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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멜빌의 미국고전소설과 아르노프스키의 현대 고전영화: 대런 아르노프스키의 <더 웨일>(2022)
[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멜빌의 미국고전소설과 아르노프스키의 현대 고전영화: 대런 아르노프스키의 <더 웨일>(2022)
  • 정문영(영화평론가)
  • 승인 2023.10.16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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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 고전문학 『모비 딕』(1851), 현대연극 『더 웨일』(2012), 각색영화 <더 웨일>(2022)

2023년 아카데미 2관왕을 차지한 대런 아르노프스키의 <더 웨일>(2022)은 원작 사무엘 D. 헌터(Samuel D. Hunter)의 연극 『더 웨일』(2012)을 각색한 영화이다. 그리고 이 원작 극작품은 19세기 중엽 미국고전문학의 거장 허만 멜빌(Herman Melville)의 소설 『모비 딕』(1851)에 기초를 둔 작품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모비 딕』과의 상호 밀접한 연관성을 전제로 하여 전작들과의 상호텍스트적인 읽기를 유도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모비 딕』이 미국 근대사회를 배경으로 근대인의 ‘영혼의 항해’를 그리는 우화라면, 이 영화 또한 현대인의 ‘영혼의 여정(항해)’을 전개하는 미국 현대사회와 현대인에 대한 우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270kg이 넘는 “고래”(초고도비만인의 별칭)로 거동이 힘든 심각한 장애와 질병이 울혈성 심부전까지 진행되어 당장 병원에 가지 않으면 일주일 안에 죽게 될 시한부 인생의 동성애자 찰리(브랜던 프레이저)이다. 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마지막 영혼의 여정을 우화적으로 그리는 중세 도덕극 『인간』(Everyman, 15세기말경)의 주인공 인간처럼 찰리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등장인물들을 만나는 구조로 이 영화는 진행된다. 물론 원작 극작품과 영화는 도덕적 메시지와 종교적 구원보다는 인간적 구원을 주제로 다루고 있지만, 멜빌 뿐 아니라 영문학의 전통을 구성하는 연극 장르의 대표작을 기본 틀로 다시 보기를 시도한다. 이 영화는 고전 영미문학 작품들에 기초할 뿐 아니라, 찰리의 딸 엘리(세이디 싱크)가 8학년(중2) 때 쓴 멜빌의 『모비 딕』에 관한 에세이가 찰리의 영혼의 항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비대면 온라인 강의로 학생들에게 작문을 가르치는 영문학 강사인 찰리에게 주어진 통증을 달래고, 생명을 지속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약도 주사도 아니고, 엘리의 에세이를 읽는 것이다. 찰리는 엘리의 멜빌 에세이에서 그녀가 “강한 작가”(strong writer)가 될 수 있는 재능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강한 작가”란 해럴드 블룸(Harold Bloom)이 언급한 고전의 “영향에 대한 불안”(anxiety of influence)을 극복할 수 있는 진솔한 오독을 감행하는 “강한 시인”을 의미한다. 엘리에게 그녀 자신의 에세이를 읽고 그것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과 아버지로서 찰리가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잘한 일”인 것이다.

이처럼 이 영화는 고전 영미문학 작품과의 연관성으로 고전에 대한 오마주와 더불어 엘리의 에세이와 찰리의 마지막 사명을 실행함으로써 그의 마지막 빛인 엘리를 향해 무거운 몸을 일으켜 나아감으로써 영혼의 항해를 마친다. 이러한 엔딩으로 이 영화는 현대 미국인의 영혼의 항해를 통해 19세기 미국고전문학의 우수성과 함께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현대 고전영화를 지향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2. 멜빌의 미국 근대인과 아르노프스키의 미국 현대인의 ‘영혼의 항해’

이 영화가 언급하고 있는 멜빌과 휘트만의 작품은 “미국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19세기 중엽 미국문학의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들뢰즈는 D. H. 로런스를 미국문학론의 선구자로 간주하고 그가 쓴 『미국 고전문학 연구』(1923), 특히 멜빌론을 전유하여 “영미문학의 우수성”을 예찬한다. 이 영화의 우수성 또한 로런스의 멜빌론과 휘트만론을 참조하여 볼 때 부각될 수 있다.

