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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생존한 아파트에 관하여: 영화<콘크리트 유토피아>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생존한 아파트에 관하여: 영화<콘크리트 유토피아>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23.10.30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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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슐라(insulae)에서 '도무스'(domus)로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한국 아파트의 역사를 먼저 이야기 했으니, 이 참에 아파트의 기원에 대해 알아보자. 아파트의 기원은 작업장과 주거공간을 위아래 층으로 지어서 좁고 높은 다층 주택의 형태를 이루었던 고대 로마의 ‘인슐라’(insula)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로 그 명맥은 산업혁명에 이르러 대규모로 유입된 도시 노동자들의 과밀화와 비위생적인 생활환경, 범죄환경 노출 등의 슬럼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발을 시도한 공공주택으로 이어진다. 영화에서는 이런 류의 슬럼화 문제를 많이 다루어 왔지만, 한국으로 넘어와서는 아파트와 관련한 문제로 그 주제의 결을 바꾼다.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그 중 가장 최근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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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취지와는 다르게, 고대 로마에서부터 다층 주택, 인슐라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하층민이 사는 곳이라는 꽤 냉랭한 시선이 섞여 있었는데 이는 산업화 시대를 지나면서 더 강화되어 갔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고대 로마의 귀족 혹은 부유층이 살았던 거주형태, 도무스(domus)와의 비교를 통해서 찾을 수 있다.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첫째, 높은 건축 자재의 품질. 일반적으로 도무스는 화재로부터 안전해야 하므로 불에 강한 건축재료를 사용해야 한다. 둘째, 개인 프라이버시의 보호. 도무스는 개인 정원, 중정, 응접실, 식당, 침실 등 다양한 생활 공간을 견고하게 구획하여 주인의 프라이버시를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 셋째, 사회적 지위의 상징. 도무스는 건축물의 크기와 위치, 장식 등을 통해 사회적 신분을 과시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치적 연합을 구축하거나 강화하는데 도무스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인슐라(insulae), 출처_Khan Academy
인슐라(insula), 출처_Khan Academy
도무스(domus), 출처_sciencphotolibrary
도무스(domus), 출처_sciencephotolibrary

하지만 인슐라는 도무스와 정반대로 그 모든 것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싸구려 건축자재(주로 값싼 벽돌이나 목재 등)를 사용하기 때문에 도무스의 조건을 모두 충족할 수 없다. 그런데 잘 보면 귀족의 주거형태, 즉 귀족들이 살던 도무스의 조건과 영화<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등장인물들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 있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요컨대 영화<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인물들은 인슐라에 살면서 도무스에서 사는 사람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새로운 정치 세력의 결속, 주민 회의에 의한 외부인 퇴거 조치 등) 인슐라에 사는 사람들, 특히 영화 속에서는 '드림 팰리스'(라는 도무스)와 대비되는 '황궁 아파트'(라는 인슐라)에 사는 사람들이 왜 고대 귀족, 부유층이 하던 정치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을까?라는 의구심이 남는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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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들을 고대 로마 시대의 귀족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오명에서 구하는 방법은 ‘도무스와 인슐라’라는 주거형태가 암시하는 계층 별 환경의 간극을, 이른바 품질 높은 건축 자재의 문제로만 축소하여 바꿔보는 것이다. 인슐라에는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도무스를 건축할 때 사용하는 자재로써 화재에 강하고 공간을 정확히 나누어 프라이버시를 보호할 수 있게 하며 크고 견고하게 건축할 수 있도록 하는 건축자재는 어떤 것이 있을까? 유력한 후보는 바로 ‘콘크리트’다. 그러고 보니 고대 로마인들이 콘크리트에 일가견이 있지 않았나. 그러면 다음과 같이 질문 해보는 것은 어떨까? “만약 인슐라를 콘크리트로 짓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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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문화 이론가이자 건축가인 찰스 젱크스(Charles Alexander Jencks)은 1972년 세인트루이스에 위치한 공공주택 단지, “프루이트-아이고(Pruitt-Igoe)”의 폭파 장면을 보고 ‘모더니즘의 죽음’(아래 그림 참조)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모더니즘 건축의 이상주의적 비전이 현실의 도시 계획이 가지고 있는 복잡성과 충돌했을 때 어떤 결과를 일으킬 수 있는지 해석한 거였다. 

 

"Pruitt-igoe Myth" 출처_GreyScape
"Pruitt-igoe Myth" 출처_GreyScape

잔혹하게도 영화<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황궁 아파트는 프루이트-아이고의 운명과 정확히 반대 아니 반전된다. 혼자만 폭파되었던 프루이트-아이고와 달리, 황궁 아파트는 혼자만 폭파되지 않은 것이다. 콘크리트로 인슐라를 지었더니 모든 파괴 속에서 홀로 남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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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보면 영화는 젱크스가 진단한 모더니즘의 죽음과 달리, ‘모더니즘의 생존’을 말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모더니즘의 건축적 이상(기능주의, less is more 등)이 담겨있었던 공공주택의 생존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바로 그 중심엔 ‘콘크리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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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막상 인슐라가 콘크리트 덕에 생존하게 되자, 도무스가 아니라 유토피아가 되려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을 살펴보게 만드는 것이 이 영화의 힘이다. '지키려는 자'와 '뺏으려는 자'의 이야기는 그 과정에 맞춰 나란히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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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탁의 행세를 하는 모세범(이병헌)은 여러 면에서 그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다. 특히 황궁 아파트의 실소유자 자격 여부를 따지는 부분에서는 ‘지키려는 자’가 되지만, (모세범은 진짜 김영탁에게 부동산 사기를 당한 터다) 외부인 퇴거 조치에 앞장설 때는 ‘뺏으려는 자’가 된다. (아파트에 숨어든 외부인들을 주도적으로 방출하는 일) 그 안에서 영탁(으로 행세하는 모세범)은 이중적인 태도, 즉 파괴와 복원을 동시에 상상한다.

