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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작은 언덕을 오르는 힘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작은 언덕을 오르는 힘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 정우성(영화평론가)
  • 승인 2023.08.14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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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네이버 영화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의 오프닝에서, 거울에 비친 케이코(키시이 유키노)의 얼굴을 보여주는 클로즈업 직후 등장하는 쇼트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방 바깥의 거실에서 음악 작업을 하는 누군가의 손이 보인다. 쇼트의 전경에서 케이코는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고, 후경에서는 케이코의 동생 세이지(사토 히미)로 유추할 수 있는 인물의 손이 기계를 만지는 것을 관객이 알아챌 듯 말 듯 한 크기로 한 화면에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배치는 케이코가 매일 적어나가는 권투 연습 일지와 세이지의 음악 작업의 유사성을 장면화하고 있음을 영화 후반부의 한 시퀀스를 통해 쉽게 깨닫게 된다.

집과 일터, 권투도장이라는 세 장소를 일상적으로 오가는 케이코의 모습을 특별한 BGM 없이 잔잔하게 묘사하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서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후반부의 특정 시퀀스는, 세이지가 만드는 음악을 BGM처럼 사용하면서 케이코의 권투 일지를 읽는 회장 부인의 보이스 오버로 케이코의 현재와 과거를 뒤섞어 보여준다. 이 파편적인 순간들의 파노라마가 반복적인 평범한 삶의 모습인 동시에 일상적 이미지를 넘어서는 묘한 감흥을 만들어내는 이유는 영화 전체의 일관된 스타일에서 벗어나는 형식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일상을 읊는 부인의 목소리와 세이지의 음악을 그녀만 들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로드워크 10킬로, 섀도 3라운드, 샌드백 3라운드, 로프 2라운드, 1월 2일 맑음 ...... 여전히 힘이 많이 들어간다, 숨 쉬는 것도 잊지 말자” 이는 당사자인 케이코에게는 권투 연습의 익숙한 과정들을 기록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타자에 의해 발화되는 순간 반복되는 평범한 삶의 경험들과 기억들이 특별한 아름다움의 심상으로 변화한다. 늘 집 안에서 녹음하던 세이지의 음악이 자신의 방과 헤드셋 밖을 벗어나면서 케이코의 기억과 공명하며 서로의 일상을 따뜻함으로 어루만지는 순간을 이루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상의 아름다움은 그것을 직접 행하는 당사자는 알지 못한다. 회장 부인의 낭독과 세이지의 음악을 듣지 못하는 케이코는 그저 삶을 담담히 살아갈 뿐이다.

 

출처: 네이버 영화
출처: 네이버 영화

일상과 비일상을 오가며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흥미로운 점은 권투라는 강렬한 볼거리를 소재로 하면서 경기나 드라마의 극적인 구조보다 연습 과정과 같은 경기 밖 순간들에 초점을 맞췄다는 것에 있다. 때문에 드라마로서는 어설프거나 모자란 부분이 있는 영화이다. 이를테면 주인공인 케이코가 고민하고 갈등하는 지점은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으면서 그것이 해결되는 과정도 무난하고 안일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또한, 영화는 케이코에게 집중하기보다 그녀가 다니는 체육관이 겪게 되는 폐점 과정과 체육관 관장의 이야기, 체육관의 동료들, 가족의 이야기들로 채우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점이 아니며 영화가 지향하고자 하는 방향과 테마에 부합하는 강점에 가깝다.

예컨대 오프닝 타이틀이 암지 위에 떠오르고 난 뒤 권투 도장의 모습을 묘사하는 방식을 보자. 어둑어둑해진 밤을 비추는 가로등의 모습과 계절을 짐작하게 하는 날리는 눈송이들 위로 줄넘기 소리가 들리고, 소리의 근원인 누군가의 경쾌한 발 움직임이 비춰진다. 이후 운동기구를 사용하는 손의 모습,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는 기구의 모습, 샌드백을 가격하는 익명의 글러브 움직임, 권투 도장에 전시된 액자의 인서트까지 차례로 나열된다. 인격과 감정을 지닌 인간이 하는 행위가 아니라 권투라는 운동 그 자체에서 반복되는 움직임을 중심으로 묘사한다.

이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서 묘사한 일상의 삶들 또한 그러하다. 케이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지만 그만큼 영화에서 중요하고 중심이 되는 것은 보편적 삶을 구성하며 반복되는 요소들이다. 인간 사회에 무심한 듯 흐르는 커다란 강과 반복 운행하는 전철의 모습, 케이코가 집과 직장, 체육관을 반복해서 움직이는 동선, 그 동선의 배경이 되는 공간을 같은 구도로 반복하여 촬영한 쇼트들의 유사성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그녀가 집과 일, 권투를 오가는 것처럼 세이지도 집과 음악의 공간이 아닌 일터에서 세이코의 경기 중계를 보며, 체육관의 코치들도 체육관이 문을 닫자 각각 정장과 경비원 복장을 하고 나타난다. 이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 모두가 일, 집이라는 일상과 권투 혹은 음악이라는, 비일상이지만 결국 긴시간 반복되며 일상이 되는, 비일상을 오가며 살아가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느리지만 성실한 발걸음으로 가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네이버 영화
출처: 네이버 영화

거울에 비친 것

당연하고 익숙한 삶의 반복이 어느 순간 낯선 감흥으로 가시화되는 것은 앞서 언급했듯 케이코가 듣지 못했던 복싱 노트 낭독처럼 타자를 바라볼때 나타난다. 그녀 또한 영화의 결말에서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던 선수와 우연히 재회하면서 그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복싱 경기에서 승부를 겨루던 적이지만 자신과 똑같이 일을 병행하며 권투를 해나가고 있는 상대 선수의 일상을 보며 타자의 얼굴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마치 영화의 오프닝에서부터 케이코를 비추지만, 그녀가 보지 못한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듯 말이다.

이처럼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서 일상을 낯설게 비추며 섬광처럼 나타나는 순간들, 감동적인 순간들은 타인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온다.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제목처럼 눈을 들여다보듯 타자를 유심히 보고 공감하며 거기서 나를, 나의 일상을, 인간의 삶에서 익숙하게 반복되는 요소들의 하찮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들에서 온다.

케이코의 복싱 영상을 복기하는 회장의 행위와 그녀가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 이후 거울을 바라보며 나란히 서서 연습을 하는 케이코와 회장의 모습, 케이코의 서툴렀던 풋워크와 콤비네이션이 코치와 완숙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똑같이 풋워크 연습하는 다른 코치와 선수의 움직임, 연습 일지를 읽는 부인의 목소리 그리고 경기에서 패배를 안겨준 선수를 보며 자신의 모습을 거울처럼 마주하는 케이코의 얼굴이 그것이다. 그렇기에 영화의 마지막, 케이코가 언덕을 뛰어올라 땅과 하늘 사이에서 삶의 루틴을 따라 프레임 밖으로 내달리는 것을 한 호흡에 담은 쇼트가 그토록 감동적인 것은, 산을 넘는 듯한 극적인 드라마 때문이 아니라 약간의 힘을 들여 작은 언덕을 올라 일상으로 복귀하는 그녀의 의지와 행위가 우리의 평범한 삶을 은유하는 소소하지만 아름다운 움직임으로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글·정우성
2021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현재 예술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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