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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민주화시대의 교육은 어떻게?
포스트 민주화시대의 교육은 어떻게?
  • 조희연 l 서울시 교육감
  • 승인 2023.02.28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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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가 잉태한 내재적 딜레마(2)

“세월호 유족은 돈도 많이 받아놓고, 왜 그렇게 시끄럽게 하는지 모르겠다며 볼멘 소리를 하는 기사님들이 있다. 나는 그분들에게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분들 자식 말고 기사님 자식이 죽었어야, 기사님이 돈도 많이 받으시고 나라도 조용하고 참 좋았을 텐데요’라고 말해준다. 최대한 진지한 표정으로 말이다. 그러면, 그분들이 입을 다물고 목적지까지 조용히 간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접한 글이다. 나는 글을 쓰신 분의 마음 즉 세월호 사건에 대한 분노, 희생자 가족들에 대한 연민에 공감했다. 그러면서도, ‘이건 아닌데’ 하며 상념에 빠져들었다. 

포스트 민주화시대의 대안적 길을 생각하는 입장에서도 우리는 반독재 민주화운동, 혹은 시민운동, 넓은 의미에서 진보의 ‘정신(Spirit)’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즉 우리가 광주학살을 자행한 전두환 권력을 비롯한 독재권력, 나쁜 권력에 대해 분노하고 증오하며 투쟁한 이유는, ‘좋은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혹시 이제 분노와 증오에 기초한 투쟁만 남은 것은 아닐까? 이런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물론, 더 높은 정의를 향한 우리의 분노, 증오, 그리고 그에 기반한 투쟁은 여전히 필요하다. 

그러나 시적 언어를 사용한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회를 위해서, 연대하는 사회를 위해서, 타인의 어리석음을 박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듬고 함께 성장하는 사회를 위해서, 분노하고 증오하고 투쟁한 것이다. 더 많은 분노투쟁과 증오투쟁만으로 좋은 사회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분노투쟁과 증오투쟁은 때로는 미러링을 통해 우리 편의 감정적 힐링과 단합을 촉발할 수는 있지만, 상대방을 승복시키지는 못한다. 때로는 극단주의를 촉발하는 자양분이 되기도 한다. 

 

다문화 가정 출신 학생들이 대한민국의 인재로, 리더로 성장할 수 있는 교육환경이 필요하다. 사진은 대구 죽전초등학교에서 열린, ‘찾아가는 다문화 체험교실’ 풍경(출처: <뉴스1>)

새로운 평등프로젝트: 각개약진을 넘는 종합적 대안의 필요성

몇 가지 예를 들어 서술해본다. 먼저 나는, 지난 30여 년 민주화시대의 진보적 프로젝트에 대해, 새로운 구성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민주화 시기의 민주주의 확장을 전제로 한 평등프로젝트는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 민주화 시기를 통한 성공의 위기와 민주화 시기에도 불구하고 확장된 사회경제적 모순과 불평등에 대한 새로운 솔루션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런 새로운 천착과정에 나는 복기(復碁)적 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부동산 정책에 관해서 문재인 정부 시기로 돌아간다고 하면 ‘어떤 선택지들이 있었고, 우리가 다른 사고를 할 때 어떤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는가’하는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민주화시대에는 억압된 약자 집단의 투쟁, 그로 인한 약자집단의 사회경제적 조건의 개선을 기반으로 평등화의 길이 촉진돼 왔다. 이는 어느 시대에도 필요조건이나, 포스트민주화시대에는 충분조건은 아니다. 민주화시대를 경과하면서 변화된 사회진보의 조건, 그 복잡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개별 노동조합의 입장에서 자신의 이익을 방어하고 확대하기 위한 노력만으로는 총체적 진보의 역할을 할 수 없다. 노동조합의 진보적 투쟁에 기반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서 국가적인 사회경제적 평등프로젝트가 필요하다. 

일례로, 수도권의 집값을 잡겠다고 개혁진보정당이 보수정당과 아파트 짓기 경쟁을 펼치는 한, 지방소멸 위기는 어떤 정권 하에서도 피할 수 없다. 수도권의 아파트의 확대건설이 지방소멸의 근인(近因)이자 원인(遠因)이 되는 역설적 현실을 넘어서야 한다. 부동산 문제에 관한 한, 민주화시대의 진보패러다임은 붕괴했다고 본다. 

