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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빛과 어둠 사이에서 <카일리 블루스>
[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빛과 어둠 사이에서 <카일리 블루스>
  • 정우성(영화평론가)
  • 승인 2023.07.10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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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네이버 영화
출처: 네이버 영화

오프닝 크레딧이 떠오르기 전, 천성은 터널 안쪽의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온다. 바로 직전 쇼트가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라 적힌 금강경 구절을 보여주는 암지였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천성은 죽음과 같이 시간이 무(無)화한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것만 같다. 그리고 영화가 30분쯤 진행되었을 때 천성은 다시 터널 안쪽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사라지고 카메라는 천천히 터널 오른편의 어둠으로 패닝하여 오프닝 타이틀을 띄운다. <카일리 블루스>는 오프닝 크레딧과 오프닝 타이틀을 의도적으로 다르게 설정하면서 오프닝 크레딧, 타이틀 이전 이후의 장면들을 터널을 지나는 행위를 배치하여 나눠놓았다. 이는 엔딩 크레딧이 떠오르기 전에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떠나는 천성이 터널을 통과하는 이미지로 반복된다. 때문에 영화는 천성이 오토바이와 트럭, 배, 기차라는 운송수단으로 어디론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결국 제자리인 어둠 속으로 돌아오는 반복의 여정처럼 느껴진다. 

정전으로 점멸하는 전구처럼 빛과 어둠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고 어디론가 밀려가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천성의 모습처럼, 영화 속 시제가 선명하게 구분되지 않는 듯 보이는 <카일리 블루스>이지만 천성이 웨이웨이를 찾으러 전위안으로 떠나기 전까지의 장면들에서는 시제를 구분 짓기 위해 쇼트를 나누거나, 나뉜 쇼트 간의 시각적 이미지의 차이를 두어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예컨대 오프닝 타이틀 이전에 문화대혁명으로 헤어진 동료 의사의 애인에 대한 기억을 들을 때에 침입하듯 끼어드는 자줏빛 조명의 비현실적인 쇼트는, 이야기의 발화자인 동료 의사의 기억인지, 천성의 기억인지 아니면 그 무엇과도 상관없는 하나의 이미지 컷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 현재 시제의 쇼트들과 구분을 짓는 방식으로 시각화되어있다. 이는 이후에 죽은 조카의 손목을 자른 자들을 만나러 가는 과거 시제의 장면을 약간 붉은 빛의 이미지로 묘사한 것으로도 나타난다.

 

출처:네이버 영화
출처: 네이버 영화

그렇다면 이러한 형식과 대비되는, 광각 렌즈를 활용한 넓은 화면 사이즈로 진행되며, 쇼트를 나누지 않고 30분이 넘는 지속시간의 롱테이크로 담은, 전위안으로 향하는 과정의 긴 쇼트를 보자. 전반부보다 사실적이고 현재의 선형적 시간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멈추지 않을 듯 이어지던 쇼트가 천성이 “꿈속에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 순간 끝이 나면서, 다시 이전 쇼트를 복기해보면 시제가 불분명하게 혼재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천성을 오토바이에 태워 전위안으로 운송하는 남성의 이름이 이 여정의 목적인 조카의 이름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섞이는 것을 넘어 사실적으로 보이던 쇼트의 현실성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과도하게 많은 대사를 쏟아내는 전반부의 정보들을 유심히 보고 들었다면, 그 정보들이 30분이 넘는 긴 쇼트의 모험 안에서, 조카의 이름과 같이,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전위안으로 향하는 다른 이유인 동료 의사의 부탁을 떠올려보자. 그녀는 테이프와 셔츠를 연인이었던 남성에게 전달해주길 바랐지만, 천성은 자신이 마치 그 남성이 된 것처럼 셔츠를 입고, 연인이 동료 의사에게 건넸던 과거를 반복하듯 미용사에게 테이프를 전달한다. 이는 미용사가 천성의 머리를 감겨주고 난 뒤 조명이 깜빡이는 효과가 나타날 때 자연스럽게 오프닝 장면을 떠올리게 되는 것과 같다. 또한, 천성이 감옥에 있을 때 노래를 배워 연인에게 들려주려 했지만, 연인은 이미 사망하여 들려주지 못했다고 회상하는 것은 미용사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것으로 대구를 이룬다. 그리고 동료 의사가 연인과의 추억을 회상하며 말했던 손전등을 비추는 행위는 천성과 미용사 사이에서 반복된다.

 

출처: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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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전반부와 30분이 넘는 하나의 쇼트 사이의 변주와 대구, 반복의 요소는 이외에도 범람하듯 넘쳐흐른다. 하지만 이렇게 과도한 반복과 변주의 요소들은 영화를 한 번 감상하며 파악하기란 쉽지 않으며 파악한다고 하더라도 직관적으로 이해되어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는 극히 제한적이다. 대신 이렇게 반복되는 것이 만드는 인물 관계의 구도만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천성에게 어머니의 죽음과 아내의 죽음 그리고 테이프를 주었던 미용사와의 작별이 있고, 동료 의사에게는 그녀의 연인과 아들의 죽음, 청년 웨이웨이에게는 양양과의 헤어짐이 있다. 이 각각의 인물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떠나보내거나, 만나지 못하는 거나, 만나지 못하게 될 관계의 구도로 묶여 뒤섞인다. 때문에 당마이를 통과하는 긴 롱테이크 장면에서 천성과 그의 연인, 동료 의사와 그녀의 연인 사이의 관계는 거울처럼 반전된 정체성의 상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청년 웨이웨이가 조카의 미래처럼 보이는가 하면, 웨이웨이는 천성의 다른 정체성 혹은 과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출처: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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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영화 속 인물들은 천성이라는 인물의 마음에서 분화한 여러 정체성처럼 보인다. 웨이웨이를 찾겠다는 목표는 과거의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 되고 전달하지 못한 동료 의사의 마음을 전하려던 행위 또한 자신이 더는 만나지 못하는 연인에게 건네는 사랑의 마음이 된다. 천성은 이 꿈과 같은 시간 안에서 상실의 아픔을 위무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원형을 그리며 움직이는 패닝 쇼트와 같이, 결국 사랑하는 이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마음에는 다른 구멍이 들어선다. 때문에, 영화의 끝에서 천성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원형의 시간 안에 갇힌 듯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지 못하고 텅 빈 기차 객실 안에서 홀로 영원히 잠들어 있다.

<카일리 블루스>는 이러한 ‘과거의 마음도, 현재의 마음도,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는’ 상실과 회복 사이에 놓인 영원한 꿈의 비현실적 감각과 감정을, 쇼트를 나누지 않고, 끊임없이 카메라가 움직이며, 흐린 날씨의 평면적인 자연광 아래, 광각 렌즈를 활용한 넓은 화면 사이즈의 사실적인 이미지의 형식으로 이루어낸다. 표면적으로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우며, 과거와 현재가 혼란스럽게 접합되어 꿈과 같이 느껴지지만, 실은 꿈과 현실을 쇼트로 정확히 분절시키고 시각화로 명확히 구분하고 있는 전반부와 겉으로 보기에 사실적이고 선형적인 시간 안에 있지만, 그 이면에는 꿈의 구조를 비가시화하고 있는 후반부의 대비, 전환감, 전략 배치가 만들어낸 영리한 성취이다.

 


글·정우성
2021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현재 예술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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