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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는 또 하나의 계급이다
‘아아’는 또 하나의 계급이다
  • 김민정 l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 승인 2023.02.28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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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스타벅스 한국 1호점이 이화여대 앞에 생길 때만 해도 커피는 취향과 감각의 표현이었다. 원두의 원산지는 어디이며 산미와 풍미는 어떤지가 커피 시음의 주요 포인트였다. 2007년 화제의 드라마 <커피 프린스 1호점>의 주·조연이 모두 바리스타란 직업을 가진 것도 커피라는 새로운 ‘구별짓기’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됐다. 

 

2023년 ‘지금 여기’의 커피는 어떤가. 우리는 매일 스타벅스에 간다. 그곳에서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인터넷 강좌를 듣고 업무 미팅을 한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커피를 마신다. 커피는 더 이상 바리스타의 전문적인 손길에 의해 제조되는 ‘고급 기호식품’이 아니다. 특히 ‘얼죽아’를 고집하는, 추운 겨울에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Z세대에게 커피는 테이크아웃 전문매장에서 990원에 파는 값싼 각성제일 뿐이다.

일명 ‘생명수’라고 일컬어지는 Z세대의 ‘아아’는 한 잔에 20온스(591ml)다. 성인 팔뚝만 한 텀블러에 커피를 테이크아웃하는 20대의 모습을 대학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박카스 대신, 그들은 고(高)카페인의 ‘아아’를 마신다. 그렇게 잠을 깨우고 그들 안의 희망과 절망을 깨운다. 591ml 당 990원. 편의점에서 파는 참이슬 소주 한 병(360ml)이 1,950원이라는 걸 감안했을 때 Z세대에게 ‘아아’는 값싸게 마실 수 있는 ‘서민’ 소주보다 더 지독한 커피 한 잔의 현실이다. 

 

아아 권하는 사회와 드라마 <더 글로리>

현진건의 소설 『술 권하는 사회』(1921)에서 만취해 돌아온 남편에게 아내는 누가 이렇게 술을 권했느냐고 묻는다. 남편은 푸념하듯 대답한다. “이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했다오!” 그렇다면 2023년 대한민국은 무엇을 권하는 사회인가. 바로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다. 학벌 불문, 직업 불문. 성별 불문. Z세대는 고카페인 ‘아아’를 마신다. ‘아아’ 권하는 사회. 누가 그들을 ‘아아’에 만취하게 하는가. 무엇이 그들을 24시간 깨어 있게 하는가. 

코로나 팬데믹 이후 만성화된 절망이 디폴트값이 돼버린 Z세대에게는 얼어죽어도 ‘아아’를 고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들이 느끼는 추위는 ‘몸’이 아닌 ‘맘’에서 비롯된다. 육체의 추위는 영혼이 느끼는 겨울의 체감 온도와 비교하면 사소한 투정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의 Z세대는 어떤 세상을 보고, 어떤 세상을 살고 있을까. 2023년 새해 최고의 화제작 <더 글로리>. 지난해 12월 30일 공개되자마자 국내 넷플릭스 순위 1위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적 시청 1억 시간을 돌파하며 글로벌 비영어권 TV 부문 1위를 차지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드라마는 학교폭력으로 영혼까지 망가진 여고생이 18년을 기다려 치밀하게 준비한 복수극을 다룬다. 

최근 몇 년 사이 학교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이 높아진 만큼 학교폭력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가 쏟아지듯 많이 나오고 있다. 그중에서도 <더 글로리>는 단연 돋보인다. 학교폭력을 다룬 작품들은 대체로 가해자를 향한 피해자의 분노가 육체적으로 표현된다. 죽이거나 때리거나. 그런데, <더 글로리>는 다르다. 학교폭력이 육체와 영혼을 갉아먹듯 복수도 육체와 영혼, 둘 다를 겨냥한다. 자신이 받은 고통의 원금에 복리 이자까지 붙여 몇 배로 돌려준다. 드라마 속 Z세대의 계산법은 기성세대의 대차대조표를 능가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파상은 파상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 글쎄... 그건 너무 페어플레이 같은데요. 여러분.” 