나는 민주화 전기를 지나면서, 진보의 헤게모니 하에서 진보와 자유주의세력 간의 연합이 지속됐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민주화 후기를 거치면서, 이런 연합에 균열이 생겼다. 조국 사태를 계기로 일어난 <조국 흑서> 저자들의 이반(離反)이 그 상징적 사례라고 본다. 긴 독재의 시대를 뒤로하고, 그 독재의 유산을 극복하기 위한 장기 민주화의 시기에 존재했던 이 연합은, 앞서 언급한 도덕적 우위구도의 약화, 내로남불적 계기들로 힘을 잃어갔다. 후술하는 바와 같은 새로운 평등프로젝트와 비전 속에서 재구성된 진보, 재구성된 자유주의세력 간의 연합이 새롭게 사고돼야 한다. 

 

삼칠제 민주주의?

둘째, 나는 앞에서 민주화시대를 관통하는 가운데 생겼던 도덕적 구도의 변화를 이야기했다. 또한 민주화의 상징성을 보유하는 386세대의 이른바 ‘기득권적 지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이런 조건 속에서도, 우리는 계속 전진해야 한다. 사실 독재와 싸우던 민주화세력도, 독재세력도 모두 허물을 지닌 인간이다. 그러나 전자는 ‘반독재’라는 시대적 조건 속에서 과잉 도덕성을 부여받았다고도 할 수 있다. 기독교적 언어를 사용하면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는 모두 죄인인데, 여전히 ‘정의의 전쟁’이 가능한가?

정치와 사회운동은 ‘천사와 악마의 싸움’이 아니다. 그러나 특정한 시대적 조건에서 우리 진영은 천사로 인식되고 상대진영은 악마로 인식된다. 우리 모두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열망할 때, 독재세력은 ‘악마’로 인식됐다. 물론, 악마는 무찔러야 하는 존재다. 그래서 악마(독재세력)를 무찌르는 자세로 민주화 30년을 치열하게 살아왔다. 

그렇기에, 이제 우리에게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삼칠제 민주주의’를 주장한다. 즉 민주주의에는 투쟁의 정치와 ‘역지사지에 기반한 공존의 정치’가 존재하는데, 지난 30여 년 민주화 시기에는 십(10) 모두를 투쟁의 정치로 채워왔다. 여전히 ‘정의의 전쟁’을 치뤄야 하므로 칠(7)’은 투쟁의 정치로 채울 수밖에 없지만, 앞서 서술한 변화를 전제할 때 나머지 ‘삼(3)’은 ‘역지사지형 공존의 정치’로 채워야 한다고 말이다. 

상대방을 100% 악마로 상정한 정치는, 오히려 그 진정성과 도덕성을 의심받게 된다. 특히, 치열한 보수 대 진보의 진영대결에서 중간지대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호소력이 떨어진다. 우리 편도 천사는 아님을 이미 여러 경험을 통해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이전 정부에서 임명된 고위직 기관장들이 임기를 채워야 하는지, 정부 변화에 맞춰 사퇴해야 하는지’에 대한 치열한 정치적 쟁점이 있다. 

특정 정당이 여당이 되면 임기를 채워야 한다고 말하고, 야당이 되면 당장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바뀌면 매번 반복되는 현상이다. 이런 주제들의 경우 ‘역지사지의 관점에서 공존의 룰’을 위한 공존의 이니셔티브를, 진보 측에서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국내적·국제적 극단주의 시대에 평화와 공존이 과연 전략이 될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다. 

 

진보의 확장과 미스매치의 보완

셋째, 진보의 가치 지평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진보의 내포와 외연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단히 새로운 시대적 조건을 반영하며 그 내용을 확장하고 쇄신해야 한다. 기후위기 대처 등 생태주의는 이제 국가정책에서 필수적이고 우선적인 요소가 됐다. 또한 우리 사회가 급속히 다문화사회가 되면서, 상호주의 문화인식은 더욱 절박해지고 있다. 