이유는 이렇다. 그는 황궁 아파트 전 소유주, 김영탁에게 사기를 당한 이후 모든 분노를 동원하여 파괴를 상상했을 사람이다. 옳고 그름이 명확한 이성적 세계를 상징하는 바둑돌들을 흑백 구분 없이 진짜 김영탁의 입에 처넣는 비이성적인 행동을 한 것으로 유추해 볼 때, 그러니까 사기꾼 김영탁을 죽이고 있는 (살인이라는 파괴의 행동) 바로 그 순간은 황궁 아파트 902호를 복원(소유권을 되찾으려는 행동)해 내려는 노력을 동시에 보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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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범이 그러고 있을 때, 민성(박서준)과 명화(박보영)는 서로에게 의지하면서도 외부인 퇴거 조치에 대해서는 상반된 의견으로 대립한다. 그 사이 콘크리트로 지어진 인슐라 안에서 지키고 뺏으려는 서사는 점점 파국에 이른다. 그러다가 파국이 절정에 다다를 무렵, 자연스럽게 찾아 온 질문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외부인을 모두 몰아내면 황궁 아파트(콘크리트 인슐라)는 유토피아가 될 수 있을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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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은 곧 민성과 명화의 탈출을 이끌어낸다. 황궁 아파트에서 쫓겨난 후 폐허를 떠돌게 된 것이다. 그 와중에 외부인들과의 충돌에서 치명상을 입은 민성이 곧 숨을 거두자 홀로 남은 명화는 익명의 누군가를 쫓아 다른 아파트에 도착한다. 이때 카메라의 시선이 회전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어떤 변화를 강하게 암시한다. 이를테면 현대판 도무스를 연상시킬 만큼 호화스러운 넓은 응접실은 화면이 가로에서 세로로 일어나듯 움직이자, 넓고 화려한 도무스에서 좁고 높은 인슐라가 된다. 민간기업 브랜드와 공기업 브랜드 아파트의 비교, 임대 아파트냐 분양 아파트냐의 차이를 뒤트는 것 같은 폐허의 기립 영상(회전 영상)은 건물과 건물을 비교하는 것은 애초부터 의미 없는 일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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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왜 하필 유토피아인가. 영화에서는 건물의 종말을 초래한 완벽한 파괴가 평등하고 공평한 공동체주의를 만들 수 있다고 우선 강조한다.(유토피아의 이념) 모든 걸 파괴해 버렸던 재난은 이를 상징한다. 그 후 건물과 건물을 비교하는 시대가 지나고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 해결해야 하는 시대가 마침내 열렸다고 말하면서 이내 유토피아를 꺼내든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는 (황궁 아파트 주민들에 의한) ‘집단을 위한 개별 투표’가 아니라 폐허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개인을 위한 공동체적 결단’에 의해 앞으로의 상황이 펼쳐지리란 걸 알려주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노력은 생존한 인슐라(황궁 아파트) 안에서 이뤄지지 않고, 인슐라의 바깥 그러니까 모든 것이 파괴된 폐허 속에서 기어이 살아남은 생존자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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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앞서 던진 질문, ‘외부인을 모두 몰아내면 황궁아파트는 유토피아가 될 수 있을까?’로 돌아가 보자. 말하자면 이 영화는 재난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면서 시작되고, 모든 사람이 생존자임을 확인하면서 끝나는 영화다. 황궁 아파트의 주민들만 이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유토피아를 특정 장소로 인식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아파트는 재난 이전 상황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황궁 아파트만 무너지지 않았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게 폐허가 된 아파트는 점차 유토피아를 상기하게 된다. 게다가 영화는 아파트가 사라질 때 나타난 강렬한 패닉상태만큼의 정도로 유토피아를 찾게 한다. 그러니 이렇게 정리해볼 수도 있다. 없는 장소(utopia)는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아파트를 잃은 모든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을 유토피아를 강렬하게 원하게 된 것이라고. 뭔가를 잃게 되었음을 느낄 때 사람들은 다시는 없어지지 않을 것을 부여잡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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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수일의 ‘아파트’를 변주하여 부르는 혜원(아니, 여기선 혜원 역을 맡은 배우 박시후가 부른 노래라 해야할 것이다)의 목소리는 아파트라 불리는 자기만의 세상을 잃은 자들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끝끝내 매달리는 '없는 장소, Utopia'를 마치 자포자기한 것처럼 우울하게 구현한다. 그게 오늘날 우리 아파트의 모습인 듯이 말이다.

 

 

글·지승학
영화평론가. 문학박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홍보이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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