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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사랑 예찬: 안개 속의 미결 사건 - <헤어질 결심> 박찬욱
[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사랑 예찬: 안개 속의 미결 사건 - <헤어질 결심> 박찬욱
  • 정문영(영화평론가)
  • 승인 2023.01.16 1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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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걸어가는/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 . . /안개 속에 눈을 떠라. 눈물을 감추어라 (<안개>)

 

1. 안전한 사랑과 위험한 사랑

 

뉴욕 타임스 2022년 10대 영화에 선정되기도 한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2022)은 명실 공히 K-시네마의 현 위상을 확인시켜주는 대표적인 한국영화로 2022년 최고의 화제작임은 틀림없다. 최근 은퇴 후 생사를 헤맬 정도로 아팠던 한 시인이 오랜만에 시집을 내면서 딸들과 이 영화에 대해 나눈 얘길 들려주었다. 이 영화가 사랑에 관한 영화라고 감독은 말하지만, 딸들은 아무리 봐도 사랑 이야기가 아니고, 고전 연극의 주인공처럼 자기 잘못 때문에 붕괴하는 고결한 인물 이야기라는 것이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나이듦과 병듦이 가져다 준 “삶의 이슥함”을 더듬어낼 수 있는 시인의 혜안이 헤아리듯이,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가 분명하다. 아니, 박찬욱의 “사랑 예찬” 영화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사랑 예찬(Éloge de L’amour, 2009)을 쓴 바디우(Alain Badiou)에 의하면, 사랑한다는 것은 “온갖 고독을 넘어서 세계로부터 존재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포획되는 것”이다. 세계와의 단절 속에 고립된 두 사람, 서래(탕웨이)와 해준(박해일)의 우연한 만남은 바로 이러한 사랑의 시작이며 하나의 “사건”이 된다. 여기서 사건은 이 존재(being) 세계에서 새롭게 발생 또는 탄생하는 것, 즉 생성(becoming), 삶의 새로운 의미의 생성을 뜻한다. 생성은 존재와는 달리 존재하는 실체의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들의 사랑은 바로 이러한 사건으로서의 사랑이며, 종결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불투명한 안개 속의 사건, 영원히 미결로 남게 될 사건이다.

 

에로틱 스릴러가 아닌 이 영화가 전개하는 서래와 해준의 사랑 이야기엔 섹스가 없다. 16년 8개월 동안 좋은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온 해준과 정안(이정현) 부부의 섹스가 이 영화에서 유일한 섹스 장면이다. 정안은 건강에 좋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해준에 대한 소유욕을 육체적으로 채울 수 있기 때문에 밉고 싫을 때라도 주1회 섹스는 꼭 할 것을 요구한다. “원전완전안전”을 수호하는 원자력연구소 안전관리팀 과장 정안이 추구하는 사랑은 안전과 제한된 쾌락이 가져다주는 안락하고 안전한 사랑이다. 다시 말해, 정안과 같이 현대적인 안전 규범에 맞출 수 있는 사람은 사랑도 모든 위험에 미리 대비하면 완전 통제가 가능하며, 위험은 그런 준비를 못한 타자들에게만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정안은 낯선 위협적인 타자 서래와 얽힌 해준에게서 비롯될 갈등과 문제를 회피하기 위하여 즉각 그를 버리고 이주임(유태오)과 떠나는 안전 대피를 실행한다.