로런스는 필그림 선조들과 그들의 후예인 미국의 근대인들이 종교의 자유 때문에 미대륙에 온 것이 결코 아니며, 그들은 “긍정적 자유”(positive freedom)가 아니라 “그들의 현재 존재와 지금까지의 존재해온 바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부정적 자유”(negative freedom) 때문에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으로 무의식적인 층위에서 작동하고 있는 “더없이 깊은 온전한 자아”(the deepest whole self)의 이끌림에 의해 미대륙으로 온 이민들도 소수 있으므로, 미국 근대인들은 이러한 두 부류의 이민들로 로런스는 구별한다. 즉 “방대한 도망 노예들의 공화국”과 “소수의 진지한 자기고뇌의 사람들”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수의 이민자들을 노예로 칭한 것은 그들이 기존 낡은 도덕과 정신을 배격하지만 여전히 거기에 얽매어 벗어나지 못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표리부동성(duplicity)이 미국고전문학의 핵심적인 특성임을 로런스는 강조한다. 낡은 정신과 민주주의의 이상에 사로잡힌 다수의 “미국적 의식”이 “미국의 온전한 영혼”을 억압하고 은폐해왔기 때문에 미국사회는 미국의 온전한 영혼이 진정 원하는 대로 이루어 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로런스에 따르면, 멜빌의 피쿼드호는 백인 원주민의 영혼을 상징한다. 19세기 미국의 근대정신은 1장 제목 “터의 정신”(the Spirit of Place)과는 달리 실제 원주민과 흑인을 비롯한 타인종 원주민은 배제한 채 정착식민주의(settler colonialism)로 정착한 백인 원주민만을 범주로 한정한 그들의 정신을 의미한다. 의지의 화신이자 광기의 폭군 에이헙 선장은 “우리 백인의 정신적 의식의 광신적 열광”(the maniacal fanaticism of our white mental consciousness)을 상징하고, 거대한 흰 고래 모비 딕은 “백인종의 가장 깊은 피의 존재”(the deepest blood-being of the white race)를 상징한다. 따라서 『모비 딕』의 이야기는 “백인종의 가장 깊은 피의 존재”인 모비 딕이 에이헙이 표상하는 “우리 백인의 정신적 의식의 광신적 열광”의 추격을 받아 쫓기는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나 이 에이헙의 흰 고래에 대한 복수의 이야기는 피쿼드호의 침몰, 거대한 흰 고래가 거대한 흰 영혼의 배를 가라앉히는 파국으로 치닫는 영혼의 항해로 파멸의 결말에 이른다. 로런스는 멜빌이 거짓된 민주주의의 이상에 열광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깊은 무의식에서 백인 원주민 종족의 이상주의가 끝장났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파국으로 끝나는 영혼의 항해를 진솔하게 표현할 수 있는 위대한 작품을 쓰게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상주의적 멜빌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는 『모비 딕』의 내레이터 이슈마엘은 “공정한 평등의 정신”과 “위대한 민주주의의 신”에게 기원을 하며, 피쿼드호의 “가장 비천한 선원들, 배교자들, 버림받은 자들”에게 “고매한 특성”과 “비극적인 우아함”을 부여하여 스토리텔링을 하겠다고 다짐한다. 사실 핍(Pip)과 퀴켁(Queequag)과 같은 버림받은 자와 배교자와 비천한 선원들의 이야기, 밑바닥 사람들의 목소리에 대한 이슈마엘의 이야기들에 독자들은 너무 매료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들의 영혼의 항해가 에이헙의 모비 딕에 대한 복수와 파멸로 이어지는 영혼의 항해의 대안이 될 수는 없을 뿐 아니라 각각의 영혼은 평등하게 만난 적이 없다. 『모비 딕』은 백인 원주민의 영혼의 항해, 엘리가 말한 멜빌의 “슬픈 이야기”에 압도적인 비중을 둔 소설임은 분명하다.

 

아르노프스키 감독은 헌터의 연극에서 바로 이슈마엘이 다짐한 스토리텔링을, 즉 “편견이 비인간적인 것으로 만든 것들에서조차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각 인물에게 용기와 우아함이 부여된 스토리텔링에 매료되었고, 여기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다. 사실 멜빌의 이슈마엘은 영혼과 영혼이 만날 수 있는 공정한 민주주의적 평등을 추구하는 스토리텔링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헌터와 아르노프스키는 영혼과 영혼이 만나 서로를 구원하고자 하는 용기와 아름다움을 발견한 등장인물의 내면으로 관객을 인도하는 것이 이 영화가 추구하고자 한 목표라고 한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현대 미국인을 대표하는 ‘인간’으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할 수 없다”고 믿는 찰리를 주인공으로 그리고 무관심할 수 없는 사람들의 영혼의 만남으로 서로를 구원하는 가운데 전개되는 그의 영혼의 항해를 다룬다.

