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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수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의 죽음에 저항하는 레트로, 혹은 유아기적 퇴행
[김경수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의 죽음에 저항하는 레트로, 혹은 유아기적 퇴행
  • 김경수(영화평론가)
  • 승인 2023.04.03 1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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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치 디스패치>(2021), 웨스 앤더슨
출처-네이버 영화
출처-네이버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2021)>가 웨스 앤더슨 미학의 정수라는 데에 이견을 제하기는 힘들 것이다. 강박적이라 할 수 있는 비율과 색감, 동화적인 서사, 과거의 예술에 대한 동경과 헌사는 이 작품에서도 드러나며 그 전작들보다 훨씬 아름답다. 또한 전작과 마찬가지로 트래킹과 회화를 그리듯 깊은 심도를 쓰는 촬영도 더욱 두드러진다. 그의 연출은 영화에 화면 바깥의 현실이 끼어들 여지를 차단한다. 인물 뒤편의 불균질한 풍경을 제거해 연극적 공간을 만들고, 인물들이 연극을 찍듯 한 장면 안에서만 움직이게 한다. (이 스타일의 기원으로 가까이는 자크 드미, 멀리서는 루이 푀이야드의 <뱀파이어>를 지목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가 재현하려는 대상이다. 그의 영화는 노골적인 노스탤지어를 드러낸다. 이 시기들은 대체로 69년생인 그가 살아보지 않은 시대다. 벨 에포크(<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구로사와 아키라와 애니메이션이 탄생한 1960년대 일본(<개들의 섬>)이 그 예다. 관객은 미장센으로 그가 그려내는 시대를 유추할 수는 있으나 영화 속 시대를 그 시대라 지칭할 수 없다. 스크린 너머를 평행 우주로 설정해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살아보지도 않은 시대를 찬사하면서도 그 시대에 왜 그 예술이 탄생했는가?라는 질문은 외면한다. 사회적/경제적 맥락들을 배제하고 그때 사람들이 살아야 하는 환경을 마주하려 하지 않는다. 웨스 앤더슨의 탐미주의에는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 들어설 곳이 없다. 배우가 연기를 한다지만 캐릭터들은 죄다 생기가 없고 뻣뻣하게 움직여 현실 속 인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인간은 예술의 불멸성을 드러내는 장치이자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의 탐미주의와 노스탤지어가 폭력적이라 생각하지만 고급 예술이 사라져 간다는 그의 문제의식은 눈여겨볼 만하다. 그의 걸작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엔딩에서 그런 문제의식이 선명히 드러난다. 포탄으로 인해 흔들리는 호텔은 세계 1차 대전이 오고 있고, 자신이 구축한 미학적인 세계관, 혹은 예술 전체가 무너지리라는 불안이 담겨 있다. 그는 노스탤지어로 되돌아가 고전이 사라져 간다는 구조신호를 관객들에게 계속 보낸다. 이때 웨스 앤더슨의 노스탤지어는 고급예술 전체를 대표하는 환유로 작동한다. 이 노스탤지어는 2010년대 들어서 영화계의 화두로 떠올랐다. 탐사 저널리즘을 복원하려고 한다는 <프렌치 디스패치(2021)>의 설정을 보았을 때 나는 앤더슨의 세계관이 한층 확장되리라 생각했다. 가짜뉴스와 탈-진실, 시네마가 사라지는 시기에 웨스 앤더슨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다. 2010년대 말에 쏟아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아이리시맨> 등 여러 거장의 작품에는 할리우드의 시네마가 사라져 가고 있다는 회고가 담기기 시작했고, 웨스 앤더슨도 그 연장선상에서 회고로 지금 시대에 영화란 무엇인가를 답하려 했을 거라는 예상을 조심스레 했다. <프렌치 디스패치>를 보고 난 뒤 실망했다. 기대를 벗어나서가 아니라 이 영화가 예상보다도 더 기만적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뛰어난 형식에 가장 저열한 내용을 담은 이 작품은 누군가에게는 웨스 앤더슨의 최고작일 수 있으나, 누군가에게는 최악의 작품일 수 있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애니메이션를 비롯하여 여러 시대와 장르를 오간다는 점에서 그의 미학적 세계의 총정리이자 완성이지만, 그의 저열한 태도를 총정리한 작품이기도 하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뉴요커>를 오마주했다. 옴니버스 형식을 취한 이 영화는 단지 "잡지에 실려 있다"는 이유로 무관한 네 개의 이야기를 연결한다. 프롤로그인 1부는 가상의 프랑스 도시 블라제를 오가는 기자의 이야기, 2부는 광인 예술가와 그의 뮤즈 간수의 이야기, 3부는 혁명가들의 이야기, 4부는 경찰 쉐프의 이야기다. 이 넷은 이어져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웨스 앤더슨이 이러한 플롯 구조를 선택해 복원하려는 것은 제법 뚜렷하다. 잡지는 요리와 정치 등 서로 무관한 주제를 지닌 이야기들이 한 데 모인 것이다. 원래는 동떨어져 있어야 할 무관한 이야기들이 잡지라는 매체 아래서 저마다 균등한 입지를 지니며 존중받는 것이다. 모든 필진에게 특급 대우를 하는 편집장(빌 머레이)의 태도는 그 어떤 이야기도 외면되어야 하지 않아야 한다는 웨스 앤더슨의 소망을 반영한 듯한 캐릭터로 보인다. 또한 이 생태계에 광고의 개입을 최소화하려 한다는 점, 그 모든 이야기가 실리게끔 한다는 점은 예술이 저마다 존중받아야만 한다는 그의 태도를 돋보이게 한다. "이야기의 시대가 끝났다"라는 영화의 추도사는 이야기가 존중받는 세계가 사라져 간다는 것에 대한 애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설정을 보고는 웨스 앤더슨이 이전과는 다른 영화를 찍으리라 기대했다. 거대자본의 개입으로 간접광고로 전락한 영화들, 상품으로만 존재하는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아닌 여러 개성을 지닌 이야기들이 공존하는 잡지야말로 그가 꿈꾸는 영화 생태계가 아닐까. 잡지의 복원을 넘어서 웨스 앤더슨은 영화 생태계를 복원하려 한다. (한국에서는 2000년대 초반의 영화 시장이 그러했다. 저급한 코미디인 <달마야 서울 가자>와 메시지가 짙은 <살인의 추억>이 공존할 수 있던 시기가 있었고 이 시기에는 천만 영화라는 생태계 교란종이 드물었다.) 프렌치 디스패치의 운영 구조가 드러난 뒤 급작스레 편집장이 죽는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편집장이 죽은 뒤 발간하는 마지막 폐간호에 실린 이야기들을 영상으로 풀어낸 것이다. 네 이야기들은 웨스 앤더슨이 그간 만든 이야기들을 단편 영화로 만든 것으로도 보이지만 웨스 앤더슨이 복원하기를 바라는 이야기들의 종류이기도 하다. 영화는 느릿한 리듬으로 프롤로그를 연다. 자전거를 탄 오웬 윌슨이 "창부와 창녀가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사라졌다"라고 선언한다. 이는 영화의 생태계에 대한 앤더슨 나름의 진단으로 보인다. 노스탤지어를 꿈꾸면서도 미래의 영화를 걱정하는 웨스 앤더슨은 어떠한 이야기를 되살려낼까 하는 기대감이 생겼지만, 야심만만한 진단과는 달리 영화는 더 나은 대안을 드러내지 않는다.      

