 나치의 선전물이었다면, 그 이후에 이어지는 영상은 연합군의 선전물인 셈이다. 이 구도 속에서 <파괴의 자연사>는 피아를 상관하지 않고 모든 문명을 파괴하는 전쟁의 참혹성을 아카이브된 선전물을 통해 재현한 일종의 회고적인 어두운 포르노그래피이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바비야르 협곡>과 <키이우 재판>의 연장선에서 볼 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주고받고 있는 미디어 전쟁에 대한 간접적인 코멘터리로 이해할 수 있다.

 

〈미스터 란즈베르기스〉 포스터
〈미스터 란즈베르기스〉 포스터

폭력을 넘어서기 위한 반-정치

이러한 2020년 직후 로즈니차의 영화들은 자칫 그가 염세적이거나 지나치게 인간을 비관하는 자기 파괴적인 성향의 작가로 오인하게 만들 수 있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스터 란즈베르기스>의 경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제작된 영화로써, 앞의 세 편에 관한 일종의 해명을 수행한다. <미스터 란즈베르기스>는 리투아니아를 구소련 체제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한 정치가의 정치적 행보를 담고 있다. 때때로 마키아벨리즘에 가까운 정치적 권모술수를 보여주긴 하지만 다분히 영웅 서사적인 이 영화는 리투아니아를 소련으로부터 독립시켰지만, 결국 정치에서는 실패한 인물의 이야기로 끝난다. 다만 로즈니차는 영화의 마지막에 란즈베르기스의 입으로부터 “본래 정치보다는 책과 음악에 뜻을 두고 있었다”며 정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인간의 모습으로 이야기를 닫는다.

정치적이었던 과거의 이미지가 아닌, 정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지게 된 실패한 정치가의 모습 속에서 로즈니차는 자연인으로 돌아간 정치인의 모습을 평화롭게 전시하는 것으로 영화를 닫은 선택은 로즈니차가 가진 정치적 태도가 어떤 특정한 진영에 있는 것이 아닌, 정치로부터 완전히 탈피된 인간의 모습을 이상향으로 그리고 있음을 추측케 한다. 이러한 로즈니차의 모습은 이미지를 정치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놓겠다는, (역설적이게도) 정치적인 로즈니차의 주장으로 읽히게 만든다. 이는 한편으로는 폭력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정치를 벗어나야 한다는, 소련인에서 벨라루스인으로, 그리고 우크라이나인이 되었다가 지금은 리투아니아로 망명하게 된 복잡한 국적의 영화작가가 본인의 방법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항변처럼 보이기도 한다.

 

 

글·이현재
평론가. 202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2021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 평론 신인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이현재의 시네마크리티크」에서 글을 쓰고, STRABASE에서 일하며, 경희대학교 K컬쳐・스토리콘텐츠연구소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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