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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노인 소재 다큐멘터리의 환상적 요소와 대중성-<워낭소리>
[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노인 소재 다큐멘터리의 환상적 요소와 대중성-<워낭소리>
  • 임정식(영화평론가)
  • 승인 2023.09.04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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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노인의 삶을 다룬 영화는 2000년대에 접어들어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가 고령화 시대에 진입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노인영화의 개념이 모호하고 스펙트럼도 매우 넓지만, 일단 노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이 많아진 것만은 분명하다. 이 시기에는 <죽어도 좋아>(2000)를 비롯해 <워낭소리>(2009), <시>(2010), <그대를 사랑합니다>(2011), <수상한 그녀>(2014),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 <장수상회>(2015), <죽여주는 여자>(2016)와 같은 노인 소재 영화가 잇달아 만들어졌다. 이 영화들은 노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들의 삶과 내면을 형상화함으로써 한국영화의 지평을 넓혀나가고 있다. 

이 가운데 <워낭소리>는 노인 소재 영화이자 독립영화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돌파했으며, 최종적으로 296만 명을 기록해 한국 독립영화사의 새 장을 연 작품이다. <워낭소리>는 개봉 첫날 겨우 7개 상영관에서 28회 상영해 1091명의 관객만을 기록했다. 하지만 입소문이 나면서 개봉 13일째에는 하루 1만 명을 넘어섰고, 개봉 1개월이 되면서 독립영화 최초로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워낭소리>는 이로 인해 슬리퍼 히트(sleeper hit)의 대명사가 됐다. <워낭소리>는 다큐멘터리는 흥행과 거리가 멀다는 인식을 깼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큰 작품이다.

<워낭소리>에는 장르, 배우, 감독 등 모든 측면에서 흥행 요소가 없다. 사회적 타자에 가까운 산골 마을 노인들이 주인공이고, 그들의 일상생활과 평범한 에피소드가 서사의 중심을 이룬다. 이로 인해 <워낭소리>에서는 드라마틱한 사건이나 화려한 스펙터클을 찾아볼 수 없다. 순제작비 1억 원의 저예산 독립영화이니 당연하다. <워낭소리>에서는 심지어 늙은 소가 주인공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런데도 <워낭소리>는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그 흥행 요인의 하나로 환상성을 꼽을 수 있다. <워낭소리>는 노부부의 일상생활에 내재 되어있는 신화적인 모티브가 환상성으로 확장되고, 그 환상성이 사회적 의미를 획득하면서 대중과 공감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워낭소리' 스틸컷.
'워낭소리' 스틸컷.

<워낭소리>는 경상북도 봉화군 청량산 자락에서 농사를 짓던 노부부와 늙은 소의 우정이 중심축을 이룬다. 이들 노부부는 관객들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그들의 일상생활과 내면의 일부는 “낯선 문화”로 비친다. <워낭소리>가 산업화, 도시화, 고령화가 진행된 21세기 한국 사회에 없는 요소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부부의 일상 속에 인간과 동물의 교감 및 우정, 재생과 부활의 순환론적 세계관,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나드는 신화적 상상력이 구현돼 있다는 점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즉 <워낭소리>에는 다양한 신화적 모티브가 내재 되어있으며, 이러한 요소가 환상성의 기반이 됐다고 할 수 있다.

환상성은 현실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환상성은 현실에서의 ‘부재’를 통해서 알려지는 요소들이다. 그래서 환상성은 상실, 결핍의 특성을 지니고, 환상물은 사회적 맥락과 연결된다. SF영화 역시 사회적인 환경과 대중들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게 마련이다. 즉 환상물은 ‘현실에 부재하는 요소의 표현’과 ‘사회적 맥락’이라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이제는 단순히 달을 탐험하고, 우주를 비행하는 것만으로 대중의 환상성을 충족시킬 수 없는 이유다. 이때 ‘현실’ 혹은 ‘사회’의 성격은 상대적이고 유동적이다. 이로 인해 환상성의 구체적인 모습은 현실 상황, 지역과 사회의 특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초자연적인 사건과 비현실적인 인물을 다루지 않는 영화도 사회적‧문화적 환경에 따라 환상물로 수용될 수 있는 배경이다.