사이먼 레이놀즈는 <레트로마니아>에서 레트로의 두 방식을 이야기한다. 레트로 열풍의 이면에는 돌아가야만 하는 과거가 있다. 그는 과거의 보수적 체제를 그리워하면서 현재를 과거로 되돌리려는 행동은 반동적인 노스탤지어로, 현재를 부정하면서 체제를 개혁하려는 행동은 급진적인 노스탤지어로 분류한다. 안타깝게도 앤더슨의 이 영화는 전자에 속한다. 과거로 기어이 들어가 과거의 공과 실을 인지하기보다는 과거의 스타일만을 취해, 그 세계로 되돌아가려 한다. 2부가 이를 선명히 드러낸다. 2부의 첫 장면, 레아 세이두가 헤어누드를 하고 카메라 앞에 아름답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녀는 동상처럼 아름답게 여러 포즈를 내비친다. 그 앞에 서 있던 광인 예술가는 그림을 그리다가 곧장 그녀 앞으로 가서 포즈를 고친다. 예술가는 포즈를 고치던 중 붓칠로 그녀의 성기 위쪽에 붓으로 점을 찍어서 그림의 비율을 재조정한다. 카메라는 이때 그녀를 동상이라도 되는 듯이 정중앙에 두고 포착하려고 한다. 이 순간 레아 세이두의 표정은 굳어져 있고, 광인 예술가를 밀치는 피상적인 포즈만을 취한다. 뮤즈가 되는 역할을 마친 뒤 레아 세이두는 간수로 되돌아간다. 이는 여성을 뮤즈로 대상화해서 그녀를 예술작품으로 승화하는 18-19세기의 낭만주의 예술가상을 그대로 복원한다. 또한 이 예술가는 광기에 취해 범인이 이해할 수 없는 예술을 재현해 온갖 기행을 일삼더라도 면책권을 얻는다. 이때 웨스 앤더슨이 찍는 레아 세이두는 무표정하다. 광인 예술가와 섹스하지만 끝내 애인은 되지 않는다. 스스로 추상 예술의 제물로 기어이 희생되는 여성상은 앞서 이야기한 예술을 위해 인간을 도구로 삼기를 주저하지 않는 감독의 탐미주의의 산물이다. 캐릭터의 생생함이 사라지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광인 예술가가 레아 세이두라는 실체를 벽화인 추상으로 재현하면서 교묘하게 성적 대상화의 문제를 피하려 애쓴다. 이러한 문제를 회피하는 알리바이로 나온 캐릭터가 <프렌치 디스패치>의 미술 평론가이다. 틸다 스윈튼이 배역을 맡은 베렌슨은 <뉴요커>의 기자이기도 한 미술 비평가 수전 손택을 연상하게 만든다. 50대 중반에다가 단호한 어투, "예술에 대한 해석은 강간"이며, 예술을 형식미가 아니라 그것의 인위성과 과장된 스타일을 중심으로 판단하기를 요구하는 캠프적 감수성을 주장한 손택의 예술관과 닮은 애티튜드가 그러하다. 손택은 아니지만, 그녀를 연상하게끔 만드는 캐릭터를 끌고 와 대상화마저도 작품의 한 부분으로 설명한다. 감독은 남성들에게는 예술을 쥐고 흔들 수 있는 권한을 주지만, 여성에게는 대상이 될 권한만 준다. 레아 세이두는 일본 애니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처럼 남성의 미적인 대상이 되기 위해서만 움직이며, 인간은 유한하고 (사건이기도 한) 미술은 영원하다는 이야기 아래에서 여성은 인형처럼 박제된다. 에피소드의 끝에서는 예술을 감옥의 벽화로 새겨낸다. 작가는 예술을 누군가의 소유가 될 수 없는 하나의 스캔들로 만들지만 이마저도 누군가에게는 소유물이 될 수 있다는 절망적인 비전으로 다다른다. 이 비관 아래에서 스크린 너머의 여성은 은폐당한 채로 박제되어 있다.  또한 감독은 감옥을 걷는 풍경마저도 미술관에서 관람객이 걷는 속도에 발을 맞춘 트래킹숏으로 찍는다. 감옥을 걷는 체험을 미술관을 걷는 체험으로 뒤바꾸는 착시효과를 만든다. 그 어떤 공간에도 아름다움을 부여할 수 있는  웨스 앤더슨의 미술은 폭력으로 가득한 현실을 애써 외면한다.     