 

3. 찰리의 피쿼드호

이 영화의 무대인 오늘날 아이다호 작은 마을에 있는 찰리의 집은 피쿼드호, 찰리는 에이헙에, 찰리의 연인이었던 죽은 앨런의 여동생이자 현재 찰리의 유일한 친구로 그의 전담 간호사인 리즈(홍 차우)는 일등항해사 스타벅에, 그리고 일련의 방문객, 선교사 토마스(타이 심킨스), 딸 엘리(세이디 싱크), 전처 메리(서맨사 모턴), 피자 배달부 댄(사티야 스리드하란) 등은 외부자 이슈마엘과 같은 입지에 있는 것으로 예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은 영화가 전개됨에 따라 어긋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로런스는 1851년 백인 원주민의 영혼을 상징하는 피쿼드호의 침몰을 보여주는 『모비 딕』의 출판을 미국 정신사에서 한 고비를 맞는 사건으로 간주한다. 이후로는 모든 것이 사후효과(post mortem effect)일 뿐이라는 것이다. 미국인은 이제 영혼 없는 인간으로 “방대한 도망 노예들의 공화국”에 좀비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토마스가 새생명선교회의 거짓된 이상주의를 신봉하며 전파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입증하려는 노예로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토마스를 포함하여 모든 등장인물들, 동성애자이자 고도비만인 찰리, 정학을 당하고 친구들과 가족의 무관심 속에서 방황하는 엘리, 남편에게 버림받고 알콜중독자가된 메리, 아시아계 입양아로 오빠의 죽음으로 트라우마를 갖게 된 리즈, 이들 모두 외부자이자 추방자로 피쿼드호를 탄 이슈마엘과 유사한 입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미국 현대인은 대부분 보이지 않는 권력이 추방시킨 또는 그것으로부터 도망친 추방자, “도망 노예”라는 사실을 이 영화는 시사한다.

아내와 딸이 있는 찰리는 8년전 만난 제자 앨런과의 관계로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깨달아 가족을 버리고 그를 택했다. 그러나 앨런은 집안의 새생명선교회 신앙과 배치되는 성적 지향으로 갈등으로 먹는 것을 거부하는 거식 장애를 겪다 결국 자살을 택했다. 그의 사망으로 인해 삶의 의지를 상실한 찰리는 폭식 장애로 이제 보조기구가 없이는 거동할 수 없는 장애화된 몸으로 “혐오감”을 불러일으켜 스스로를 감금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관객은 처음 그를 이 영화의 화면 비율인 4:3 비율의 격자들로 구성된 온라인 수업 참가자 갤러리의 중앙에 까맣게 처리된 찰리의 격자 부분의 스크린과 그의 보이스-오버로 만난다. 격자 속에 갇힌 수강생처럼 관객은 몰입감을 강요당한 채, 화면 전체를 덮는 까만 스크린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으로 오프닝 시퀀스가 끝난다. 그리고 어두운 찰리의 거실로 카메라가 들어와 드디어 게이 포르노를 보며 자위를 시도하고 있는 찰리의 장애화된 몸을 보게 된다. 성적 흥분보다는 심장의 통증으로 신음하는 찰리는 관객에게 극단의 혐오감과 함께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이후 일련의 방문객들이 그의 피쿼드호를 찾아오면서, 그의 영혼의 항해가 전개된다.

 

4. 엘리의 에세이

 

자신에 대한 혐오감, 죄책감, 우울감에 빠져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찰리가 유일하게 그의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읽는 엘리가 쓴 『모비 딕』 에세이외에 또 하나의 엘리의 에세이는 찰리가 그녀를 대신해서 다시 쓰기를 해주기로 한 미국 민주주의 계관시인으로 칭송받는 휘트만의 「나 자신의 노래」에 대한 것이다. 엘리가 쓴 에세이에서 휘트만의 「나 자신의 노래」는 「나 자신을 위한 노래」로 변경되어 있다. 찰리가 수정을 하면서 그 자신을 가르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열거한 그런 모든 것을 포함시키기 위해 자신에 대한 전반적인 정의를 깨뜨리기 위해 “나”의 은유를 사용한 것이라고 설명해준다. 그러나 엘리는 자신이 변경한 제목이 그 시에 더 적절하며, 그 시는 중복적이고, 멍청하고, 반복적이다. 그는 그의 “나의 은유”가 심오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거짓말일 뿐이고, 그는 그냥 하잘 것 없는 19세기 동성애자일뿐이라고 반박한다. 「나 자신의 노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한 이러한 엘리의 평가는 로런스가 지적한 동물이든 사물이든 너와 나는 하나이다라는 휘트만의 “나”의 은유가 생체 반응이 사라진 사후효과를 반영한 것이라는 지적을 상기시킨다.