반면에 형사 해준의 미결 질곡동 사건 피의자 홍산오(박정민)의 살해 동기를 돈이라기보다는 “죽을 만큼 좋아한 여자”,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할 수 없는” 여자에 대한 사랑으로 간파할 수 있는 서래는 위험과 모험을 감수하는 “용맹한 행동”으로서의 사랑을 추구한다. 정안은 “살인도 있고 폭력도 있어야 행복”할 수 있는 해준이 자신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그는 구소산 변사 사건의 피의자로 만난 서래와의 첫 만남에서 이미 그녀가 자신과 “같은 종족”임을 알 수 있었고, 즉시 사건으로서의 위험한 사랑이 시작된다.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사랑 이야기는 빅데이터 시대의 유망 사업인 만남 알선 사이트의 광고 카피 “위험 없는 사랑을 당신에게!”가 약속하는 우연도 만남도 존재하지 않는 “위험 제로” 사랑을 선전하는 현대사회가 압박하고 있는 바로 이러한 위험한 사랑 이야기인 것이다. 사실 현대사회가 부추기는 안전한 사랑의 개념은 결국 사랑이란 쓸데없는 위험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향해 치닫고 있을 뿐이다. 이 영화는 위험 제로의 사랑이 보증하는 안전과 안락에 대항하여 새로운 생성, 삶의 의미의 생성을 위한 위험과 모험의 사건인 서래와 해준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사랑이 위협받고 있는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진정한 사랑을 예찬하는 영화이다.

 

2. 두 존재의 만남: “서래 씨가 나하고 같은 종족이란 거, 진작 알았어요.”

정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섹스는 두 주체 사이의 관계 맺기가 아니라 상대를 매개로 하여 결과적으로 자신과의 관계를 맺게 할 뿐이며, 따라서 그 상대는 쾌락의 실재를 발견하는데 대상, 타자로 이용될 뿐이다. 이러한 섹스의 필요성은 성관계는 없다는 라캉의 주장을 입증한다. 라캉의 주장에 기초한 섹슈얼리티와 기존 사랑 담론은 사랑을 성관계의 부재를 은폐하는 수단으로 다룰 뿐 아니라 일자가 존재한다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사실 아리스토파네스의 안드로기노스족(자신을 완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반쪽을 찾아 헤매는 전체성의 욕망, 일자를 향한 욕망) 이야기를 사랑의 기원으로 인용하는 플라톤의 향연(Symposium)부터 시작하여 거의 모든 사랑 담론들은 사랑은 일자, 하나 되기에 대한 욕망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반면에 서래와 해준의 사랑은 하나 되기가 아니라 마침내 둘이 되어 각 입장을 벗어나 삶의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사건이자, 하나 되기가 아니라 둘, 나아가 다자를 향해 열린 사랑이다.

 

해준은 서래가 자신과 “같은 종족”이란 단서를 현장에서의 죽은 남편 모습을 “말씀”으로 듣는 대신 “사진”으로 보겠다는 그녀의 선택에서 발견한다. “언제나 똑바로 보려고 노력”하는 자신처럼 구토를 유발할 정도로 참혹한 개미떼가 눈동자를 파먹고 있는 죽은 남편의 사진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겠다는 서래와의 만남에서 그는 같은 종족과의 만남을 경험한다. 이 만남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일부를 상대방에서 끌어내면서, 존재 그 자체에 가 닿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서래의 숨에 해준이 숨을 맞추면서 잠이 드는 것, 헤어졌다 우연히 다시 만났을 때, 다시 사는 것 같은 것, 이것이 사랑이다. 따라서 사랑은 대상에서 주체로 역전하는 만남의 사건으로, 존재를 목표로 하여, 존재 그 자체에 서로 가 닿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주체로, 마침내 실질적인 둘로 정립되는 사건이다.

 

3. 꼿꼿한 서래: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서래는 담당 형사 해준이 형사가 아니라 “현대인치고는” “품위”가 있어서, 그리고 해준은 서래가 긴장하지 않으면서, 몸이 꼿꼿하고, 똑바른 사람이라서 좋아한다고 서로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서래는 자부심, 품위 있는 고결한 주인공 해준을 붕괴시킨 팜므 파탈이 아니다. <아가씨>(2016)의 히데코(김민희)가 숙희(김태리)를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로 호명했듯이, 해준에게 서래는 ‘그를 붕괴하러 온, 그의 구원자’이다. 그를 무너뜨리고 깨뜨려 기존의 안정된 사회의 인식 습관을 구성하는 클리셰를 넘어서서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다시 볼 수 있도록 유도한 그의 구원자이다.

