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김정희의 문화톡톡] K-수능, 미래를 꿈꾸게 할 수 있는가 2
[김정희의 문화톡톡] K-수능, 미래를 꿈꾸게 할 수 있는가 2
  • 김정희(문화평론가)
  • 승인 2023.07.31 11: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부하라! 공부만 하라!

지금 기록으로 남아있는 일기나 편지를 통해 조선시대의 글공부와 과거시험준비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데 묵재 이문건(1494~1567)의 <묵재일기>와 퇴계 이황(1501~1570), 다산 정약용 (1762~1836),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아들에게 쓴 편지에 나타난 내용을 소개하려 한다.
 

휴대용 과거 시험 경서 학습 자료.사서오경의 내용이 적힌 죽간(竹簡)
경통(經筒)
휴대용 과거 시험 경서 학습 자료.   사서오경의 내용이 적힌 죽간(竹簡)
서울역사박물관 

 

묵재일기

노원구에는 ‘이윤탁 한글영비’가 있어서 주소가 ‘한글 비석로’인 곳이 있다.

이 ‘한글영비’는 묵재 이문건이 부친인 이윤탁의 묘를 모친의 묘와 합장하면서 1536년에 세웠는데, 한글로 쓰인 최초의 묘비문으로 국어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었다. <묵재일기>는 ‘한글영비’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묵재가 1535년 11월 1일부터 1567년 2월 16일까지 30년간 쓴 일기인데 10책이 전해지고 있다. <묵재일기>와 병행하여 대부분 한시(漢詩)로 쓰여진 <양아록>은 조선시대 사대부가 쓴 유일한 육아일기로 알려져 있는데, 묵재가 손자 수봉을 양육한 과정을 16년간 기록한 것이다. 묵재가 육아일기를 쓰게 된 이유는 그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고향인 경북 성주에서 귀양살이중 손자 수봉(1551~1594)을 얻게 되었고, 몸이 약했던 외아들이 수봉이 태어난지 6년 만에 숨을 거두게 되자 손자의 교육을 전적으로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울 이윤탁한글영비 보물 제1524호  출처:문화재청
서울 이윤탁한글영비 보물 제1524호   출처:문화재청

 

1553년 4월 11일 맑고 따뜻하였다. 두 손자가 글을 익혔다.

두 손자는 수봉과 수봉의 누나인 숙희를 말하는 데 1553년은 수봉이 두 돌이 되는 때이다.

1557년 1월 20일 맑다가 흐려졌으며 춥지는 않았다.

아이를 돌보았고, 「천자문」을 다 가르쳤다.

1557년 3월 2일 흐렸으며 어두웠다.

손자를 돌보았다. 손자 아이의 성격이 둔하고 미련하여 쉽게 글자를 익히지 못하고

노는 것을 좋아하면서 배우지 않았으므로 내가 오후에 화가 나서 손수 벽지(壁紙)를 없앴다.

1557년 4월 9일 맑았으나 아침에는 흐렸다.

손자를 돌보았다. 손자가 글자를 익히지 않았으며 또한 잘 잊어 먹었다.

1557년은 손자의 나이가 만 6세였다. 묵재는 손자가 천자문은 다 배웠지만 노는 것을 좋아하고 쉽게 글자(한문으로 된 글자)를 익히지 못한다고 벽지(아마도 글자를 쓴 종이를 붙여놓았던 벽지일 것 같다.)를 없애버렸다. 손자인 수봉은 10살에 「소학」(小學)을 배우기 시작하여 「대학」(大學), 그리고 12살에 「맹자」‘등문공편’까지 진도를 나갔다. 묵재는 손자가 공부를 좋아하지 않고 놀기만 좋아해서 근심하는 마음을 일기에 자주 기록하였다.

 

부모들은 자녀가 공부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1559년 2월 13일 맑았다.

아이가 글을 배우는데 태만하여 어두워서 꾸짖었는데도 듣지 않았다.

1561년 1월 28일 약간 흐렸다.

손자가 아침에 글을 배웠는데 많이 화를 내면서 책망하기를 계속하므로,

이에 주먹으로 그의 머리를 때리고 꾸짖으면서 ‘개자식’(犬兒)이라고 말하였다.

1561년 9월 2일 맑았다.