권위주의와 싸우며, 보수세력에 대해 도덕적 우위를 가졌던 세력들은 이런 새로운 진보적 가치들을 반영하지 못하는, 그에 따라 도덕적 우위를 잃는 상황도 출현했다. 민주화 시기의 진보는 실상 민족주의적 지향을 근저에 깔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때로는 그 점이 폐쇄성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문재인 정부 시기 강화된 ‘토착왜구’ 관련 인식이 한 예가 될 것이다. 민족주의적 진보의 긍정성을 계승하는 한편, 세계시민으로서의 보편적 진보성을 강화해야 한다. 

이렇게 진보의 가치를 확장하는 동시에, ‘진보적 문화지체의 해결’이라는 난제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문화지체’라는 사회학적 개념은 급속한 경제적·기술적 변화에 넓은 의미의 문화적 인식과 생활양식이 따라가지 못해 발생하는 미스매치 현상을 의미한다. 급속한 민주화의 과정에서 다양한 진보적 가치들이 확산되고 제도적 차원에서도 일부 실현됐으나 문화, 인식, 생활의 차원에서는 진보적 가치가 충분히 수용 및 정착하지 못한 것이 이런 ‘진보적 문화지체’다. 

성소수자 등 성 문제에 대한 인식의 충돌도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최근 국내에서 주목받는 MZ세대의 정치적 지향의 변화에는, ‘정치적 올바름(PC)’에 대한 좌절과 반발이 녹아있다. 앞서 서술한 부동산 문제 등을 둘러싼 사회경제적 좌절과 함께, 민주화시대를 관통하며 작동해온 각종 PC에 대한 정서적 반발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는 언제나 진보한다. 때로는 지그재그로, 때로는 일보 전진-이보후퇴를 하면서도 결국에는 전진한다. 나는 그런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런 전진의 그늘에 이런 미스매치가 존재한다. 장기 민주화시대에는 전진에 방점이 찍혀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미스매치의 비중이 커졌다. 

미스매치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며, 또 동시에 어떻게 전진할 것인가? 

 

당당한 전투적 시민, 동시에 성숙한 공동체적 시민

앞서 민주화의 과정을 통해서 당당해진 전투적 시민들에 대해 언급했다. 특정 시공간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출현하기도 한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 민주화시대의 ‘실패에 따른 새로운 도전’이 아니라, ‘성공의 위기’라고 할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이 당당한 전투성을, 이타적이고 공동체적인 힘으로 바꿀 것인지다.

이제 당당한 전투적 시민이자, 성숙한 공동체적 시민으로서의 지향점을 진보가 제기해야 한다. 진보의 메시지도 이 두 가지가 균형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나아가, 모든 주제영역에서 하나의 가치의 최대주의적 실현만이 선(善)이 아닌 현실이 출현했다. 이제 바람직한 다수의 가치가 조화롭게 해법을 찾아야 할 과제들도 늘어났다.

국가교육과정에서도 가장 어려운 문제가, 기존의 교과별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이다. 현존하는 교과의 이해관계를 지키고 확장하는 교과 직역주의가 합리적 변화를 막는 경우가 많다. 이는 교육영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화 성공의 역설이다. 민주주의를 전제로, 교육공동체 전체의 관점에서 성숙한 협의와 합의를 이룰 수 있는가? 이는 새로운 과제다. 민주화 시기의 전 여정에서 ‘전투적 민주주의’가 존재했다. 그 전투성은 역동성의 다른 얼굴이다. 전투성의 긍정적인 측면을 견지하면서, ‘성숙한 민주주의’의 길을 찾아야 한다. 

 

공존형·세계시민형 민주시민교육

앞서, 민주화 시기 전체와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일반적 서술을 했다. 각자의 영역에서 포스트 민주화시대의 새로운 관점에 서서 어떻게 새로운 해법을 모색해야 하는가? 여기서는 교육정책 일부를 예로 서술하고자 한다.

지난 30여 년, 민주화 시기에 대한민국 교육의 핵심 가치지향은 민주시민교육이었다. 권위주의 시대의 ‘군기 잡힌’ 국민에서 벗어나, 민주화시대의 당당하고 주체적인, 때로는 전투적인 시민을 육성하는 것이었다. 민주주의에 내포된 평등한 관계, 상호존중의 가치들을 생활화한 민주시민을 육성한다는 목표가 교육의 중심에 존재했다. 과거 독재체제 하에서는 교육행정체제도 권위주의적으로 작동한 반면, 민주화 시기에는 민주주의, 자율, 자치 등의 가치에 기반한 교육행정체제로의 전환을 위해 다양한 교육혁신정책이 추진됐다. 이 혁신교육의 핵심에, 민주화 시기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민주주의 원리의 실현이 있었다.

