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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인간은 과연 운동장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슬픔의 삼각형>
[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인간은 과연 운동장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슬픔의 삼각형>
  • 김현승(영화평론가)
  • 승인 2023.05.08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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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삼각형> 메인 포스터

노골적으로 계급을 전복하려는 시도가 반복된다. 프롤로그 시퀀스는 남성 모델 산업에 주목한다. 남성 모델은 수입이 여성 모델의 3분의 1에 불과하며, 게이들의 끝없는 성적 희롱을 견뎌야 한다. 이때 제목의 뜻이 직접 언급된다. ‘슬픔의 삼각형’은 면접을 보러 온 남성 모델의 미간 주름을 뜻한다. 심사위원은 모델에게 미간의 주름을 펴라고 조언하고, 더 헤프게 보이도록 입을 벌릴 것을 요구한다. 지금껏 여성이 겪어온 불합리한 대우가 남성에게 적용되는 사례이다. 이후 언급되는 보톡스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드러낸다. 물질이 우선시되는 사회에서 삶의 모든 요소, 심지어 외모마저 경쟁력으로 여겨진다. 자본의 간택을 받기 위해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신체를 조작한다.

프롤로그에서 발화된 젠더 계급 전복은 첫 번째 챕터 [칼과 야야]에서 본격화된다. 여성 모델 야야(샬비 딘)는 남자친구 칼(해리스 디킨슨)보다 수입이 많다. 그럼에도 데이트 비용은 성적 고정관념에 의해 주로 칼이 지불한다. 돈을 언급하는 남성은 여성에게 “섹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적 지위가 낮은 남성 캐릭터는 경제 계급과 젠더 계급 간의 갈등을 가시화한다. 영화는 두 계급 구조 중 전자의 손을 들어준다. 두 번째 챕터 [요트]에서 알 수 있듯이 자본이 언제나 최고 심급의 위치를 차지한다. 고급 크루즈의 직원들이 탑승자에게 하이엔드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유는 오직 그것이 수익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칼'이 인플루언서 여자친구 '야야'의 사진을 찍고 있다.

자본의 정점에 위치하는 초호화 크루즈는 철저하게 돈의 논리에 의해 작동한다. 이때 반복되는 키워드는 ‘똥’이다. 비료 사업을 하는 러시아 자본가는 ‘똥의 왕’으로 명명된다. 부유층은 대중에게 똥을 팔고, 법을 악용해 탈세라는 ‘bull shit’을 저지른다. 흥미로운 점은 그들이 똥을 파는 방식이다. 수류탄과 지뢰를 판매하는 사업가는 자신이 세계의 자본주의를 지키고 있다며 ‘사랑’을 위해 건배한다. 이와 같은 정의 마케팅은 1장에서도 묘사된 바 있다. 거대 패션 산업은 “만인은 평등하다.”는 캐치프레이즈를 전면에 내세운다. 구역질 나는 위선에 영화는 강렬한 이미지로 답변한다. 크루즈가 휘청이며 변기가 역류하고 고상한 척하던 상류사회 구성원들은 연신 토악질을 해댄다. 이 모든 난장의 뒤처리를 도맡는 사람들이 부르주아도 공산주의 이상 사회를 쫓는 이들도 아닌, 작업복을 입은 실제 노동자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슬픔의 삼각형>이 일부 평단에게 신선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은 이유는 영화에 인용된 맑스의 말처럼 “인간의 어떠한 면도 내게는 새롭지 않기” 때문이다. 구토를 유발하는 위선과 숨죽인 채 살아가는 노동자를 전면에 내세우는 계급 우화는 2023년에 새로운 소재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똥’ 같은 현실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면, 과연 소재가 구닥다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단적인 예로 영화에서 방산업자에게 수류탄이 어디에 터지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매번의 폭발이 그에게 수많은 돈을 안겨준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2005년 금선희의 다큐멘터리 <타국의 하늘>은 일본에서 조선인이 만든 총알이 6.25 전쟁에서 조선인을 죽이는 데 사용되는 모순을 고발했다. 70여 년이 지난 뒤에도 바뀐 것은 없다. <슬픔의 삼각형>은 전혀 발전하지 않은 자본의 똥통에서 방산업자들에게 수류탄을 터트리며 국면을 전환한다.

