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복합 문화 공간 '도운'(DOWOON)
국내 와인 시장은 대중화를 넘어 성숙기에 접어들고 있다. 동네 편의점 및 일반 마트에서도 수십 종의 와인을 비치하고 있다. 어쩌다 즐기는 기호 식품이 아닌 게 되어버렸다. MZ세대뿐 아니라 중장년층에 이르기까지 와인은 의사소통의 주요 매개가 되었으며 관련 음식 또한 새롭게 소개되고 있다.
서울 강북 도심 빌딩들은 리모델링을 하면서 뷰가 중요해졌다. 계단실과 엘리베이터를 옮기면서 기존의 엘리베이터 피트는 메꾸지 않고 지하 와인 셀라로 변용하는 경우가 있다. 더러 30대의 전문직 부부가 건물을 지을 경우, 서울의 부심에 부지를 마련해 협소주택을 지으면서도 1층 주방에 퇴근 후 들르는 와인바를 마련해줄 것을 건축가에게 요구한다. 요리하는 기능이 축소되고 음식을 즐기는데 적합한 큰 식탁이 놓인 카페같은 공간이 생긴다.
상업용 빌딩에서도 실용적 목적으로 와인 셀라를 마련하고 있는데, 이전 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하는 신세대의 출현으로 프라이빗 와인바가 건축 설계의 주요 요소가 되었다.
대표적인 와인 수입사로 자리잡은 나라셀라(1997년 설립)는 수년 전부터 시장의 다변화·고급화 추세를 추동화시킬 플랫폼을 ‘와인 복합 문화 공간’으로 설정하였다.
건축사사무소 에스티피엠제이(stpmj)의 임미정, 이승택 건축가가 설계하고 명명한 ‘와이너리 신사’, 도운빌딩(2022년 12월 준공)은 서울 강남 안세병원 사거리 인근 신사동에 위치한다. 건물 이름 ‘도운’은 포도 도(萄)와 운과 정취를 뜻하는 운(韻)에서 따왔다. 포도 향이 퍼지는 건물이란 의미이다.
임미정, 이승택은 공동 설계 체제를 지향한다. 설계 과정에서 일어나는 많은 변화 무쌍한 변수들이 수용가능해진다.
모노톤의 벽돌은 와인 셀라의 컨셉을 표현
설계 기간 중 서울의 도심인 도운빌딩 주변은 나라셀라 창업 시기인 1990년대 후반 저성장기에 1차 개발에 이어 2차 개발이 진행되고 있었다. 건물은 초현대식 오피스 빌딩이 군웅할거하는 지역에서 나 좀 봐달라고 외치지는 않지만 뉴트렌드의 와인 기업으로 성장한 나라셀라의 정체성은 확실하게 포지셔닝해야했다.
건축가들에게 용적률이 특별한 변수는 아니나 각종 규제를 피해 최대한의 공간을 확보하는 건 늘 어려운 일이다. 특히 서울 강남의 대지는 최대 건축 면적을 얻기 위한 설계가 최우선적으로 고려된다. 건축가들의 마지막 승부처인 외관은 와인 전문 기업 이미지가 표출되어야 했기에 부동산 가치만을 따질 수도 없었다.
모노톤의 벽돌은 형태적으로나 이미지 측면에서 와인을 숙성시키며 저장하는 와이너리의 컨셉을 유지했다. 와이너리를 연상하는 전면으로 튀어나온 둥그스름한 형태의 챔버 공간은 깊은 음영 뒤의 창 유리를 통해 빛의 조절이 일어난다. 좁지만 쾌적한 열린 공간이어야 했고 거친 면과 매끈한 면의 대조는 질감의 차이를 드러내는 회화 작품과도 같아 난이도 높은 시공을 요구하였다. 건축 재료의 물성을 잘 이용한 건물 외피는 시간이 지나도 초창기에 지은 듯한 품질을 유지한다.
나라셀라는 와인 중심으로 사업 스펙트럼의 확장 가능성이 전제되어야 했다. 대중들은 여전히 제대로 된 와인 문화를 체감할 기회가 많지 않다. 또한 음악과 그림을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지향한다. 유명 와이너리의 와인 라벨 작업에는 미술사에 등장하는 예술가들이 참여하는 등 와인은 다양한 문화컨텐츠와 접목되고 있다.
