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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Numbers (1) - 하나님이 낮잠을 자다가 방귀를 뀌면은?
안치용의 Numbers (1) - 하나님이 낮잠을 자다가 방귀를 뀌면은?
  • 안치용 l ESG 연구소장
  • 승인 2022.12.30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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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로 읽는 인문학]

[안치용의 Numbers]를 시작하며

하나님은 왜 하나일까. 포유류의 번식은 왜 둘이서 하고, 인간 유전정보를 구성하는 염기는 ATGC의 4개일까. 원래 그렇다는 것 말고는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답이 없다. 실존주의는 그래서 인간을 상황에 던져진 존재로 파악한다. 무책임하지만 그 이상 설명이 불가능한 게 사실이다. 숫자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가 그러하다. 불가해한 세계, 거기서 부유하는 인간사를 수와 소위 인문학의 프리즘을 통해 자유롭게 또 무분별하게 성찰하는 사유놀이를 떠나보자. ‘Numbers’는 ‘숫자들’이란 뜻이면서 동시에 구약성서의 ‘민수기’를 뜻한다. 민수기의 원래 히브리어 제목은 ‘광야에서’이다. 광야에서 숫자세기. 무엇이 되든 ‘안치용의 Numbers’는 일단 1부터 시작한다. 

 

한처음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무엇이 있었을까. 창조? 창세기 1장 1절을 자구대로 해석하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기에 앞서 그곳에 (또는 그때) 하나님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태초에 하나님이 있었다고 정정해야 할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함과 함께 태초가 있었다고 동시성을 무한대로 확대한다고 해도 인간의 인지(認知)로는 하나님이 선재(先在)한다.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비슷한 의문을 품고 창조 이전에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물었다. 창조 이전엔 시간이 없었으므로 하드리아누스의 질문은 의미가 없다고 어느 랍비가 대답했다고 한다.

약 380억 년 전 빅뱅과 함께 우리 우주가 생겼다는 천체물리학의 설명이 지금은 정설로 받아들여지며 우주에 관한 많은 궁금증을 해소했지만 여전히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남아있다. 빅뱅 이전은? “빅뱅 순간에 시간 개념이 생겼으므로 처음부터 질문이 성립하지 않는다”라는 답변이 유력한 대답의 하나다. 하드리아누스의 질문에 대한 종교적 답변과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서방 기독교의 창시자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조에 관한 설명 또한 대동소이하다. “시간의 탄생 이전에 관한 질문을 시간에 매인 존재가 하는 게 무의미하거나 성립하지 않는다”가 정답이다.

엄밀하게 말해 이것은 정답이 아니다. 진실의 회피라는 표현이 과하다면 해(解)가 없다가 진실이다. 따라서 여전히 궁금증이 남는다. 천지를 만드는 하나님은 창조 이전에 무엇을 했을까. 다른 말로 태초를 만드신 하나님은, 그것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태초 이전에 무엇을 했을까. 혹은 무엇이었을까. 빅뱅 이후 하나의 우주가 생겨났지만, 이전엔 도대체 무엇이 있었을까. 하나님이 낮잠을 자다가 잠결에 방귀를 뀌었는데 그게 빅뱅은 아니었을까. 한데 하나님도 낮잠을 주무실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 1장 1절)

 

성서에서 태초를 언급한 또 다른 유명한 구절인 요한복음 1장 1절은 형식논리상 태초에 하나님이 있었다고 말하는 듯하다. 태초에 하나님이 있었다면 그 하나님은 지금도 있을 게다. 요한복음의 태초는 시간의 시작 이전의 태초일까, 아니면 시간의 시작 자체를 의미할까. 요한복음과 창세기의 태초 사이에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주지하듯 여기서 ‘말씀’은 그리스어 로고스의 번역어다. 흔히 이성이나 보편적인 법칙으로 설명하는 로고스는 ‘말’이란 뜻도 가져 이런 한국어 번역이 가능했다. 중국어 성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를 “太初有道”로 번역했다. 한동안 길거리에서 “도를 아십니까?”를 묻던 사람들에게 “중국어 성서의 요한복음 1장 1절을 아십니까”로 되물으면 어땠을까.