극 중 학폭 피해자 문동은은 가해자 박연진이 가진 것을 모두 빼앗아 없애는 치밀한 심리 복수극을 펼친다. 이보다 시원한 ‘사이다맛’ 복수는 없다. 하지만 <더 글로리>를 3인칭 전지적 시청자가 아닌 1인칭 주인공 문동은의 시점에서 보면 전혀 다른 실감으로 다가온다. 

10대와 20대의 모든 시간을 제물 삼아 이루어낸 복수. 18년을 살아오는 동안 문동은에게 현재는 없었다. 오로지 고통의 과거만 반복 재생될 뿐이다. 극 중 문동은은 복수를 위해 학교 선생님으로서 보장받은 미래를 포기한다. 새로운 사랑도 거절한다. 행복을 향한 모든 가능성을 차단한 셈이다. 문동은에게 과거는 현재에도 미래에도 반복되는 돌림노래와 같다. 열여덟 여고생에게 주어진 극 중 설정값은 복수의 화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과거와 복수로 내몰린 한국 드라마 속 Z세대에게 오늘은 없다. 어제의 오늘, 어제의 내일만 있을 뿐이다. 다른 듯 같은 삶을 매일 반복하는 과거에 갇힌 인생,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돈다. 

  

폐쇄된 멀티버스와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이번 생은 망했다’라는 의미의 ‘이생망’이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절망적인 현실에 대한 MZ세대의 자조적인 하소연이었다. 정의와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거대 담론의 시대가 저물고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거대한 파도 앞에서 M세대는 각자의 동굴로 들어가 삶의 의미와 자족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소확행’.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월셋집에 살아도 하루 한 잔의 위스키를 포기할 순 없다. 미래가 없다면 오늘을 살면 그만이었다. 소확행과 더불어 현재의 행복을 중요시하게 여기는 생활방식을 가진 욜로(YOLO)족이 많은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 여기의 ‘이생망’은 Z세대에게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이번 생은 망했지만 다음 생은 망하지 않을 수 있다. 인스타그램이 발표한 <Z세대가 바라본 2022 트렌드> 조사 결과에 따르면 가장 주목받을 최신 인터넷 트렌드는 메타버스다. 나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 나의 삶과 내가 사는 세상이 달라진다. 삶의 자유의지에서 발생하는 다중 세계, 그게 바로 멀티버스의 기본원리다. 

같은 플레이를 반복하는 게임 콘텐츠 경험치가 다른 세대보다 현저히 높은 Z세대에게 드라마 속 N차 인생은 멀티버스에 사는 또 다른 ‘나’의 흥미진진한 패자부활전이다. 어차피 이번 생에서 미래가 없다면 다음 생으로 가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Z세대가 실제로 목격한 드라마 속 N차 인생은 우리가 아는 그 멀티버스와 다르다. 선택은 선택인데,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지가 하나뿐인 제한된 선택이고 강요된 선택이다. 

170여 개국에 판권이 팔린 2022년 화제작 <재벌집 막내아들>은 30대 재벌 비서가 살해당한 뒤 초등학생 재벌 3세로 다시 태어나 자신을 죽인 재벌 패밀리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겉보기에는 인생 2회차 재벌 3세의 화려한 판타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초등학교 3학년, 열 살짜리 소년이 자신을 죽인 범인과 한 가족으로 지내며 20년 이상 복수를 준비하는 끔찍한 호러물이다. 어린이는 자라 어른이 된다. 하지만 Z세대는 자라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피해자다. Z세대가 마주한 멀티버스는 폐쇄된 멀티버스, 즉 과거가 무한 반복하는 ‘타임 루프’다. 미래는커녕 오늘조차 허락되지 않는 과거에 붙들린 삶이다. 