 

서래의 꼿꼿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는 분명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중국에서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고, 더 이상 참을 수도 없는 극한적 상황에 처한 서래는 자신의 존재와 세계 사이의 단절과 간극을 직면하였을 것이다. 이에 서래는 외조부와 어머니의 유골함을 안고 밀항을 시도했다. 이러한 서래의 꼿꼿함은 역사와 사회에서 배제된 소수, 노마드로 위험과 모험을 무릅쓰고 경계를 횡단하는 초국가적 탈주를 실행할 수 있는 적극적 소수로서의 면모에 기인하며, 해준을 소수-되기로 유도할 수 있는 그녀 매력이다.

사실 서래의 꼿꼿함은 바로 자신과 세계와의 단절에 직면하여 기존의 어떤 방식으로도 대처하거나 사유할 수 없는 무능력과 참을 수 없음의 상태에서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이러한 위기를 해결하고자 하는 그녀의 용기 있는 능동적인 행동에서 온 것이다. 서투른 한국말과 통역기 앱의 개입과 한계로 심문과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상상 속에서 서래 곁으로 가는 해준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시사하듯이, “친절한 형사” 해준의 심장(마음)은 서래에게 빼앗긴다.

 

4. 죽여주는 여자: “원하던 방식으로 보내 드렸어요.”

 

서래는 사라져서 다시 돌아오지 않게, “마침내” 끝에 도달하게 도와주는 죽여주는 여자의 역할을 반복해서 하고 있다. 병든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간호사가 되었던 서래는 더 이상 고통을 견딜 수 없는 어머니의 간절한 부탁에 펜타닐 네 알로 그녀를 “원하던 방식으로” 보내 드렸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밀입국자 서래의 합법적 체류를 도와 준 그녀의 구원자이자 가학적 폭력을 가한 가해자인 남편 기도수(유승목)의 죽음은 그의 사주로 그녀가 죽여준 것은 아니다. 기도수의 사랑 또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안의 사랑 방식처럼 소유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는 서래의 몸에 끔찍한 가학적 폭력을 가하고 자신의 모든 소지품에 새긴 이니셜 KDS를 가축처럼 그녀의 은밀한 신체 부위에 새길 정도로 소유욕이 병적으로 강하다. 그러나 산을 좋아하는 그가 찍은 등산 동영상에서 산 정상에 올라가 “더러운 세상은 멀리 떨어져 있다. 이렇게 죽어도 좋다”라며 그 행복한 순간을 표현했듯이, 서래는 그가 “원하던 대로 운명”할 수 있도록 죽여주었다. 그녀는 치밀한 계획을 세워 뇌물을 받은 부패 공무원이라는 오명을 벗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깔끔하게 자살을 선택한 것처럼 위장하여 그를 죽여준 것이다. 즉 그가 원하는 방식대로 죽여준 것이다.

서래는 또한 고통 속에서 임종을 기다리고 있는 화교이자 싱글맘으로 아들을 키운 사철성(서현우) 어머니를 자신을 위해 남겨 둔 펜타닐 네 알로 편하게 보내드린다. 물론 그녀의 목적은 철성으로 하여금 해준을 협박하는 재혼한 남편 임호신(박용우)을 죽이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이지만,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도록 철성의 어머니를 죽여준다.