태초에 하나님이 있었다면 태초에 ‘나’ 또한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 안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이 ‘나’ 안에 있고 ‘나’가 하나님 안에 없다면 너무 고독할 것 같다. 하나님이 ‘나’ 안에 없고 ‘나’가 하나님 안에 있다면 너무 슬플 것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나’는 애초에 하나였다. 1과 1은 1이 된다. ‘나’는 태초에 있었지만, 태초 이전엔 없었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이 태초 이전부터 있었는지 어떤지 애당초 알 수가 없다. 태초 이전에 실종 상태인 ‘나’의 하나님이 지금은 세계를 방황한다. 하나님의 과거는 불문에 부치고 지금은 그를 구할 때란 생각이 든다. 애잔하다.

 

태양

태양은 지구 생명의 근원이다. 태양이 1초도 쉬지 않고 복사에너지를 46억 년가량을 지속해서 보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태양복사에너지는 태양에 존재하는 수소가 원자핵 융합 반응에 의해 헬륨으로 변할 때 생기는 질량 결손에 의한 에너지다. 태양은 거대한 수소(H) 덩어리로, 태양에서뿐 아니라 우주에서 가장 흔한 원소인 원자번호 1번인 수소 두 개를 합쳐서 원자번호 2번인 헬륨(He)을 만드는 일을 무던하게 해내고 있다. 사실 1과 1을 더해서 2를 만드는 게 태양이 유일하게 하는 일이다. 

미국 정부가 ‘인공태양’ 혹은 ‘꿈의 에너지원’으로 불리는 핵융합 발전의 첫 관문에 도달했다고 12월 13일 발표했다. 제니퍼 그랜홈 미국 에너지부 장관은 이날 ‘로런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LLNL)에 있는 핵융합 연구시설 ‘국립점화시설’(NIF) 연구팀이 2022년 12월 5일 핵융합 ‘점화’에 처음으로 성공했다고 밝혔다.

핵융합 점화는 핵융합을 일으키기 위해 투입한 에너지보다 핵융합 반응으로 더 많은 에너지를 생산하는 것을 뜻한다. 핵융합에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고온이 필요하다. 표면 온도 6000℃이고, 중심부 온도가 약 1500만℃인 태양에서는 핵융합이 일상이지만, 그렇지 않은 지구에서는 영끌과 영끌을 영혼이 타버릴 정도로 해야 핵융합을 끌어낼 수 있다. 

NIF 연구팀은 ‘관성 가둠 핵융합(Inertia Confinement Fusion)’ 방식을 연구해 2022년 12월 5일 실험에서 2.05메가줄(MJ)의 에너지를 투입해 3.15MJ의 핵융합 에너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연구소 측은 “이번에는 한 번에 하나의 캡슐을 점화했지만, 상업적으로 핵융합 에너지를 생산하려면 1분 이내에 더 많은 점화가 일어나야 한다”며 “기반 기술 연구에 노력과 투자를 집중하면 몇십 년 내에 발전소를 지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태양이 없었다면 지구가 없고, 태양의 복사에너지가 없었다면 지구의 생명이 없으며 ‘나’ 또한 없을 터다. 태양은 골디락스 행성인 지구에 온난화의 축복을 내려줬지만, ‘인공태양’에 도전할 정도로 교만해진 인류는 축복을 재앙으로 바꾸는 중이다. 수십년 내에 북극곰이 멸종하지는 않겠지만, 수십년 내에 여름 북극해의 얼음이 한번은 완전히 녹는다. 그때 많은 북극곰의 익사와 아사를 목격할 텐데, 특히 미성숙한 아기곰이 북극해에서 육지를 혹은 얼음을 찾아 헤엄치다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기진해 빠져 죽는 모습을 보게 될 텐데, 날숨으로 수소의 축복을 탄소의 저주로 바꾼 우리의 죄를 어찌할까.

