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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동의 시대
반동의 시대
  • 성일권 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 승인 2022.08.01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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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율이 겨우 30%선을 오락가락하는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시절 공약을 내세워 여성가족부 폐지에 드라이브를 거는 모습은 민의 도도한 흐름에 맞짱을 뜨는 반동(反動)의 결기 같아서 가련함 마저 든다. 유럽식 의원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 같으면 교체되고도 남을 미천한 지지율에도 불구, 점차 허물어지는 자신의 지지층을 부여잡으려는 그의 무리수에서 허망함을 느낀다.

바야흐로 우리는 지금 뒤뚱거리는 ‘반동의 시대’에 발꿈치를 올리고 있다. 여기서 ‘반동’(réaction)이라 함은, 혁명사에서 흔히 봐온 혁명 이후의 피비린내 나는 그 반동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조세정의(租稅正義)의 원칙을 무시한 채 수십억 원에 달하는 ‘똘똘한 집’을 가진 특정지역 부유층을 위해 부동산세를 확 줄여주고, 코로나 시대에도 사상 초유의 실적을 거둔 기업들을 위해 법인세를 끌어내렸다. 반면, 노동자들에게는 인플레이션을 앞세워 기업을 두둔하며 압박을 가하고 있다. 

‘임금인상이 물가상승의 주범’이라는 논리가 성립한다면, ‘기업의 이윤확대가 인플레이션의 주범’이라는 논리가 더 큰 정당성을 가진다. 인플레이션 상황을 핑계로, 독과점적 지위를 가진 기업들은 대주주와 경영진, 고임금 정규직의 이익을 지속적으로 끌어올리고, 저임금 노동자들의 임금을 묶어두려는 윤정권의 반동의 정치가 썩 기껍지는 않다.

지난달 22일 마무리된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의 파업만 해도 그렇다. 협상타결 후, 판사출신 이상민 행정안전장관, 검사출신 한동훈 법무장관은 “불법점거과정에서 발생한 위법행위에 법과 원칙에 따라 대응할 것”이라고 겁박했고, 경찰은 바로 하청노동자 9명에 대한 체포영장을 신청했으나 법원은 체포영장을 기각했다. 파업의 불법여부를 가리지지 않은 채 노사합의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불법’의 딱지를 붙이는 것은 반동의 도발이다. 

또한 이상민 행정안전장관이 행안부내 경찰국 신설방침에 우려를 표명한 전국 경찰서장 회의에 대해 ‘하나회의 12·12 쿠데타’에 준하는 상황이라며 불법으로 규정하고, 회의 참석자들을 즉각 대기발령하고 감찰에 나선 것은 향후 행안부가 경찰인사 및 징계권을 장악할 경우 어떤 반동의 정치가 시작될지 가늠케 한다.

윤정권이 보여주는 반동의 극치는 반(反) 페미니즘적 행태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2018년 성폭력을 공론화한 ‘미투’ 운동, 2020년 실태가 드러난 성착취 ‘n번방’ 사건을 계기로 거세진 여성들의 페미니즘 흐름이 지난 대선 국면에서부터 반격을 당하더니, 급기야 페미니즘 운동의 정책적 성과물이라 할 여성가족부가 해체의 수순에 접어들었다. 윤 대통령은 얼마 전 여성가족부 업무보고에서 허명 뿐인 장관에게 “여가부 폐지 로드맵을 조속히 마련하라”고 직접 지시함으로써 후보시절부터 성별을 갈라치며 구조적 성차별의 존재를 부인해온 그의 ‘휴머니즘적’ 철학을 현실화시킬 반동의 방아쇠를 당겼다. 여가부를 폐지하거나 개편하려면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169석을 가진 민주당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이 불쑥 여가부 폐지를 꺼낸 이유는, 최근 간신히 유지하는 30%의 낮은 지지율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대통령실의 ‘사적채용’ 논란과 국민의힘 대표 직무대행의 “겨우 9급” 발언 등으로 검사출신 대통령의 대선 슬로건인 공정과 상식이 한낱 공약(空約)에 불과했고, 특히 대선공약이던 병사월급 200만원의 불확실성 등으로 남성 청년 지지자들이 빠져나가자, 지지율 회복의 터닝포인트로 여가부 폐지를 들고 나왔을 개연성이 크다. 행여 민주당 X맨들의 반동적 거수로 인해 여가부가 폐지된다면, 한 세기 넘게 지속돼온 페미니즘 혁명의 지난한 여정이 여기에서 꺾일지도 모를 일이다(8월 중순 출간 예정인 <마니에르 드 부아르> 특별호 ‘페미니즘, 미완의 투쟁’을 참조).

최근 발생한 인하대 성폭력 사망사건도 지금은 여가부를 없앨 때가 아님을, 오히려 예산을 적극 늘려 여가부의 역할과 기능을 살리며 성범죄를 방지하고 올바른 성평등 문화를 정립해야 할 때임을 보여준다. 정권이 반동의 시대를 이끄는 이 순간, 국제사회는 격동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미러 갈등, 원유·곡물 등 원자재 가격 급등, 고물가, 경기불황과 실업난, 그리고 북한핵 등 한반도 문제 등 수없는 난제가 산적해있는 때, 철지난 반동의 정치에 매달리는 것은 정치의 정석이 아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8월호는 윤정권이 가장 주목해야 할 우크라이나 전쟁의 해법, 민영화, 부채, 자유무역, 교육, 환경 등 전 지구적 난제들을 다뤘다. 심심풀이로 읽을 만한 가벼운 내용은 결코 아니지만, 휴가철에 모든 분들에게 꼼꼼한 일독을 권한다. 

 

 

글·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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