이제 포스트 민주화시대로의 전환에 맞춰, 민주시민교육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그 주된 방향은 ‘공존형 민주시민교육’으로의 변화다. 내가 다른 경쟁자 학생을 누르고 승리하는 ‘일등주의’ 교육이 아닌 배움의 속도,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 태생적 역량, 신념과 의견의 차이들을 초월해 서로 존중하고 연대하는 교육이다. 

현 시기에 요구되는 공존형 민주시민교육은 국경을 넘게 될 것이다. 인간 중심의 민주시민교육을 넘어, 기후위기 시대의 자연과 인간의 공존교육이 돼야 한다. 민족과 국가 중심의 민주시민교육을 넘어서서, 초국경적 공감능력을 배양하는 민주시민교육이 필요하다. 자폐적 민족주의나 협소한 국가주의를 넘어서는 세계시민의식을 지향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공존형 민주시민교육은 앞서 언급한 바, 지구촌화의 시대, 그리고 기후위기 시대를 전제할 때, 세계시민형 민주시민교육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교육영역에서 이런 새로운 관점을 실현하고자 암중모색 중이다. 나는 서울시교육감 3기 임기를 시작하며 ‘공존의 교육으로 공존의 사회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교육과 사회는 상호작용한다. 교육이 달라지면 사회가 바뀐다. 사회의 변화는 다시 교육에 영향을 미친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무리한 진영 논리, 갈수록 심각해지는 사회경제적 양극화는 교육에도 어떻게든 반영되기 마련이다. 공존의 교육과 공존의 사회는 맞물려 있다. 

공존의 교육은 여러 층위로 이뤄진다. 먼저 배우는 속도가 빠른 학생과 느린 학생이 공존해야 한다. 학력 양극화가 갈수록 심해진다. 코로나19 시기 비대면 수업이 이뤄지면서 학습 중간층이 줄어들었다. 부모의 경제력이 학생의 학력으로 이어지는 현상이 가속화되고,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심해진 탓도 있다. 여기에 타고난 재능의 차이까지 고려하면, 빨리 배우는 학생은 점점 빨리 배우고 느린 학생은 계속 뒤처지는 일이 생긴다. 

배우는 속도가 느린 이유는 매우 다양하다. 난독, 난산 등의 증세가 있는 경우도 있다. 가정에서 안정적인 돌봄이 이뤄지지 않는 탓도 있다. 따라서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맞춤형 처방이 필요하다. 단지 시험과 학력을 강조하는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서울시교육청은 느린 학습자에 대한 지원과 기초학력 보장을 우선적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 물론, 배우는 속도가 빠른 학생은 자신의 재능을 보다 다양하게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또 다른 입장이 교실 안에서 공존해야 한다. 서울시교육청은 다양한 토론과 글쓰기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심층 독서 프로그램, 생각을 쓰는 교실 등이다. 평소 생각하지 못했던 입장을 겪어보고, 그에 대한 생각을 말이나 글로 담아내는 것이다. 이런 경험 속에서 학생들은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다른 입장을 충분히 경험해야 입장이 다른 이들과 공존하는 시민으로 자랄 수 있다. 

아울러 다양한 계층이 공존하는 학교가 돼야 한다. 교육계 외부에서는 낯설지만, 교육청에서는 매년 학기 초에 이른바 ‘배정 갈등’이 격렬하다. 서울의 경우, 평준화 지역이기 때문에, 중학교, 고등학교에 학생들을 교육청이 학군에 따라서, 학급당 학생 수를 고려하면서, ‘근거리에 균형배치’를 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배정을 둘러싼 학부모들의 민원이 심각하게 발생한다. 대체로 선호학교에 자신의 자녀를 배정시키기 위한 민원이다.