 

탕웨이, 안개의 그림자 

 

영화 <헤어질 결심>의 부산 촬영에서 서래 역의 탕웨이는 발을 삔 상태였다. 당시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쓰기가 일반적이었기에 탕웨이가 지나가도 마스크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발목을 삐어서 목발을 짚은 채로 해운대 산책에 나선 탕웨이는 목발을 옆에 세워놓고 바닷가에 앉아 바다를 바라봤다. 서래처럼?(“탕웨이는 발목을 삐었고, ‘헤어질 결심’에 더 몰입하게 됐다”, 2022년 6월 29일, <씨네21>, 필자 재구성) 

 

한자로 일(一)과 같은 의미로 쓰는 일(壹)은 호(壺, 술 단지)와 길(吉)의 합성어로 그릇에 물건(物件)이 가득 차 있다는 뜻이다. 술 단지에 가득 술을 넣어 마개를 꼭 닫은 모양이기도 하다. 2022년 11월 25일 탕웨이는 청룡영화제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수상자로 호명되기도 전에 왈칵 눈물을 쏟았다. 가수 정훈희가 무대에 올라 <헤어질 결심>의 주제가 격인 ‘안개’를 부르면서다.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정훈희의 ‘안개’ 중)

 

술병에 그림자를 담아 마개를 막아버렸지만, 술병 표면에 그림자가 얼룩진 듯한 탕웨이의 연기. <헤어질 결심>의 대미는 2가 되지 못한 1과 1의 본원적 슬픔을 보여준다. 

탕웨이의 상대역 박해일은 필자나 이 글을 읽는 많은 독자와 마찬가지로 죄 많은 20세기 남자다. 20세기에 태어난 남자는 모두 주민등록번호의 일곱 번째 숫자가 1이다. 19세기 마지막 한 해와 21세기의 첫 한 해는 예외다. 20세기 남자들이 지은 죄는 균등하지 않다. 21세기 사람은 죄와 헤어질 결심을 해야 한다. 북극곰을 구하지 못하겠지만 22세기 인간을 구하고 싶다면 말이다.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가다오.” 1951년 5월 11일 부산 출생인 정훈희는 21세기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아마.

 

1 대 다(多)

빅뱅 이후 우리의 우주(Universe)는 우리에게 유일한 우주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같은 영화가 재미있게 표현했듯 결코 우리에게 주어질 수 없는 다중우주(Multiverse)가 어느 사이에 친숙한 개념으로 자리를 잡았다.

다중우주가 암흑물질이나 암흑에너지와는 차원이 완벽하게 다른 개념이지만 사유에서는 어쩌면 같은 수준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다. 1층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2층이나 100층이나 어차피 같은 것일 테니 말이다. 한데 1의 반대말은 다(多)인가 아니면 0인가. 반대말이란 설명이 맞기는 한 것인가.

신플라톤주의에서 일자는 다자의 근원이다. 세계는 일자에서 유출한다. 만일 방이 무한대로 있는 호텔에 무한대의 사람이 투숙한다면, 아무튼 모든 사람에게 방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날 에스트라공이란 사람이 투숙객 중에 고도라는 사람이 있느냐고 호텔을 찾아와서는 호텔 직원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하룻밤 묵고 가겠다며 방 하나를 달라고 했다. 모든 방이 꽉 찬 상태인데 호텔 직원은 에스트라공에게 방을 내어줄 수 있을까.

