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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에 대한 짧은 생각
[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에 대한 짧은 생각
  • 정우성(영화평론가)
  • 승인 2023.03.13 1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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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토마스 앤더슨(이하 PTA)의 영화와 나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데뷔부터 현재까지 거의 30년 가까이 만장일치의 찬사를 받는 장인의 영화를 취향이 아니라는 표현으로 에둘러 비판하는 것이 비겁하다고 생각한다면, PTA가 20세기에 만든 초기작들은 최악이었고 21세기에 만든 영화들은 만듦새는 분명 훌륭하지만, 작품 각각이 지닌 결점으로 인해 탁월한 작품은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인히어런트 바이스>(2014) 전까지는 말이다.

 

장편 데뷔작인 <리노의 도박사>(1996)는 존(존 C. 라일리)을 둘러싼 시드니(필립 베이커 홀)와 지미(새뮤얼 L. 잭슨) 사이의 긴장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면서 존과 시드니의 아이러니한 관계마저 극대화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범죄 장르의 우아한 무드만 남은 그저 그런 영화였다. 또한 <부기 나이트>(1997)와 <매그놀리아>(1999)는 데뷔작의 장점인 우아함마저 사라지고 과잉의 스타일과 산만함만 남은 앙상한 영화이다. 다음 작품인 <펀치 드렁크 러브>(2002)의 경우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인물의 불안과 사랑에 빠진 감정의 사이의 기이하고 얼얼한 감각 자체 집중하여 배리(애덤 샌들러)라는 독특한 캐릭터에서 오는 즐거움은 있지만, 정작 로맨스 장르로서 사랑에 빠진 두 인물 사이에서 오는 긴장은 미약한 애매한 영화로 남았다.

그리고 <데어 윌 비 블러드>(2007)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피와 석유의 끈적끈적하고 눅진한 감각이 스크린을 넘어 현재 미국의 현실에 들러붙는 듯한 역사성을 근원으로 만든 묵직하고 강렬한 작품이었다. 거의 다시 태어난 듯한 질적 완성도를 보여주는 이 작품으로 PTA는 스스로가 잘하는 것을 겨우 깨달은 것처럼 보인다. <리노의 도박사>의 시드니와 지미가 한 방씩 주고받았던 주도권 싸움을 변주하여 반복하는 듯한 내러티브의 핵심 모티프가 바로 그것이다. 이를테면 대니얼(다니엘 데이 루이스)과 일라이(폴 다노), <마스터>(2012)의 프레디(호아킨 피닉스)와 랭커스터(필립 시모어 호프먼), <팬텀 스레드>(2017)의 레이놀즈(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알마(빅키 크리엡스), <리코리쉬 피자>(2021)의 알라나(알라나 하임)와 개리(쿠퍼 호프먼)처럼 욕망의, 권력의, 사랑의 자리를 놓고 팽팽히 맞서는 인물들은 단지 겉모습만 바뀐채 PTA의 영화 속에서 영원히 반복되고 있는 것만 같다.

 

다만 앞서 언급했던 대로 <데어 윌 비 블러드>와 <마스터>에는 각각의 결점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역시 이후 PTA의 영화에서 반복될 관계의 주도권 싸움을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 구조의 외부에서 온다. 예컨대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영화의 핵심이자 강점인 강력한 역사성이 자본과 종교라는 대립 구도로 도식화되어 영화를 단순하게 만들며, <마스터>의 경우는 반대로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의 군인을 주인공으로 하면서, 몇몇 비평가들이 비판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방기한 것이 아니라, 강력하게 설정해놓은 역사적 배경을 방기함으로서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군인의 트라우마와 종교라는 배경설정은 점점 희미해지고 <데어 윌 비 블러드>처럼 자본과 종교의 비유도 아니고 <팬텀 스레드>나 <리코리쉬 피자>처럼 사랑이라는 보편적 가치도 아닌, 프레디와 랭커스터 간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도, 선생님과 제자도, 종교 지도자와 신도도 아닌 관계로 모호하게 남음으로써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게 만든다.

 

물론 이러한 알레고리의 도식성과 방만함을 오히려 강력한 주제의식과 모호한 영화적 감각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PTA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듯 하다. 그는 이후 <팬텀 스레드>와 <리코리쉬 피자>에서 영국과 미국의 과거를 배경으로 하되 시대성은 단지 스타일과 무드의 배경으로 축소함으로써 온전히 두 주요 인물의 주도권 싸움에서 오는 긴장을 중심으로 놓는다. 그럼으로써 인간과 인간관계의 미스터리 집중하며 산만하지도, 도식적이지도, 극단적으로 모호하지도 않은 투명한 영화적 감각이 빛을 발하는 방향으로 향한다. 특히 <팬텀 스레드>가 두 인물의 주도권 다툼을 그리면서 결핍과 과거를 묘사하는 무게추가 완전히 레이놀즈에 기울어 있어 영화의 후반부에 알마에게 주도권이 넘어갈 때의 감흥이 떨어진다고 생각되었던 반면, <리코리쉬 피자>는 완벽히 두 인물의 균형을 맞추어 엎치락뒤치락 움직이는 관계의 긴장감을 말 그대로 서로에게서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지기 위해 내달리는 운동감의 반복과 변주를 통해 극대화한다. 때문에 많은 관객들이 <리코리쉬 피자>가 미국의 70년대를 배경으로 하면서 무언가 말하려는 듯 하면서도 하지 않는 태도와 온전히 현실적이고 변덕스러운 사랑의 주도권 싸움에 몰두하는 이 영화를 사랑스럽고 훌륭하지만 가볍다고 말한다. 하지만 <리코리쉬 피자>는 가볍지만 가볍기 때문에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을 가장 투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리코리쉬 피자>는, PTA의 필모에서 예외적인 걸작인 <인히어런트 바이스>를 제외하면, PTA의 최고작이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정우성
2021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현재 예술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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