그는 더 나아가서 68혁명을 저만의 방식으로 전유한다. 3부는 <몽상가들>을 만화화한 단편 영화에 가깝다. 68혁명 급진파에 속한 상황주의자를 연상하게끔 만드는 급진주의자와 학생 운동의 리더가 대립한다. 선언문을 쓰는 리더를 그리려 감독은 혁명을 체스로 대체한다. 반면 급진주의자는 패션 아이템인 헬멧을 쓰고, 안나 카리나와 똑같은 스타일로 화장한 힙스터로 그려진다. 문제는 이 전유가 상황주의자들이 경멸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상황주의자는 이미지의 생산을 거부했다. 거리에 문구를 써두는 방식으로 권위에 대항하는 자들이었다. 어쩌면 가장 영화적으로 재현된 급진주의자는 그들이 가장 경멸하는 방식으로 그려진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일본 애니의 츤데레 캐릭터처럼  학생 운동의 리더에게 툴툴대기만 할 뿐 그 혁명의 당위성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저 추상적으로 혁명만 하고 있을 뿐이다. 감독은 역사를 이끈 혁명가들을 세상에 투덜대는 애송이로 그려낸다. <몽상가들>의 베르톨루치가 68혁명 세대를 냉소하지만, 그들의 세계를 멀찍이서 지켜본다. 반면 웨스 앤더슨은 68혁명 혁명가들을 로맨틱 코미디 주인공으로 소비해 그들이 경찰과 대척해야 했던 모든 이유를 배제한다. 감독이 환상으로 만든 노스탤지어에서 그들은 그들과 정반대로 그려진다. 감독은 그들이 단지 서로를 사랑하지 않을 뿐이라 이야기하며 진보의 가치를 부정한다. 