있다. 답은 1호실이다. 호텔 전체에 안내 방송을 해 모든 투숙객이 현재 방에서 1을 더한 호수로 방을 옮기도록 하면, 1호실→2호실, 2호실→3호실 등으로 한 칸씩 무한히 연쇄적으로 이동하기에 1호실이 비게 된다. 에스트라공은 1호실 침대에서 객고를 풀 수 있다. 그러다가 에스트라공은 마침내 고도와 헤어질 결심을 할 수도 있다. 문제는 아직 고도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헤어질 결심을 하지 말란 법은 없다. 

세계관의 관점에서 신플라톤주의의 거두 플로티누스처럼 세계를 유출로 받아들인다면 반대말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1은 다(多)와 대응한다. 하지만 이른바 정통 기독교 교리에 입각해 ‘무로부터 창조(Creatio ex nihilo)’를 받아들인다면 1은 0과 대응한다. 이때 1과 0은 어쩌면 반대말일 수 있다.

순수하게 세계관에 입각한다면 둘 가운데 신플라톤주의자가 오럴 섹스를 더 좋아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딱히 용한 추측이 아니어서 ‘무로부터 창조’론자가 굳이 덜 좋아한다고 단정할 것도 없다. 영화 <왕의 남자>의 장생(감우성)과 공길(이준기)의 대사처럼 위와 아래가 넘나드는 게 다반사인 세상에서 MBTI처럼 단정할 수는 없다. 아무려나 사랑이라면 세계관이야 중요할 것이 없다. 오럴 섹스면 어떻고 핵융합이면 어떻겠는가. 사랑이야말로 ‘무로부터 창조’이며 1을 다(多)로 증식하는 폭발이기도 하다. 물론 사랑엔 종말론이 있는데, 재림이 없는 종말이다. 

 

장생: 허! 요망한 것. 그래 좋다. 입을 채워주마. 윗입을 채워주랴, 아랫입을 채워주랴?

공길: 윗입! 자~(물구나무를 서며) 

윗입 대령이요~!

(영화 <왕의 남자> 중)

 

헌법 제1조 

대한민국 헌법 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이다. 독일 헌법(기본법) 1조는 “인간의 존엄은 침해되지 아니한다. 모든 국가권력은 이를 존중하고 보호할 의무를 진다”이다. 인간의 존엄은 어려운 말이지만, 민주공화국은 더 어려운 말이다. <왕의 남자>의 시대 배경은 조선 연산조이다.

 

유일신

구약성서 신의 모습을 비롯해 전통적인 인격적 신의 모습은, 현대인에게 불편하다. 불편은 감수할 용의가 있지만 현대인의 사유에선 납득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계몽주의와 근대를 거치며 이신론이나 무신론이 나오고 범재신론까지 등장한 것은 불가피했다고 할 수 있다. 전지전능의 고전적 유신론의 신의 모습은 현대인에게 신의 이해를 방해할 공산이 크다.

니케아・칼케돈 공의회 등을 거치며 정착된 기독교 교리는, 팔레스타인의 보잘것없는 유대인 청년이 그 자신은 물론 구약에 의해서도 신으로 확증된다는 것을 믿기 위한 기독교인들의 노력이었다. 

형식논리학으로 입증되지 않는 신 이해 주장은 결국 신이라는 최종 권위이자 최종 심급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어떤 인간의 신에 관한 존재론적 주장을 다른 인간이 수용하려면 주장하는 인간이 신의 권위에 기대야 한다. 계시가 고전적 유신론의 체계에서 작동하는 전지전능의 신과 세계 사이의 소통수단이기에 다른 신 이해에 비해 인간의 신 이해에 있어서 얼핏 더 큰 설명력을 갖는 듯하다. 문제는 계시가 개인적이라는 데서 발생한다.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한 가장 포괄적인 계시가 예수였지만, 예수마저 많은 이가 믿지 않았는데 예수가 아닌 다른 인간 존재의 개인적 계시 효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최종 심급인 계시는 고전적 유신론 체계에서 그것이 최종 심급에 의해 보증받았음에도 사회 내에서 다시 승인받는 과정을 거친다. 고전적 유신론은 근본적으로 이원론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이쪽 세계에 전해진 저쪽 세계의 전언이 정말로 저쪽 세계의 것인지를 이쪽 세계에서 판정해야 한다는 역설이 생긴다. 역사를 보면 그 승인이나 판정이 꼭 타당하거나 합리적이었다고 하기 힘들고 인간의 시선으로는 그 반대로 여겨지는 것이 많았다. 존 웨슬리는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가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부르고 기독교 교회와 성직자의 세계에 부와 권력이 흘러넘치게 함으로써, 이전에 있었던 수십 번의 박해가 가져온 것보다 더 악한 일들을 교회에 불러들였다”며 “콘스탄티누스 이후 종교개혁까지 이런 상태는 실로 한탄할 만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불편한 승인의 대표 사례에 해당한다. 