 

Z세대의 정체성과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

고카페인 ‘아아’는 무한 반복의 타임 루프를 버티게 하는 필수템이다. 모두가 잠든 밤에도 ‘나’는 깨어 있어야 한다. 생명수 ‘아아’는 마르지 않는 옹달샘처럼 한 잔에 99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공급되며 ‘나’를 깨어 있게 만든다. 결국, 이것은 선택이 아닌 ‘강요’이며 취향이 아닌 ‘계급’의 문제다. 

그동안 고성장 시대를 구가했던 한국 경제는 중산층의 몰락과 계급의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성장이 둔화되면서 신분 이동은 한층 어려워지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갑과 을로 이뤄진 이분법적인 세계는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필두로 K-드라마의 주요 배경이 됐다. 하지만 끝을 예측할 수 없는 저성장의 터널에 진입하면서 대한민국에서는 최초로 부모 세대보다 가난한 자식 세대가 탄생했다. 그렇게 한 세대가 통째로 세계관의 바닥으로 수직하락하는 경험을 Z세대는 공유했다. 갑도 아니고 을도 아닌, 그 무엇의 등장이었다. 그들은 갑과 을로 이루어진 이분법적 세계, 그러니까 기성세대가 만든 계급제도 ‘밖’에 존재한다. 

견고한 기득권 질서의 밖에서 Z세대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열정페이’는 Z세대에게 주어진 불명예스러운 훈장이다. 공개 하루 만에 넷플릭스 랭킹 1위를 기록한 K-하이틴 좀비물 <지금 우리 학교는>(2022). 극 중 주인공 반장 최남라는 좀비에게 물리지만 좀비와 인간의 컨버전스인 ‘절비’가 된다. 인간의 삶은 끝났지만 절비로서의 삶이 또다시 시작된다. 그리고 모두가 떠난 학교에 혼자 남는다. “아직 할 일이 남았어.” 죽어도 죽지 못하고,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죽음과 삶의 멀티버스에 갇힌 존재’,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계 밖으로 추방된 존재,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 Z세대의 정체성이다. “어른도 아니고, 애들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괴물도 아닌 것과 같아.” 

 

누구도 가보지 못한 세계

섣부른 격려는 희망고문에 불과하고, 어설픈 연민은 무관심의 다른 말이다. 진보와 진화의 직선적 시간관에서 쫓겨나 그들이 유배당한 그곳은 지금까지 아무도 경험하지 못하고 누구도 가보지 못한 미지(未知)의 세계다. 추방은 차별과 배제의 수단임이 분명하지만 자발적 추방은 자유와 해방이란 이름의 혁명이 될 수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더 많은 별을 볼 수 있다. 준비 없이 저성장의 어두운 터널 안에 들어선 그들이 손에 든 ‘아아’는 각자의 작은 동굴을 밝히는 희미한 촛불이 될 수도 있고,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횃불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밤하늘에 수놓은 아름다운 별이 될지도 모른다. 

학벌 불문, 직업 불문, 성별 불문. 모두 ‘아아’를 높이 쳐들고 서로 다른 현실과 모순 앞에서 천 개의 취향과 만 개의 감각으로 분투해야 한다. Z세대라는 하나의 이름, 하나의 얼굴로 환원되고 수렴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Z세대가 제일 먼저 스스로 지켜내야 할 자기 정체성이자 사회구성원으로서 감당해야 할 권리이며 의무다. 스타벅스에서 마실 수 있는 커피음료만 해도 오십 종이 넘는다. 다른 음료까지 포함하면 그 가짓수는 우리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다. 2023년 꽃 피는 봄, 이제 자기 자신의 이름을 하나씩 기억해 불러야 할 때다. 블론드 바닐라 더블 샷 마키아또, 에스프레소 콘 파나… 

 

 

글·김민정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한 사람이 한 권의 책’이라는 생각으로 문학과 문화, 창작과 비평을 분주히 오가며 나만의 장르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드라마에 내 얼굴이 있다』(2022), 『언니가 있다는 건 좀 부러운걸』(2021), 『당신의 밤을 위한 드라마 사용법』(2020), 『당신의 삶은 어떤 드라마인가요』(201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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