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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가족을 이루는 것에 대한 불안 - 영화 <잠>에 깔린 공포의 정체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가족을 이루는 것에 대한 불안 - 영화 <잠>에 깔린 공포의 정체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3.10.16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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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수진(정유미)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러니까 남편 현수(이선균)가 배우로서 자리를 잡지 못하거나 갑작스레 수면장애를 일으키는 등의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꿋꿋하게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문제는 없다라는 목판에 새겨진 문구를 가리켰다. 남편이 갑작스레 꿈을 포기하려는 위기가 닥치는 것도, 두 사람에게 위협이 될 정도의 문제가 생기는 것도 둘이 함께 있다면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자 의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진이 이 문제를 극복했을 때 도달하는 곳은 어디인가? 바꾸어 말하자면 그들이 극복해야 할 문제들은 과연 무엇을 위협하는 것인가? 출산을 앞둔 수진과 갑작스레 진로를 바꾸어야겠다는 현수의 스트레스, 그리고 그 직후 발생한 위협적인 현수의 몽유병 등은 무엇에 대한 불안을 드러내는가?

당겨 말하자면 영화 <>은 가족을 형성한다는 것에 대한 불안을 매우 흥미로운 관점을 설명해간다. 이 작품이 재미있는 것은 영화 <>에서 설정한 가족이 마치 거래처럼 이루어지는 결혼으로서의 결과와는 상관없는 의미를 가족에 부여한다는 점 때문이다. 수진은 현수가 배우의 꿈을 접으려 할 때 그것을 완강하게 저지한다. 그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는 것은 아마도 가정 경제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겠지만 수진은 그것을 그리 중요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으며, 영화도 초반 현수의 상황을 보여준 후 더 이상의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수의 수면 문제는 점차 위협의 가능성을 높이고 급기야 수진을 광기로 몰아넣는다. 이는 <>에서 상정하고 있는 가족이 경제적으로 잘, 누구나 말하는 현실적인 문제라는 말을 앞세운 맥락에서의 가족과는 달리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내재한 관계로 설명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혀 몰랐던 두 사람이 만나고, 심지어 역시나 알 수 없는 존재의 탄생으로 구성되는 가족은 타인과 함께 살아야 하는, 나의 생활이 타인과의 생활로 전환되는 그 과정에 대한 원초적인 불안이 자리할 수밖에 없는 관계, 바로 여기에 <>이 바라보는 가족이 있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보장되어야만 하는 수면의 문제는 사실 본능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의지를 지니고 넘어서야 하는 극복과는 상생할 수 없는 개념이다. 이렇게 절대 해결되지 않을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수진에게 이성적인 판단으로 이 상황이 해결될 것이라 설명하는 것은 그리 설득력을 지니지 못할 것이다. <>이 반려견 후추의 잔인한 죽음을 굳이 수진 앞에 확인 시킨 이유는 그 때문이다. 진짜 눈앞에 다가온 죽음의 문제는 수진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못 믿을 것도, 하지 못할 것도, 그리고 거부할 것도 없는 상황을 만들기에 충분했고, 과거엔 들어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던 무당의 말들은 이제 그가 이 상황을 해결하고 해석할 수 있는 힌트로 굳건히 자리 잡을 수밖에 없다. 아기까지 태어난 이상, 그리고 자신이 지켜보지 않는다면 끔찍한 상상까지도 가능한 이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도 수진을 막을 수 없다.

영화의 중반을 넘어서면서 수진의 광기와 무속이 맞닿는 장면이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러한 수진의 절박함이 신선하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함께 살아남은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내 사람이 된 현수가 아니라 그 현수를 괴롭히는 다른 이유가 있고,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존재라 해도 그것을 몰아낸다면 해결될 것이라 믿는 것이 이상적이다. 이 모든 과정이 비록 남들 눈에 병으로 비칠지라도 가족을 구성해야 하는 수진에게 다른 것을 의식할 여유 따위는 없다. 이러한 수진의 절절함이 읽히는 순간 수진이 병원에서 도망치면서까지 현수조차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내뱉는 것은 영화 속 기묘한 색채들과 만나면서 묘한 의문과 희열을 동시에 선사한다.

 

여기까지 왔을 때 수진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현수를 괴롭히는 그 정체가 무엇이던 간에 수진이 그가 설명하는 촘촘한 해석이 적어도 지금을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것, 그것뿐이다. 수진이 병원에서 오랫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몇 개의 시간들, 그리고 몇 개의 기억들, 그것을 짜맞추어 브리핑까지 하며 안전하게 구성하려 했던 가족을 위해서는 아무리 이해할 수 없다해도 그것이 우리를 설득했다고 믿어주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의 해석, 즉 배우였던 현수가 연기를 하는 것인지, 수진의 설명이 맞았던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결국 자신의 생각이 맞았고, 그것으로 자신이 가족을 지켰다고 믿게 한다면 수진은 가족들과 함께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은 갑자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버린 바로 그 시작점으로 돌아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가 인식하는 순간 가족은 이미 형성되어 있었기에, 이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이들과 이다지도 끈끈하게 지내야 하는 가족에는 사실 많은 불안을 내재하지만 그 불안은 애초부터 없는 것처럼 취급되는 것이다. 특히 가족이 나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상상력은 불경한 것에 가깝기에 더욱 그러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하지 않은 일을 어느 날 인식하게 되었을 때, 내가 하지 않은 행동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을 때, 우리는 문득 타인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는가. 가족의 형성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 영화 <>은 이렇게 재미있는 대화를 요청했다.

 

 

<>(2023)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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