손자가 놀러 가는데 급하므로 빨리 글을 익히자고 하여 재촉하는 것을 그치지 않으므로

다시 천천히 익히도록 하니 분하고 걱정하면서 속으로 울컥하여 말로 불평하면서

등을 돌리고 앉으니 나도 화가 나서 손바닥을 휘둘러 여러 차례 아래를 때려서 사람이 되지 못한

잘못을 질책하고 「소학」(小學)을 거두어 빼앗고 「사략」(史略)을 주어서 읽도록 하였다.

1562년 10월 27일 아이가 공부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우둔하다.

1563년 7월 30일 아이는 공부한 것을 잊어버려 읽지 않은 것과 같다.

묵재는 손자가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며 때리고 ‘개자식’이라고 욕을 하기도 한다.

묵재의 손자는 우둔하고 공부한 내용을 잊어버려 책을 읽지 않은 것과 같은 상태라고 계속 지적받는다.

퇴계 이황이 맏아들 준(1523~1584)에게 쓴 편지들을 보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기를 반복했던 이미지와 다른 점을 보고 놀라게 된다.

 

이 앞의 편지에, 친구와 같이 와서 서울 구경을 한 후에 그대로 머물면서, 겨울을 보내기를 바란다고 말하였으나, 지금 너의 편지를 보니 스스로 그것이 무익하다는 것을 알고, 때 맞추어 와서 시험을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네가 평소에 입지(立志)가 없어서이다.

다른 선비들이 부추겨 용기를 북돋우는 때를 당하여도, 너는 격앙하고 분발하려는 뜻을 일으키지 않으니, 나는 대단히 실망이 되고 실망이 되는구나.

준이 1540년 별시에 응시하지 않으려는 것이 의지가 없기 때문이라는 내용이다.

퇴계가 43세 때인 1543년(중종38)의 편지에는 아들 둘에 대한 걱정을 써서 보냈다.

요즘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하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너는 최근에는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 학업을 그만두고 게으름을 피우며 세월을 보내고 있지는 않느냐?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다. 나는 너희들 두 아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으니, 끝내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느냐? 너는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느냐?

너는 늘 학문을 게을리하여 요행을 바라기는 어려울 것이다.

1553년(명종8) 53세인 퇴계가 준에게 써보낸 손자에 대한 얘기는 <묵재일기>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책망과 질책이 대부분이라는 점은 지금의 교육적 상황에서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학습 태도와 방법에 대한 부분은 충분히 고려할만 하다.

 

아몽은 책을 읽는데 깊이 읽지 않아서 한 번 보고는 곧 잊어버리니 끝내 무슨 도움이 있겠느냐?

반드시 앞서 배운 것을 잇달아 읽어야 될 것이다.

요즈음은 벼슬하기가 지극히 어려운데 너는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서 걱정이 되지 않느냐?

아몽이 퇴계로 왔다고 들었다. 그 놈이 읽은 것은 모름지기 하루 이틀 안에 차례대로 익혀 외우게 하고, 매번 한 권을 마칠 때마다 또한 앞서 읽은 것을 복습하도록 하는 것이 지극히 옳을 것이다. 지난번에 이 아이가 오로지 이와같이 숙독하지 않은 것을 보았는데, 비록 천 권의 글을 읽더라도 끝내 무슨 소득이 있겠는가?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 정약용의 경우는 더욱 날카로운 내용의 지적이 이어진다.

 

학문의 요령에 대해서는 전번에 대강 이야기했는데 너희들은 벌써 잊어버린 모양이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왜 남의 저서에서 요점을 뽑아내어 책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의심나는 것이 있다고 다시 이러한 질문을 했느냐?..<고려사>에서 초록(鈔錄)하는 공부는 아직도 손을 대지 않았느냐? 젊은 사람이 멀리 보는 생각과 꿰뚫어보는 눈이 없으니 탄식할 일이로구나

편지는 뒤이어 다른 집 아이들과의 비교로 마무리 된다.
 

덕수와 아우 철이 이곳에 와서 조금도 자리를 뜨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으며 공부하고 있으니 기특하고 기쁜 마음 이루 말할 수 없구나.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연암 박지원의 편지에서는 묵재, 퇴계, 다산과는 사뭇 다르게 아들의 과거시험과 과거시험 준비에 대해 궁금해하면서도 과거시험을 치르는 당사자에게 위로가 될 것 같은 자상함이 느껴진다.