설계 종료 직전까지도 건축주인 회사는 건물의 소프트웨어에 대한 방향을 고민하고 있었다. 건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제한된 대지와 공간 안에서 프로그램의 변경 가능성도 고려해야만 했다. 건물 전체적으로 와인을 즐길 수 있는 기능을 갖춘 곳이 있어야 한다는 데는 건축주와 건축가들의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에드워드 호퍼의 ‘비스트로 또는 와인숍’을 생각하며
무엇보다 건물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로비층이 무엇을 담아내고 고객에게 무엇을 제공해야 하는지가 중요했다.
‘와이너리 신사’는 총 9개 층(지하 2층, 지상 7층)으로 완공됐다. 1층은 로비 겸 카페로, 정면(남쪽)으로 창이 없는 2층은 와인 전시관 및 세미나, 클래스를 이용하는 장소로 조성되었다.
가로에 면한 1층 전면부는, 측면에서 보면 과할 정도의 필로티(pilotis, 벽이 없는 주열(柱列)) 공간을 점유, 자칫 건축물의 전체 비례를 무너뜨릴 정도의 경계에 있다.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년)의 프랑스 파리 여행의 기억을 토대로 한 작품 ‘비스트로 또는 와인숍’(Le Bistro or The Wine Shop, 1909)은 빛과 그림자, 색채가 이루는 균형과 대비가 두드러진다. 인물과 건축보다 우측에 과감히 드러낸 해변이 배경인 텅 빈 공간이 돋보인다. 건축가는 도심 건축에 이러한 텅 빈 공간감이 필요하다고 본듯하다.
1층 정문에 들어서면서 로비 너머 후정(後庭)이 들어오도록 시야를 확보했으며 후정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시공 중에 설계를 바꾸어야 했다. 건축이 요구하는 프로그램에 따라 내외부의 건축 시퀀스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처음부터 확실하게 프로그램이 확정된 곳은 지하 1~2층이 유일했다. 지하 2층 와인 스토리지는 레드 와인(13~16℃)과 화이트 와인(7~10℃)을 보관하기 적합한 온도를 유지하는 공간이다. 한켠에는 은행 대여 금고에 해당하는 와인 스토리지도 조성됐다. 6층엔 파티나 세미나 등을 할 수 있는 오픈 키친이 들어선다. 대관도 가능하다. 7층은 남산타워와 한강 뷰를 감상하면서 와인과 위스키를 즐길 수 있는 바 ‘Night Cap’이 들어선다.
글 · 심정택
건축 칼럼니스트. 홍보대행사와 갤러리를 운영했고, 50여 회의 초대전, 국내외 40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한 15년 차 미술 현장전문가이다. 매일경제에 3년 6개월간 필명 ‘효효’로 160여 회의 건축 관련 글을 연재하였다.
사진 · 나라셀라 제공
밤샘 작업 후 와인 한 모금에 온몸이 짜릿 글·성일권
“와인 제조과정이나 건축의 과정이 넘어가는 단계마다 섬세하고 전환적이어서 닮은 꼴이 많습니다. 포도송이가 오크통 숙성 등 수차례의 단계를 거쳐 제 손의 와인잔에서 맑고 붉은 루비 빛을 발하는 것처럼, 제가 밤새 그린 설계도면도 철골과 시멘트, 벽돌의 축조 단계와 인테리어를 걸쳐 지금의 멋진 공간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지난해 완공된 나라셀라 도운빌딩의 설계자인 임미정 교수(홍익대 건축학과)는 자신의 작업실에 놓인 도운빌딩 모형도를 들여다보며 와인잔의 붉은 피노 누아를 한 모금 마셨다(건축가의 작업실은 천호동의 낡은 단독주택을 개조했다). * * * 건축가님의 작업 공간이 대단히 내추럴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천장과 벽, 바닥이 철골구조와 시멘트를 그대로 드러낸 게 건축의 구조와 해체, 재구조를 생각하는 건축가의 고민 같 은 걸 보여주는 듯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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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기사는 와인 매거진 <NARA> 5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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