신적인 계시를 사회(권력)의 승인을 거쳐야 하는 한계 자체도 신의 구상 안에 들어있다는 설명이 가능할까. 이런 승인과 판정 과정을 거쳤어도 신 이해의 폭이 꽤 넓고 다양한 상황인 것을 보면 만일 이런 과정이 없었다면 사회적인, 그리고 사회 안 사회적 인간의 어느 정도 보편적이라고 할 신 이해는 불가능했을 터다. 또한 이런 과정이 없었다면 아마 기독교가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측면에서 최종 심급의 이원화, 혹은 최종 심급을 승인하는 또 다른 최종 심급까지 포함해 모두가 신의 섭리라는 식의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초역사적인 신은 특정한 역사의 국면에서 적합한 인간을 골라 계시를 내리고 그 계시가 인간 사회의 작동원리에 따라 선별돼 유통되도록 일임한다고 해석해도 좋을까. 신의 뜻을 찾아가는 인간의 노력과 제한된 자유의지 속에서 최상의 결론을 내리고자 애쓰는 세상의 법을 (신이) 인정하고 격려한다고 상상해도 좋을까. 

에덴동산처럼 신이 직접 관여하는 신정이 아니라면 일종의 간접통치인 고전적 유일신 체계에서는 그런 위임만이 최선이 된다. 먼지 하나에까지 신의 섭리가 작동한다고 믿어도 무방하지만 현실적으로 신의 계시의 진위를 판정하는 기관이 부재하기에 계시의 진위나 계시 간의 우열은 인간사회에 맡겨진다. 맡겨짐과 결론의 도출에 신이나 성령이 개입한다고 가정해도 된다. 그러나 갈등과 대치, 트레이드오프의 연속인 현실에서 누가 성령의 편에 섰는지를 어떻게 가름할 수 있을까. 성령이 임재했고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믿는, 주장하는 인간 사이의 경합과 다른 인간들의 판정은 외관상 전적으로 인간적이다. 내용상 그 모든 것에도 신의 의지가 작용한다면, 그 작용을 인간은 알 수 없기에 우리는 ‘승자가 계시를 받은 것’이란 질서주의 신앙에 흐를 위험에 직면한다. 어떤 (인간적) 결과도 승리한다면 (신적으로) 항상 옳다. 인간의 정의와 신의 정의가 어긋나는 상황은 전지전능하고 편재하는 고전적 유일신 체계에서 고전적이고 고질적 난점이다.

요는 에덴동산과 달리 개인적 소통방식을 고수하는 전통적 유일신 체계에서 인간세상은, 비록 그것이 현상적이라고 해도 계시의 최종 심급을 인간에게서 구하게 된다. 그 길을 벗어나는 방법은 그것마저 신의 구상이라는 전래의 설명을 소환하는 것이다. 다른 출구가 없어 보인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분적으로 인정하든지, 신인협력을 받아들이든지 하는 타협은 정교한 고전적 유일신 체계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굴욕이 된다.

