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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의 언어’가 된 호두과자, 그리고….
‘배반의 언어’가 된 호두과자, 그리고….
  • 성일권 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 승인 2023.01.31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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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휴게소에 들러 라면을 먹고서 코끝을 자극하는 냄새를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덩치 큰 남자가 노란 봉투에 호두과자를 담고 있다.  ‘음, 그렇지! 휴게소에서는 역시 호두과자야.’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세 장을 건네주고, 갓 구운 호두과자 열 개가 담긴 봉투를 받아 하나를 꺼내 한입에 넣는다. 

오물오물 쩝쩝…. 그런데, 이상하다. 호두가 씹히지 않는다! 너무 급하게 먹어 호두 알갱이를 그냥 삼켰을까. 호두과자의 백미는 호두 알갱이를 혀로 골라내며 씹는 맛인데 혀끝이 밋밋하다. 호두과자를 제대로 만들기 위해선 핫케이크 가루, 계란, 우유, 식용유를 반죽한 뒤 호두 알갱이와 팥소를 넣어야 하는데, 호두가 빠졌나? 설마? 호두 알갱이를 찾아 호두과자를 또 한입, 또 한입, 또 한입, 나중에는 손으로 호두과자를 잘게 쪼개 형사 콜롬보처럼, 검사 윤석열과 한동훈처럼 호두 알갱이를 찾아봤지만 열 개를 다 먹었는데도 호두는 없다.

호두과자에 호두 없는 게 뭐 별거라고 웬 호들갑이냐고 핀잔을 받겠지만, 호두과자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필자로서는 나의 진심이 배반당한 것 같아 분하고 섭섭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붕어빵과 잉어빵에 붕어와 잉어가 없고, 새알 팥죽에 새알이 없고, 칼국수에 칼이 없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호두과자에 호두가 없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3~4배 오른 가스 난방비처럼 호두 값이 폭등했나? 그 사람들도 호두과자를 좋아할까? 그 사람들은 호두 없는 호두과자를 어떻게 생각할까? 마지막 열 번째 호두과자를 입에 넣을 때, ‘배반의 언어’를 일삼는 그들의 뻔뻔스러운 얼굴과 이제 ‘배반의 언어’를 가지게 된 호두과자가 겹치면서 난 그만 호두과자를 어금니로 힘껏 씹었다. 

공정과 정의는 그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그들만의 룰이고, 자유는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그들만의 자유’이고, 법치는 타인을 괴롭히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며 배반의 언어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1980년대 쿠데타로 집권한 뒤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비리로 점철된  군부독재시절의 ‘배반의 언어’들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부패와 비리로 얼룩진 자들이 ‘사회정의구현’, ‘바르게 살기운동’을 부르짖었으니 말이다. 

국가지도자와 정치인, 검사, 경찰, 판사, 변호사, 언론인, 지식인의 존재 이유는 국어사전에도 적혀있다. 그들이 국민이 기대하는 자신의 직무와 반대로 처신한다면, 시인 신동엽의 언어로 말하면 그들은 ‘껍데기’일뿐이고, 조금 철학적인 장 보드리야르식으로 말한다면 ‘진실이 없는’ 시뮐라크르, 페르디낭 드 소쉬르식으로 표현하자면 알맹이(기의) 없는 ‘기표’라고 하겠지만, 내게는 호두가 빠진 호두과자보다 못한 셈이다. 호두과자는 호두가 빠졌어도 고소하고 달콤하기라도 하지….  이제 껍데기는 가라! 

 

 

글·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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