엄마 메리(사만다 모튼)는 엘리가 반항적이고, 정말 힘든 아이로 “사악하다”(evil)고 하며,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엘리가 일전에 찍은 찰리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린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사진의 캡션, “그가 타기 시작하면 지옥에 기름 불이 나게 될 것이다”를 읽은 찰리는 엘리가 사악한 것이 아니라 솔직한 것이며, “강한 작가”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누가 쓴 것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모비 딕』에 대한 에세이는 이 영화의 시작부터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찰리가 낯선 방문객 토마스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해서 낭송, 찰리 자신의 암송, 그리고 마지막 그 에세이를 쓴 엘리 자신의 낭송에 이르기까지 관객은 첫 부분의 일부를 반복해서 듣게 된다. 마침내 마지막 엘리의 낭송은 그녀의 『모비 딕』 읽기가 로런스의 멜빌론과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녀가 이 소설 전체에서 고래들에 관한 묘사들뿐인 지루한 챕터들을 읽을 때 가장 슬프게 느꼈다고 하며, 그 이유는 작가가 그 자신의 슬픈 이야기로부터 아주 잠시라도 우리를 구원하고자 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가 슬픈 것은 그 고래는 전혀 감정이 없는데 에이헙이 왜 그를 그렇게 죽이기를 원하는지도 모르는 그냥 불쌍한 큰 고래일 뿐이기 때문이다. 에이헙도 마찬가지인데, 이 고래를 죽일 수만 있다면 그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것이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슬프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게 만들었으며, 기쁨을 느끼게 만들었다...라는 그녀의 낭송과 그녀의 미소에 찰리는 드디어 영혼의 항해의 끝을 향하여 나아간다.

 

5. 찰리의 고래 되기

 

들뢰즈는 에이헙 선장의 거부할 수 없는 고래 되기 수행을 주제로 『모비 딕』을 읽음으로써 이 작품의 위대성과 심오한 의미를 지적한다. 더 이상 모비 딕과 구별될 수 없는 영역으로 진입하여 고래를 공격하면서 곧 자신을 공격함으로써 에이헙은 모비 딕 되기를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 또한 찰리의 고래 되기 수행 과정으로 읽을 때 그 우수성이 부각된다. 그러나 찰리는 에이헙처럼 고래를 공격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공격함으로써, 즉 파멸함으로써 고래 되기를 수행하지 않는다. 혐오스러운 “고래” 찰리의 집을 찾아온 일련의 방문객들과의 만남에서 서로를 구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가운데 찰리는 억압되고 은폐되었던 “미국의 온전한 영혼”이 진정 원하는 대로 나아가는 영혼의 항해 과정에서 고래 되기에 이른다. 이에 오프닝 시퀀스에서 까만 스크린 속에 숨어 있던 찰리는 엔딩에서 빛이 가득하게 쏟아지는 스크린 속에서 고래가 되어 솟아오른다. 심해에서 수면 위로 날아오르는 고래처럼 땅을 짚고 일어선 찰리의 몸이 마치 구원을 받은 듯 위로 오르며 스크린이 화이트 아웃되는 마지막 장면은 종교적 구원의 엔딩을 시사하는 것은 아니다. 리즈가 인간이 다른 인간을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하지만, 죽음을 갈망하는 찰리이지만 그는 신은 무관심할 수 있지만,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할 수 없는 놀라운 존재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찰리의 고래 되기는 현대 미국사회가 배제하고 소외시킨 인간들이 서로를 구원하는 과정에서 이르게 된 결과임을 이 영화의 엔딩은 시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영화는 미국 고전문학에 대한 오마주와 변주를 통해 현대 고전영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주장을 할 수 있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정문영

영화평론가,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한국영화평론가협회와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다양한 매체와 장르의 텍스트들을 상호텍스트(intertext)와 팔림세스트(palimpsest)로 읽는 각색연구가 주요 관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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