인간이 노력하고 신이 결정한다는 결과주의나 무엇을 하든 신이 준비했다는 예정론은 근대성과는 충돌하며 근대의 진전에 따라 이신론이나 신의 죽음, 혹은 무신론을 초대하게 된다. 또는 칼빈주의 진영 내에서 근대성에 조응해 수정이 가해질 수 있다. 존 웨슬리와 함께 감리회의 기틀을 세운 주요한 인물로 꼽히는 조지 휫필드가 “당신의 하나님은 나의 악마”라고 말하며 웨슬리를 이단으로 공격한 이유는 이 수정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했다”는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논리적으로 인간의 주도적 의지와 노력을 전제할 수밖에 없기에 고전적 유신론에 균열을 가져오게 된다. 휫필드는 웨슬리가 (예정론을 배신하고 보편구원론을 주장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에 오염됐다고 봤다. 

 

이신론은 계몽주의 및 이성주의가 선호할 만한 신 이해이지만, 고전적 유일신보다 더 큰 논리적 좌초를 예고한다. 만들어놓고 개입하지 않는 신이란 구도 자체는 그럴듯하지만, 만들어놓고 개입하지 않는 신을 세계에서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문 안에서 문 밖의 존재를 파악하는 방법은 위에서 조감하는 것인데, 인간은 조감하는 존재가 아니라 문 안의 존재일 뿐이다. 투시와 같은 비유가 적용됨 직한 계시라는 설명도 불가능하다. 개입하지 않는 신으로부터 어떻게 투시 능력을 획득할 것인가. 이신론과 계시는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다.

범신론은 신 이해에서 언제나 훌륭한 대안이다. 세계가 신의 흔적이고 신의 몸이라면 인간은 온전하진 못해도 신을 이해할 자료를 구할 수 있고, 누적된 신 이해와 인간끼리의 소통을 통해 신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기독교라면 예수라고 하는 훌륭한 신의 자기 진술과 현현이 있어서 세계를 통한 신의 학습에 조력을 받을 수 있다.

범재신론은 신 이해에 있어 범신론보다 더 큰 설명력을 지닌다. 무신론자는 물론 다른 종교와도 공존할 가능성의 폭이 크다. 다만 범신론과 구별점인 ‘너머(beyond)’를 파악해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내재하며 초월하는, 세계 너머의 영토를 지닌 신이란 설명은 현대의 세계관에 비추어 깔끔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신을 이해하고 인식해야 할지 방법론이 잘 찾아지지 않는다. 너머 영역의 신을 추측할 뿐 알 방법은 없다. 인식론의 관점에서는 따라서 범신론과 범재신론이 동일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전부 드러난 것(범신론)과 부분만 드러났고 드러나지 않을 부분을 들여다볼 방법이 없는 것(범재신론) 사이에는, 적어도 들여다볼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차이가 없다. 

고전적 유신론과 범재신론은 인식의 한계라는 측면에서 동일한 어려움을 갖는다. 계시가 됐든 상호작용이 됐든, 인간이 신과 소통한 흔적을 축적해 신에 대한 탐구의 근거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 또한 공통적이다. 어떤 존재론이든 인식론이 뒷받침하지 않는 존재론은 공허한 사념놀이다.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혹은 보이면서 보이지 않는 신을 지각하고 이해하는 일은, 고전적 유일신 관점을 제외하면 언제나 귀납적이어야 한다. 신의 이해는 결국은 인간의 이해다. 즉 ‘나’의 이해다. 그게 태초에 작정한 신의 의도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에게 신을 이해할 의지나 필요가 있기나 한 걸까. 만일 있다면, 20세기에 가장 유명한 신학자의 하나였던 디트리히 본회퍼의 말대로 하나님 없이,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해 나가야 한다. 우리에겐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만이 너무 잘 이해된다는 게 난점이다. 

 

 

글·안치용 
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로 문학·정치·영화·춤·신학 등에 관한 글을 쓴다. ESG연구소장으로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을 주제로 활동하며 사회와 소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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