다시 형사와 피의자의 관계로 신문실에서 만나, 두 남편이 한 형사의 관할 지역에서 자살하거나 살해된 사건 이야기를 들으면 자기는 “거, 참 공교롭네...”라고 할 것 같다는 해준에게 서래는 “참 불쌍한 여자네.”라고 할 것 같다고 말한다. 그녀가 담담하게 표현한 세상과의 단절과 고립 속에 처한 자신에 대한 연민의 감정은 바로 그녀가 죽여준 사람들 또는 돌본 사람들의 외로움과 고통에 대한 깊은 공감을 반영한 것이다. 둘의 만남은 최초의 다자를 가능하게 하는 관계이고, 이러한 만남은 다자를 향해 열린 사랑, 이 세계를 다자의 세계로 확장시키는 사랑을 의미한다. 따라서 “죽은 남편이, 산 노인 돌보는 일을 방해할 순 없습니다.”라는 서래의 말은 그녀가 둘 그리고 셋, 나아가 무한한 다자로 향한 열린 사랑을 실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5. 사랑의 지속성: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만나지 않으면 둘은 없다. 하나와 다른 하나만이 있을 뿐이다. 서래와 해준의 사랑은 둘을 하나로 만들지 않는다.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라는 서래의 중국어 대사처럼, 이들의 사랑은 불협화음을 이루면서 지속된다. 사실 이들의 사랑은 시작부터 위기이며, 또한 위기의 지속을 통해 유지된다. 같은 종족인 둘의 사랑은 이 둘을 하나로 만들지는 않지만 이 둘은 ‘하나의 진리’를 만드는 과정에 진입한다. 그 ‘하나의 진리’는 둘의 입장을 가로지르며, 각 입장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불확실성과 신비의 안개 속에 영원한 미결 사건으로 남는다. 사랑은 시작보다 지속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 미지의 무엇을 지속시키려는, 하나의 진리를 만들고자하는 욕망이 더 중요한 구성 요인이다.

 

해준에게 그들의 사랑을 영원한 미결 사건으로 남기고 사라지기 위해, 서래는 폰 대신 자신을 깊은 데 빠뜨려 아무도 못 찾게 만들고자 한다. 바닷가에 깊은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앉은 서래는 베케트(Samuel Beckett)의 행복한 날들(Happy Days, 1961)의 “이 얼마나 행복한 날들이었던가!”라고 외치는 위니(Winnie)를 연상시킨다. 이과두주를 마시며 완전한 붕괴의 파국을 기다리고 있는 꼿꼿하고 의연한 서래에게서 모래 둔덕에 묻힌 채 사랑은 항상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복한 위니의 모습을 발견한다.

 

해준은 서래가 사라지고 해가 지는 바닷가를 헤매며 안개 속에서 그녀를 부른다. 언젠가 해준은 바람이 전하는 서래의 “돌아서면 가로막는 낮은 목소리”를 듣고, 안개 속에 눈을 떠 출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서래가 사라지고 해준이 찾아 헤매는 안개 속은 보이지 않고 불확실하지만 의미들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두 사람의 사랑의 무대, 생성의 공간인 것이다.

 

6. 소수가 사라지기를 강요하는 세계와 헤어질 결심

서래는 “이주의 여성화” 현상이 두드러진 20세기말 한국영화가 재현한 일련의 이주여성들 가운데 장백지가 연기한 <파이란>(2001)의 파이란과는 20여년의 시차를 두고 가장 최근 등장한 중국이주여성이다. 두 영화가 재현한 세탁부와 간병인 파이란과 서래는 억압받고, 속임을 당하고, 지배를 당하지만 그냥 거기에 맹목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젠더화된 하위계층의 소수 이주여성노동자 집단에 속한다. 그러나 이 두 이주여성들은 공통점보다는 차별성이 더 부각되는 등장인물들로 재현되고 있다. 이러한 차별성은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영화가 이룬 국제적인 성과와 무관하지 않다.

20여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한국 영화에 등장하는 파이란과 서래 모두 소수로서의 조건으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은 죽고 사라진 존재가 된다는 것이 두 영화의 공통점이다. 그러나 파이란과는 달리 서래는 사라지기를 강요당하는 대신 그녀로 하여금 사라지기를 강요하는 세계와 헤어질 결심을 하고 기꺼이 사라지기를 선택한다. 따라서 이 영화는 한국 영화와 사회에서 이처럼 사라지기를 강요당한 소수에게 이제 본격적으로 말을 거는 K-시네마의 탄생을 고지하는 선구적인 영화이자 사랑 예찬의 영화로 호명될 수 있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정문영
영화평론가,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한국영화평론가협회와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다양한 매체와 장르의 텍스트들을 상호텍스트(intertext)와 팔림세스트(palimpsest)로 읽는 각색연구가 주요 관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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