 

큰아들에게

과거 볼 날이 점점 다가오는데 과시(科詩)는 몇 수나 지어 봤으며 속작(速作)에는 능하여 애로가 없느냐? 글제를 대해서 마음에 어렵게 느껴지지 않은 뒤에라야 시험장에 들어갈 일이고, 비록 반도 못 썼다 하더라도 답안지는 내고 나올 일이다. 그리고 글씨 연습을 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좋은 간장지(簡壯紙)를 사서 성의를 다해 살지고 충실하게 글씨를 써 보는 게 어떻겠니?

1797 여름 의릉의 근무지에서 

아들에게 답안지는 내고 나오라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는 <과정록>에서 “아버지는 회시(會試)에 응시하지 않으려 하셨는데, 꼭 응시해야 한다고 권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래서 억지로 시험장에 들어가긴 했으나, 답안지를 내지 않고 나오셨다.”고 하였다.

 

과거 볼 날짜가 점점 다가오는데 모름지기 과장(科場)을 사고 없이 잘 출입했으면 한다.

1797년 8월 5일 

과장(科場)을 사고 없이 잘 출입하라는 연암의 당부는 당시 과거시험장을 묘사한 박제가의 <북학의>중 과거론(科擧論)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유생들이 물과 불, 짐바리와 같은 물건을 시험장 안으로 들여오고, 힘센 무인들이 들어오며, 심부름하는 노비들이 들어오고, 술 파는 장사치까지 들어오니 과거 보는 뜰이 비좁지 않을 이치가 어디에 있으며 마당이 뒤죽박죽이 안 될 이치가 어디에 있겠는가? 심한 경우에는 마치로 상대를 치고, 막대기로 상대를 찌르고 싸우며, 문에서 횡액을 당하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욕을 얻어먹기도 하며, 변소에서 구걸을 요구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하루 안에 치르는 과거를 보게 되면 머리털이 허옇게 세어지고, 심지어는 남을 살상하는 일이나 압사하는 일까지 발생한다.

 

박제가의 글을 읽고 나면 과거시험장을 무사히 출입하는 일이 가능한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과거가 하루 안에 치러지는 시험이라는 것이다.

일년에 하루만 보는 시험은 수능이고, 별시가 있기는 하지만 3년에 한 번 보는 시험은 과거시험이다. 이 둘의 공통점은 하루 안에 치르는 시험이라는 것.

그 하루에 모든 것이 달려있는 것이다.

‘대학을 알면 미래가 보입니다’라는 말은 수능 시험 하루를 무사히 보낼 수 있어야 함과 다르지 않다.
 

미래를 꿈꾸고 그 자체로 빛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온 나라에서 과거 시험의 규정에 맞는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있는 자들로 하여금 각각 단 하나의 재능만 펼치도록 한다 해도 그것을 모두 합한다면 수만 가지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1785년 11월 7일 유만주

각기 저마다 인생이 있고 각기 저마다 세계가 있어 분분히 일어났다 분분히 소멸한다.

1782년 10월 25일 유만주

유만주는 말한다. 각기 저마다의 인생이 있고 각기 저마다의 세계가 있다고. 사람들 각자 가진 하나의 재능이 수만 개의 재능이 될 수 있다고.

<흠영>이후 240년이 흐른 지금 BTS는 이렇게 노래한다.
 

한 사람에 하나의 역사, 한 사람에 하나의 별

칠흙 같은 밤들 속에 우린 우리대로 빛난다고,

우리 자체로 빛나고 있다고, 빛나게 하라고.

“천하의 선비를 어떻게 과거라는 제도로 다 얻을 수가 있겠는가?” 라는 박제가의 말처럼

하루 안에 끝나는 시험 말고 저마다의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야 한다.

그 자체로 빛날 수 있도록.

 

한 사람에 하나의 역사, 한 사람에 하나의 별

70억 개의 빛으로 빛나는 70억 가지의 world 70억 가지의 삶...

칠흙 같던 밤들 속에 우린 우리대로 빛나 우리 그 자체로 빛나

Shine, dream, smile

Let us light up the night

소우주 _ BTS

 

 

글 · 김정희(문화평론가)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