환상성의 이러한 특징은 다큐멘터리에도 적용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가 다룬 사건이 현실 세계에 부재하는 요소를 포함하고, 그 요소들이 사회적 맥락에 의해 관객들의 결핍 의식을 충족시켜준다면, 그 작품은 환상물의 조건을 갖춘 셈이 된다. <워낭소리>에서는 리얼리티 자체가 환상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워낭소리>의 세계는 산업화, 도시화된 우리나라의 보편적인 현실과 여러 측면에서 대비된다. <워낭소리>의 주요 사건은 ‘1) 늙은 소와 할아버지의 노동, 2) 젊은 소의 등장과 출산, 3) 기계화를 거부하고 전통적인 농사법을 고수하는 할아버지, 4) 늙은 소에 대한 할머니의 질투, 5) 할아버지의 병환, 6) 영정 사진 촬영, 7) 늙은 소를 팔라고 주장하는 할머니와 자식들, 8) 할아버지의 부상과 치료, 9)늙은 소를 팔려다가 실패하는 할아버지, 10) 늙은 소의 죽음과 매장, 11) 불공을 드리는 노부부, 12) 워낭을 손에 쥐고 나무 밑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 등이다.

 

'워낭소리' 스틸컷.
'워낭소리' 스틸컷.

<워낭소리>에 등장하는 노부부의 생활 방식은 전근대적, 자연주의적이다. 할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면서 기계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소가 끄는 쟁기로 밭을 갈고, 농약 사용도 거부한다. 할아버지는 어려서 침을 잘못 맞아 다리를 저는데, 그 불편한 몸을 이끌고 사시사철 논밭에 나가 일을 한다. 늙은 소는 일할 때도, 수레를 타고 이동할 때도 할아버지와 함께 움직인다. 할아버지와 늙은 소는 30년 이상 똑같은 생활을 지속해 왔다. 할아버지와 늙은 소의 관계는 현대사회에서 매우 희귀한 사례이다. 할아버지와 늙은 소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관해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워낭소리>의 환상성은 개봉 당시의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면 그 면모가 더욱 분명해진다. 2000년대 초반에 한국 사회는 사회적, 경제적 시스템이 붕괴되는 혼란을 경험했다. 1997년 발생한 IMF 구제금융 사태로 인해 나라 전체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고, 그 후유증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2007년에는 미국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이라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또 휘청거렸다. 한국 사회는 대량 실업, 가계부채 증가, 국가 부도 위기와 같은 커다란 난관에 봉착했다. 산업혁명과 함께 본격화된 경제 발전과 자본주의의 폐해가 쓰나미처럼 밀어닥친 충격으로 허우적거렸다.

당시 우리나라는 산업화, 도시화를 향해 질주한 결과, 선진국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따라서 대중들은 두 사건을 겪으며 엄청난 문화적, 정신적 충격에 휩싸였다. 대중들은 천민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횡행하는 현대사회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고, 황폐해진 정신을 위안해 줄 대상을 필요로 했다. 2000년대 초반에 신화 열풍이 일어난 배경이다. 일본 종교학자 나카자와 신이치 식으로 말하면, ‘곰의 시대’로 회귀하려는 시도였던 셈이다. 이러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워낭소리>는 관객들에게 환상적인 것으로 다가오면서 현실에 없는 세계, 우리가 상실한 세계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자극했다.

 

'워낭소리' 스틸컷.
'워낭소리' 스틸컷.

<워낭소리>는 고령화라는 사회 현상과 관련해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나라에서 고령화는 매우 급속도로 이뤄지고 있다. 그런데 노인들의 삶의 질과 관련된 생활환경은 매우 열악하다.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10명 중 8명이 만성질환을, 3명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노인 자살률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자살률의 5배에 달한다. 고독사의 증가도 사회 문제가 되고 있고, 노인들의 이혼 건수도 급증하고 있다. <워낭소리>의 세계는 이러한 현실과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워낭소리>가 담아낸 세계는 황혼이혼, 고독사, 빈곤, 자살 등으로 점철된 현실 속 노인들의 삶과 질적으로 다른 ‘낯선 문화’이자 이상적인 공간으로 인식된다.

이처럼 <워낭소리>는 현실에 부재하는 요소들을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이를 통해 관객들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결핍을 보상해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워낭소리>는 환상성이 사회적, 문화적 결핍을 보상하고, 대리 만족을 제공한다는 점을 확인해 준 작품이다. 그렇다면 제2, 제3의 <워낭소리>는 얼마든지 다시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러한 작품의 장르에는 경계가 없을 것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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