 

출처-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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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는 3부는 물론, 이야기 전체에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잡지가 개연성이 없는 이야기가 하나로 이어져 있듯, 감독이 추억하는 탐사 저널리즘은 매 순간 갱신되는 것이기에 개연성이 없는 사건들이 하나로 이어져서 그 자체로 흥미진진한 이야기이다. <돈키호테> 등 중세-근세의 과도기에 등장한 소설들이 입담과 과장으로 독자를 압도했듯, 웨스 앤더슨은 쉐프이자 경찰이기도 한 캐릭터의 모험담으로 비슷한 효과를 노린다. 애니메이션과 뒤섞이면서 이 이야기는 동화나 모험담으로 느껴진다. 흥미진진하게 그려져야 할 이야기는 심각하게 느릿했고, 개연성과 주제가 없는 서사일지라도 재미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태도에 부응하지 않은 듯 보였다. 이 에피소드의 실패는 이 영화의 게으름을 설명한다. 2부와 3부에서처럼 정치적, 윤리적 맥락을 외면하고 이야기가 재미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식의 태도는 "이야기가 죽은 시대"를 넘어 보겠다는 1부의 야심에 부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시대에 필요한 재밌는 이야기들을 외면한 채로 노스탤지어에 갇혀서 그것을 갱신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이야기가 끝났다"라는 선언 뒤에 이 이야기가 끝난 것이 왜 지금 문제인가를 어떠한 방식으로도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는 세계 1차 대전이 다가오고 있단 사실을 암시하지만, 이 이야기는 끝내 무엇도 암시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끝났으며, 그 무엇도 뒤에 따라오지 않으리라는 예상은 이야기를 지켜내야 할 합당한 이유를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감독이 지독한 염세주의에 빠졌다는 것만을 드러내며 자살하는 것일 뿐이다. 빌 머레이의 죽음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이 영화는 한 마디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지금처럼 (감독의 생각일 테지만) 검열 기제가 존재하지 않는, 과거로 돌아가려고만 할 뿐, 어떤 더 나은 미래를 드러내지 못하는 이 작품은 반동적이고 시대착오적이다. 그가 6월에는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애스터로이드 시티>로 되돌아온다고 한다. 그의 신작은 과연 같은 이야기를 반복할까? 영화의 죽음이 생긴 원인을 PC와 디즈니로 대표되는 거대산업으로만 지목하는 그의 선택은 어딘가 좀스럽다. 그가 더 나은 선택지를 제시하기를 바란다.

 

 

글·김경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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