 

▶패션 산업의 캐치프레이즈, "만인은 평등하다."

연신 흔들리던 2장의 카메라와 달리 3장 [섬]의 카메라는 평온하다. 그러나 계급이 사라지고 만인이 평등한 섬의 이상 사회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알튀세르가 이야기했듯 이데올로기는 공백을 좋아하지 않는다. 애비게일(돌리 데 레온)을 중심으로 한 원시 모계 이데올로기는 또 다른 서열을 낳는다. 이 전환이 흥미로운 이유는 기존 문명사회와 완전히 반대되는 사회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모계사회이며 철저히 능력 중심적이다. 무엇보다 동양인, 흑인, 백인 순의 지위가 형성된다. 새로이 형성된 사회는 언뜻 노동의 가치가 인정받는 공산주의 낙원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대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것처럼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이상은 공허한 울림에 불과하다. 새로운 구조의 모순을 상징하는 오브제는 사회의 지도자 애비게일이 잠드는 구조정이다. 카메라는 백인 남성에 대한 성착취가 이루어지는 이곳을 불안정하게 포착한다. 애비게일은 백인 남성에게 “강요하지 않겠다, 스스로 결정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이클 센델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밝혔듯이, “돈(권력)이 없는 사람이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부유층과 다른 결정을 강요받는다면 그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누구에게나 가능했던 것일까?

영화의 포스터에 나타나는 삼각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포스터에서 선장, 부유층, 인플루언서는 삼각형의 구조를 이룬다. 이 계급 구조의 최하단에서 궂은 일을 도맡아하는 블루(영화에서는 블랙) 칼라 노동자들은 모습조차 드러나지 않는다. <슬픔의 삼각형>은 비가시화된 이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슬픔의 삼각형을 뒤집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젠더, 자본, 인종 등을 뒤집어도 계급 자체는 놀랍도록 원형을 유지한다. 동양인, 흑인, 백인의 순서가 뒤바뀌었을 뿐 계급 착취와 폭력은 반복된다. 그런데 똥으로 묘사되던 기존 세계의 질서가 구역질을 일으켰다면, 관객은 하층 계급의 성을 착취하는 동양인 여성에게서도 마찬가지의 구역질을 느껴야 한다. 하지만 전복의 짜릿함에 취해, 또 대부분은 그녀와 같은 고충을 겪었기 때문에 권력형 성매매는 웃음거리로 소비된다.

 

▶계급에서 벗어난 듯이 보이는 무인도 사회

기존 자본 세계를 환유하는 리조트가 등장하며 영화가 결말을 향한다. 리조트의 등장은 대안 체제가 순식간에 무너져내리고 기존 체제로의 복귀가 임박했음을 나타낸다. 야야는 곧바로 애비게일에게 “도와주고 싶으니 내 비서가 되라.”고 말하며 자신의 계급적 지위를 되찾는다. 분노한 에비게일이 백인 여성에게 살의를 드러낼 때야 비로소 스크린에 긴장감이 드리워진다. 카메라는 돌을 든 동양인의 모습과 사냥감을 노리는 그녀의 시선을 교차한다. 짧은 거리를 길게 늘여 긴장감을 극대화한 이 장면은 히치콕의 <싸이코>와 같은 영리한 전략을 취하고 있다. 자신이 처한 위험을 알지 못하는 야야가 에비게일을 나지막이 부른다. <싸이코>에서 노먼 베이츠가 시신을 늪에 유기할 때처럼 카메라는 관객에게 살인자와의 동일시를 일으킨다. 여자친구가 위험에 처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칼이 그녀를 찾아 나서며 영화가 막을 내린다. 질주하는 주인공을 바라보며 관객은 야야의 생존을 걱정한다. 그러나 폭력은 삼각형 안에 늘 도사리고 있다. 인간은 과연 운동장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글·김현승
영화평론가. 2022 영평상 신인평론상으로 등단하였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예술전문사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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