특히 대도시의 경우 지역별로 재개발이나 재건축이 이뤄지고, 신도시가 들어서는 등으로 ‘(학생)인구의 지리적 분포’가 달라지게 된다. 예컨대 신생 중산층 아파트의 학부모들은 자녀들이 자신들이 선호하는 학교에 들어가기를 원한다. 인근의 선호학교가 과밀이 돼 조금 먼 학교에 배정하고자 하는 경우 격렬히 반대한다. 때로는 근거리에 있는 비(非)선호학교를 기피하고 원거리라도 선호학교에 배정해달라며 민원을 제기한다. 임대아파트 주민 학생과는 섞이는 것을 기피하는 경우도 많다.

개별적 사례들은 다양하나, 대체로 ‘계급적 분리교육’의 경향도 보인다. 계급적 배경이 다른 학생들과 분리되기를 원한다. 그동안 대한민국의 교육은 ‘통합’교육이었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아무리 다르더라도, 교실에서는 섞여서 공부했고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계급계층의 차이가 확대되면서, 이제 교육에서의 계급계층적 분리 추구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민주화를 통해 당당해지고 때로는 전투적이 된 시민들은 자신의 자녀들의 교육에서는 ‘분리주의적 전투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것을 공존형 교육으로 넘어서고자 한다. 

나아가, 인간과 자연의 공존교육이 필요하다. 기후위기는 이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됐다. 후세대들은 파괴된 생태계, 에너지와 자원 부족 속에서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공존하기 위한 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 서울시교육청은 기후위기 시대 교육의 방향으로 ‘생태전환교육’을 설정한다. ‘손수건부터 태양광까지’라는 슬로건 아래 손수건을 사용하는 작은 실천에서부터 에너지 자립형 학교, 탄소배출 제로학교를 지향하는 정책 등을 펼치고 있다. 한 학기나 1년 동안 농촌의 소규모학교에서 생활하는 ‘농촌유학’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현재 전남과 전북에서는 250여 명의 학생들이 농촌의 학교에서 생활하며 자연친화적 감수성을 지닌 생태시민을 지향하고 있다.

가장 큰 도전은, 국경을 넘는 세계시민형 공존인식 배양이다. 현재 서울에서는 ‘유네스코 협력학교’, ‘세계시민 혁신학교’ 등을 통해서, 다양한 지구적 의제들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고, 세계시민형 공존인식을 부여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진행 중이다. 군부 쿠데타로 고통받는 미얀마 사태에 대한 ‘계기수업’, 미얀마 난민을 위한 모금 등이 실행됐다. 다양한 민족, 인종, 종교적 배경의 학생들과 공존하는 세계시민형 감수성을 키우는 것은 절박한 과제가 되었다. 대구에서 이슬람 사원의 건립을 반대하기 위해, 지역 주민들이 사원 건립 공사장 앞에서 ‘돼지고기를 구워먹는’ 행위가 일어났다. 그러나 다양한 민족, 인종, 종교적 배경의 학생들은 이미 ‘다문화 학생’으로 서울의 교실에 있다. 

나는 다문화 가정 출신 청소년들이 대한민국의 인재로, 리더로 성장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교육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은 이미 저출산-저출생 국가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 0.79라는 저출산율을 기록했다. 불가피하게 다문화국가로 가고 있고, 이 미래의 다문화국가가 평화로운 공존의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해 세계시민형 공존마인드를 키우는 것이 중요해지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이처럼 여러 층위에서 공존의 교육을 실천하고 있다. 1987년 이전 민주화 투쟁의 언어만으론, 공존의 교육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민주화 이후 새로 제기된 과제를 직시해야만 낯선 미래를 준비하는 새로운 교육도 가능하다. 

 

 

글·조희연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사회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남가주대학교(USC), 대만 교통대학교, 캐나다 UBC에서 교환교수를 지냈고,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로 2014년 재직 중에 서울시 교육감으로 선출되어, 2023년 현재 3기 교육감으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투트랙 민주주의』(1-2권),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 『한국의 국가· 민주주의·정치변동』, 『비정상성에 대한 저항에서 정상성에 대한 저항으로』『동원된 근대화』, 『태어난 집은 달라도 배우는 교육은 같아야 한다』,  『일등주의 교육을 넘어』 , 『병든 사회, 아픈 교육』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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