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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내일이 기다려질 것이다 <다섯 번째 흉추>
[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내일이 기다려질 것이다 <다섯 번째 흉추>
  • 정우성(영화평론가)
  • 승인 2023.10.10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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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네이버 영화

<다섯 번째 흉추>에서 곰팡이를 통해 묘사되는 소멸해가는 사랑과 다가오는 죽음을 보며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그것은, 영화의 첫 에피소드에서 커플이 나누던 대화 속 한강 아래 수많은 뼈가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이탈리아 여행>(1953)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캐서린(잉그리드 버그만)은 조이스(조지 샌더스)와의 결혼과 사랑의 종말을 관광지에 전시된 수많은 뼈와 미라의 형태로 박제되어 버린 커플의 형상을 통해 확인한다. 그 확인이란 그녀가 한 인간으로서 종국에 죽음을 맞이하게 될 예정된 미래처럼 사랑 또한 화산재에 박제되어 시간을 멈추지 않으면 결국 부패하여 원래의 형태로 돌아갈 수 없는 무언가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 거대한 시간 안에 있는 나와 세계를 목도하는 것이다.

캐서린이 견자(見者)로서 나폴리를 거니는 것과 같이 <다섯 번째 흉추>의 곰팡이 또한 인간 사회의 이곳저곳을 떠돌며 사랑의 종말과 한 개인의 종말을 본다. 다만 인간의 신체에 들어선 영화의 눈이 아니라 매트리스에 종속된 곰팡이라는 영화-눈으로서 기능하며 말이다. 캐서린이 사랑의 감정, 생명력이 소진되어가는 시선에서 무언가를 비춘다면, 곰팡이는 버려지고 부패되어가는 대상으로서 생명력을 갈구하며 인간의 척추를 탐식하는 시선으로 비춘다. 때문에 사랑이 상실되어가는 과정을 바라보는 전반부의 연인들 에피소드보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어가는 여성의 부탁을 듣는 장면이 영화의 핵심적인 에피소드로 부각된다.

 

출처: 네이버 영화

모든 생명력을 소진하고 소멸을 앞둔 여성 환자는 부패와 상실에서 탄생하여 생명을 피워내고 있는 기이한 피사체와 정반대의 상을 맺으며 마주한다. 죽어가는 나에게 없는 무언가이자 호스피스 병동 벽에 붙은 ‘부활의 소망이 움트다’는 종교적인 문구를 실현하는 비현실적인 대상에게 그녀는 딸에게 작성한 편지를 전달해주길 부탁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비현실적인 대상에게 하는 현실적인 부탁은 이루어질 수 없다. 매트리스에 종속된 곰팡이가 그것이 가능할 리 없으며, 겨우 인간의 형태를 이루어 타인과 손을 맞잡고 시선을 나누는 감정적 교류에 성공하려는 순간에는 교통사고로 미루어 짐작되는 소리와 함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강을 떠도는 매트리스의 신세가 되기 때문이다. 또는 영화에서 명확하게 상황의 변화를 묘사하지 않기 때문에 매트리스에서 벗어나 강변에 버섯이라는 같은 부류의 생명체로 변하여 자리를 튼 것처럼도 보인다. 결국, 무엇이 됐든 죽은 이의 소망이 담긴 편지는 산 사람에게 전달되지 못한다.

도착해야 할 곳에 도착하지 못한 편지의 내용은 그 목적지가 아닌 곳에서 유령과 같은 목소리로 혹은 곰팡이의 기이한 목소리로 낭송된다. “안녕, 지우 이 편지가 너에게 잘 도착했기를 바래, 모든 작별이 슬프다는 법은 없지만 조금은 울어줬으면 좋겠어, 이제야 너를 놓는 법을 알게 된 것 같아” 더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했던 사람과 그 사람의 사랑이 기묘하게 빛나는 균류의 이미지 위로 떠 오를 때 우리는 이 편지가 한 개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곰팡이가 떠돌며 보여주었던 사랑과 상실의 여러 형태 안에서 공통으로 찾을 수 있는 보편적인 대상을 향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 대상이란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르게 변주되는 여러 형태의 삶, 보편적인 감정들이 수 많이 반복되는 심원한 시간 속에 풍화되거나 휩쓸려 결국 소멸하게 될 허무하지만 아름다운 생이다. 

 

출처: 네이버 영화
출처: 네이버 영화

예컨대 “불면증이 찾아오면 가만히 누워서 한 번 오늘 있었던 일들을 되돌이켜 봐라, 내일이 기다려질 것이다, 가치 있을 거야”라고 낭송하는 부분에서 죽음이라는 인간이라면 예외 없이 겪게 될 무의미한 미래에 속한 유령이 오늘을 돌이켜보면 내일이 기다려질 것이고 가치 있을 거라 말하는 역설적인 단언이 허무함 안에서 이상한 낙관과 따뜻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넘어, 눈앞에 끝없이 흐르는 강과 오랜 시간 쌓인 지층의 모습이 전면화될 때 캐서린이 목도한 무언가처럼 불가해한 감흥 안에 휩싸이게 한다.

<다섯 번째 흉추>는 겉으로 보기에 현란한 시청각적 이미지와 기괴한 설정에 의존하는 텅 빈 영화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으며 <EO>(2022)나 <언더 더 스킨>(2013)처럼 당나귀나 외계인이라는 카메라를 따라 세계의 이미지를 마주하게 하는 구조의 단단한 영화이다. 시각적 스타일에서 또한 사프디 형제의 영화처럼 망원렌즈-클로즈업을 자주 사용하면서 흔들림이 많은 카메라 움직임으로 낮은 심도와 평면적으로 납작해진 이미지를 통해 색이 혼용된 조명 아래 비현실적이고 불안정하여 언제든 사라질지도 모르는 피사체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언컷 젬스>의 엔딩에서 얼굴에 난 총상 구멍을 따라 우주로 나아가는 빛의 이미지나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에서 자연의 관능적 화면 위로 유령의 목소리가 흐르는 이미지를 차용한 것처럼 보이는 마지막 시퀀스는 그 레퍼런스가 떠오르는 것을 완전히 잊을 정도로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그렇기에 <다섯 번째 흉추>는 곰팡이와 버섯이라는 죽음, 부패/생명력, 아름다움이라는 양면적 이미지의 소재, 원룸과 모텔, 병동이라는 순환하는 익명의 공간, 비타민과 오메가라는 일상적 소재로 사랑과 상실, 그것이 반복되는 세계의 시간을 기괴하지만, 매혹적이고 위트있게 그려내는 감독의 내일이 기대되는 훌륭한 데뷔작이라 말할 수 있다.

 

 

글·정우성
2021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현재 예술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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